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레이디 대위가 그의 낙하산을 타고 보스니아에 떨어졌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타임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펜타곤(Pentagon)의 대응을 시작했을 때에 기획 장교들은 그리 큰 희망을 걸지 않았다. 한 공군장교도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고백했다”(Time, 1995. 6. 19. 22). (279.1)
펜타곤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펜타곤은 워싱턴 근교에 오각형으로 펼쳐진 건물이다. 그런데 건물이 대응할 수 있을까? 분명히 여기서 펜타곤은 그곳에 자리 잡은 미국의 국방부를 대변하는 조직을 말하며 대응은 군사령부의 장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79.2)
우리는 백악관을 똑같은 방법으로 언급한다. “백악관이 확인했다”“백악관이 그 사실을 부인했다.”“백악관이 어떤 잘못으로부터 결백하다고 주장했다”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백악관은 대통령과 그의 조직을 대표하는 본부가 위치한 장소이다. 백악관의 행동과 평판은 대통령의 것이다. 바로 대통령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279.3)
하나님의 본부는 하늘에 있는 그분의 성소인 그분의 보좌가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시 11:4; 렘 17:12).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보좌와 성소가 그분의 품성과 권위와 명예를 대변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 (279.4)
하나님의 성소와 그분의 명성의 연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소에 있고(신 12:5, 11) 그분의 이름이 그분의 명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 하여 행하였음이로라”(겔 20:9). (280.1)
이름이 명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쉽게 이해된다. 특별히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그렇다. 얼마 전 나는 라디오에서 한 전자장비 체인점인 “좋은 사람들”(The Good Guys)의 광고방송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좋아야만 합니다!” 어떤 사업이든지 좋은 “이름”을 만들고 지켜가기 위해서는 명성에 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280.2)
수백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소/성전에 지상의 또 하나의 부가적인 본부를 갖고 계셨다. 레위기 16장이 하나님의 성소가 대속죄일에 정결케 되거나 정결하게 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이 정결함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 사상을 갖게 된다. 마치 백악관이 결백하다는 것이 대통령의 명성에 영향을 끼쳤거나 끼치게 될 사건에서 대통령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성소의 정결은 어쨌든 하나님이 정결하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280.3)
“전체를 위한 부분”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단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분을 대항하는 모든 죄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처럼(약 2:10) 그렇게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도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280.4)
최근에 한 학생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왜 지구에서 벌어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단히 우주로부터 지구를 추방시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썩어 자멸하도록 놔두는 것이 훨씬 쉬웠을 때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겁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신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은 온 우주 거민에게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28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는 일들의 동기와 진실을 은폐하고 온전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정보조작(spin control)이 필요하셔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이타적인 사랑은 우리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진실하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옷장 속에 해골을 감추거나 추악한 비밀을 보지 못한 척하는 위선자가 아니시다. (281.2)
어떤 죄악이 하나님의 명성에 영향을 끼쳐 그분의 성소가 대속죄일에 정결케 함이 필요하게 했을까? 레위기 16:16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성소를 정결하게 하므로 하나님이 더 이상 그 영향을 받지않게 된 것을 확인해준다. (281.3)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레 16:16).
(281.4)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분께 영향을 미친 죄악들은 바로 그의 백성들에게서 기인한다. (281.5)
제의적인 부정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 영향을 미쳤다. 희생제물을 통해 이미 용서받은 죄들도 이미 용서가 되었을지라도 그분께 영향을 미쳤다. (282.1)
제의적 부정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부정함 한 가운데” 그들과 더불어 사셨다(레 16:16; 참고 15:31). 그분은 거룩하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정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백성과 아주 가까이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성과 죽음의 운명과도 어울리게 될 것이었다. 특별히 심각한 제의적 부정함으로부터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성소로 가져오는 것을 볼 때에 분명하다. 그들은 그들의 부정함을 성소에 떨어뜨렸고 바로 이 부정함들은 대속죄일이 이르기까지 쌓여졌다. (282.2)
왜 이미 용서받은 죄들이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영향을 미쳤는가? 이미 사람이 용서를 받았다면 속죄에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왜 이러한 죄들이 연중에 개인적으로 용서 받을 때와 대속죄일에 걸쳐두 번 다루어져야 하는가? 우리는 다윗 왕과 자비의 대가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봄으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282.3)
“왕이여 도와주옵소서!” 드고아의 한 여인이 다윗 왕 앞에 부르짖었다. 다윗왕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통스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282.4)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 죽인지라 온 족속이 일어나서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두지 아니하겠나이다(삼하 14:5~7).
(282.5)
드고아의 여인은 두려움 없이 왕 앞에 나아왔다. 간음죄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온 여인과는 다르게 자진해서 다윗 왕에게 나왔다. 이 여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다. 정의는 살인자에게 사형언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만약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게 되면 노년의 자신을 돌아볼 자식도 그녀의 가족의 대를 이어줄 자도 없어져서 집안이 멸절될 것이었다. 그의 남은 아들을 향한 사형언도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283.1)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장으로써의 다윗왕은 그 아들을 용서함으로 이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했다면 공의에 대한 다윗의 명성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그 명성은 단순히 다윗의 자부심의 일부가 아니라 왕으로서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주된 근거 중의 하나였다. 이 사건은 매우 어렵고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다. 다윗은 이 문제를 숙고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때문에 다윗은 그 여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명하고, 곧 그녀를 위한 명령을 내릴 것을 약속하였다(삼하 14:8). (2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