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6부 위험에 처한 관계 제33장 성소와 하나님의 명성
 하지만 이 여인은 세련된 무시가 아닌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했다. 여인은 필사적이었다. 더우기 여인은 매우 현명하여 왕이 왜 주저하고 있는지 간파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했다. “오 왕이시여, 모든 비난은 저와 저의 아비의 집이 받겠습니다. 왕과 왕의 보위는 이 사건에 대해 결백할 것입니다”(9절). (283.3)
 여인은 최고법관으로서 왕이 내리는 판결은 도덕적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죄 있는 자를 아무런 처벌 없이 내버려 둔다면 사람들은 같은 범죄를 저지를 좋은 구실을 얻게 하거나 왕의 책임감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나라에 손상을 줄 것이다. (284.1)
 내가 파파라치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시속 120마일의 속도로(시속 200km) 고속도로를 질주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재판 받을 때 판사가 내 대신 벌금을 납부해 주었다고 상상해보자. 그것은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판사의 재선거 시기가 가까이 왔을 때에 반대자들은 어떤 행동을 취하겠는가? 그의 판결 기록을 뒤져서 나의 판결사례를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광고를 하고 다닐 것이다. “현직 판사는 범죄에 대해 물러 터졌다.” 관용을 베푸는 판사는 자기 자신의 공의가 타당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특별히 살인죄에 대한 이러한 판결에서는 더욱 그렇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을 아무런 처벌 없이 풀어주어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어떤 측면에서는 판사 스스로에게 살인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284.2)
 그러나 드고아의 여인은 말하기를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나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했다. 그 여인은 자비가 대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기꺼이 그 책임을 자기 자신과 가족이 지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 자신의 권위와 정의로움을 대변하는 심판 자리인 왕과 왕좌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살인죄와 그에 대한 비난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결국 다윗은 그녀의 요청을 허락하면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지켜줄 것을 약속했다. (284.3)
 사무엘하 14장의 이야기는 자비와 정의 사이의 난해한 긴장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드고아의 슬기로운 여인은 요압장군이 주선한 배우였고 다윗 왕에게 고한 슬픈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였다. 요압은 자신의 형제인 암논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술로 도망해 살고 있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 여인을 이용한 것이다. 요압은 압살롬이 비록 살인죄를 저질렀으나 그를 용서해 주기를 원했다. 비록 여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였으나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문제와 같이 실제 상황에 적용되는 자비와 공의의 진리를 반영하기 때문에 다윗에게 성공적이었다. (285.1)
 만약 이 꾸며진 이야기 속에 묘사된 그녀의 삶이 다소 혼란을 일으킨다면 먼저 다윗의 딜레마를 들어보자. 다윗 왕가의 문제는 현대 영국 왕가의 속임수들을 하나의 다과회 정도로 보게 만든다. (285.2)
 정욕에 불과했지만 다윗의 아들 암논은 아름다운 이복 여동생 다말을 사모하게 되었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해 욕보였을 때에 다윗은 그에 대해 분노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을 처벌하지 않았다. 구약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역에는 다윗이 암논을 처벌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285.3)
왜냐하면 다윗이 그가 그의 장자인 까닭에 그를 사랑하였음이라(삼하 13:21).
(285.4)
 다윗은 암논에게 너무나 자비로웠다. 하지만 자비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다윗의 또 다른 아들이자 다말의 친 오빠인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을 범한 자에게 왕의 자비가 공의롭지 못하게 적용된 것을 보았다. (285.5)
 그래서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법을 집행하기로 결심했다. 압살롬과 그의 종들은 암논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술 왕의 땅으로 도망갔다. 암논에 대한 다윗의 자비로움은 암논이 생명을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과의 관계를 희생함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결국 그는 한 아들을 잃는 대신 두 아들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286.1)
 자비는 사랑에서 나온다. 다윗이 암논에게 자비롭게 대한 것은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자비롭지 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다윗의 이야기처럼 역설과 모순이 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 한사람에게 자비로운 것은 또 다른 사람에겐 불의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불의는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양쪽의 사람을 다 사랑할 수 있겠는가? (286.2)
 당신은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본 일이 있는가? 우리 주위에 이러한 부모들, 선생님들, 고용주들 그리고 행정자들이 있지는 않는가? 난 교수로서 이러한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얼마 전 내가 교수로서 그리 경험이 많지 않은 때였다. 꽤 많은 학생들이 같은 퀴즈문제에서 똑같은 실수를 범했고 때문에 선처를 요구했다. 많은 학생들이 똑같은 문제에 빠졌기 때문에 자비롭게 학생을 대해주는 것이 옮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한 다른 학생들은 나의 선처가 오히려 공정하지 못한 처사였다고 생각했다. (286.3)
 다윗이 직면한 딜레마는 간단히 처리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녀들의 생명과 국가의 안위를 다루는 것이었다. 다윗의 자비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컸다. 다윗은 압살롬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오도록 했다. (286.4)
 그러나 다윗이 그의 아들을 용서했을 때에 드고아의 여인처럼 자신이 비난을 받겠다고 한 사람이 없었다. 다윗은 자신이 그 모든 대가를 담당해야 했다. 그는 모든 대가를 홀로 치러야 했다. (287.1)
 얄궂게도 자비로운 대우를 받은 압살롬 그 자신이 다윗을 공격하고 아버지로 하여금 자비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했다.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여 다윗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첩들까지 취했다. 압살롬이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적이었던 주된 이유는 아버지 다윗의 불의를 시정할 수 있는 정의를 위한 개혁자로 자신을 나타냈기 때문이다(삼하 15:2~6). 다윗과 압살롬의 싸움의 핵심은 왕의 품성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다윗과 압살롬 둘 중 누가 공정하게 통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287.2)
 당신은 오늘날의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야만적인 죄를 저지르고도 단지 엉덩이 한 대 때리듯 아주 가벼운 선고를 받는 오늘날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범죄인들에 대한 자비를 선택하겠는가? 비탄에 잠긴 피해자 가족들을 위한 공의로운 심판을 택하겠는가? 그렇다. 지금이야 말로 공의가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이다. (287.3)
 다윗은 위대하고 지혜로운 왕으로서 사랑의 양쪽 측면인 자비와 공의 사이에서 그가 풀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반역적인 행동에서 보여준 것처럼 압살롬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결국 젊은 왕자에게 용서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진정한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용서는 의미 없이 허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압살롬은 용서받았으나 그는 살인자인채로 그대로 남아있었고 살인자의 죽음을 죽었다. (287.4)
 다윗은 그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심지어 그의 왕국보다 더한 것이라도 지불하길 원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288.1)
 사무엘하의 이야기에서 자비와 공의의 역동성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에 관련된 상호교류를 잘 보여준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마음과 같이 우리의 부모, 우리의 왕, 우리의 재판장이신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시다. 압살롬과 같이 우리도 죄를 범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시 103: 3~4). 다윗과 같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죄나 어느 한 쪽도 희생할 수 없는 사랑의 양면인 자비와 공의를 적용하는 지혜의 부족으로 인한 도덕적 결함으로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용서와 함께 그분의 심판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했다. (288.2)
 하나님은 자비의 대가를 지불하셔야만 했고 자신 외에는 그것을 감당할 존재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소에서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갔을 때 경험한 것보다도 더 큰 고통과 겸비를 견디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자비의 대가를 감당하신다. (2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