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I.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우리는 위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사도 바울의 권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 14:5)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모든 날은 똑같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평등한 날이기도 하지만 각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낫기도 하고 저 날이 이 날보다 더 못하기도 하다. 모든 날을 평등한 날로 보는 입장에도 이유와 명분이 있고 한 날을 다른 날들보다 더 낫고 더 특별한 날로 보는 입장에도 이유와 명분이 있다. 모든 날을 평등하게 보는 것도, 그리고 이 날을 저 날보다 더 낫게 보는 것도 모두 “자기 마음에서 확정할” 일이다(롬 14:5). 모두 개인의 도덕적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62.1)
 그러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도덕적 신념은 어떤 것인가. 모든 공간을 똑같이 여기고 모든 사람을 똑같게 보는 평등주의의 신념일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다는 신념, 날이면 다 같은 날이지 날 위에 날이 있느냐란 신념, 곧 평등과 보편의 신념일 것이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생각처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개인의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의 평등 이상처럼 이러한 정신은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실지로 모든 날은 대등한 날이고 평등한 날이다. 어느 날은 차별을 당하고 무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62.2)
 그렇다면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도덕적 신념은 어떤 것일까. 제칠일을 다른 여섯 날보다 다르게 보는 신념은 어떤 것일까? 모든 공간과 모든 사물을 똑같이 여겨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차별의 신념일 것이다. 평등이 도덕적인 신념이지만 차별도 도덕적인 신념이다. 내 물건과 네 물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도덕적이 아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않는 태도는 못된 태도이다. 같은 이유에서 노약자를 보통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도덕적인 태도가 아니다. 배고픈 사람의 처지와 배부른 사람의 처지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부도덕적이다. 남의 집 여자와 자기의 아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아버지의 공간과 자기의 공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큰 산과 작은 산, 큰 강과 작은 강을 똑같이 같다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362.3)
 그래서 만물은 같으면서 다르다. “같다”고 강조되어야 할 국면이 있고 “다르다” 해야 할 경우가 있다. 날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혁명이 사람은 모두 같다 했을 때 우리에게는 부모도 없고 어른도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를 특별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누구는 우리와 같이 배도 고프지 않고 사랑과 미움의 감정도 없고 우리처럼 죄와 의에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362.4)
 바울 사도는 만물을 보통성과 특별성, 평등성과 차별성의 두 원리에서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의도했던 말은 이러했을 것이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이해하겠다.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날들이 어떻게 다 같은 날이 되겠는가, 그리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모든 날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지 뭐 다른 것이 있겠느냐∙∙∙ ”“날들이 같다” 하든지 “날들이 다르다” 하는 이야기는 날들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날들의 가치에 대한 문제인 만큼 이것은 사람의 도덕적 가치관에 연관된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그 날이 “누구에게” 어떠한 날이냐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사람들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신념과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신념으로 나뉘어 질 수 있지만 동시에 동일한 사람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신념과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신념에 다같이 동참할 수 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다는 민주사회의 평등주의와 노약자와 일반인을 구별하고 부모와 자식을 구별하는 분별심이 꼭 서로 충돌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윤리나 사유 재산을 존중하는 정신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다같이 존중하자고 하는 민주사회의 평등 사상과 꼭 충돌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63.1)
 그렇다면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날인가. 우리 각 사람에게 부모님의 생신일이 있고 그 날이 각 사람에게 존중되어야 하듯이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저 날보다 낫게 여겨야 할 날인가, 아니면 모든 날과 같이 똑같게 여겨야 할 날인가. 아니면 저 날보다 낫게 여겨도 무방하고 똑같이 취급해도 무방한 날인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안식일의 문제도 결국 안식일이 “누구에게 어떤 날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3월 1일이 한국 사람에게 어떤 날이고 8월 15일이 한국 사람에게 어떤 날이냐 하는 것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날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의 문제 곧 그들의 도덕적 신념의 문제가 될 것이다. 3월 1일이 한국 사람에게는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미국 사람에게는 모든 날과 똑같은 날인 것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특별한 날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든 날과 똑같은 날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363.2)
 자신에게는 분명히 저 날보다 이 날이 더 중요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 날을 모든 날과 같이 여긴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태도일 것이다. 자신에게 이 사람은 분명히 저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과 같게 취급한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태도일 것이다. 그 사람은 나의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크게 모욕을 느낄 것이다. (363.3)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크게 보아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의 한 분”이고 나의 아내도 다른 여자들과 같은 “여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다른 것은 수많은 같은 요소 가운데의 다름일 뿐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모든 날의 공통적 특성을 안식일도 가지고 있다. 안식일은 그러한 보통 날들의 하나이면서 다른 보통 날과 다른 것이다. 그 안에 평등성과 특수성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신앙인도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정신”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363.4)
 안식일은 성일로서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다. 지존자의 은밀한(시 90:1) 날이다. 사람이 그 앞에서 마땅히 신을 벗어야 하는 거룩한 시간이다(출 2:5 참조).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날이다(레 11:11, 12;계 21:11). 그리하여 안식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 대대의 거룩한 표징이 되는 날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인줄을 우리로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의 날이다(출 31:13). 우리가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날이다(출 20:8). 사람이 거룩하게 지키면 그로 인하여 생명을 얻을 날이다(겔 20:13). 그러면 왜 성일 있는 삶이 성일 없는 삶보다 더 좋은 삶인가. 왜 성경은 성일과 성소와 성도를 강조하여 가르치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의 목표를 거룩에 두고. 삶의 목표를 거룩에 두고. 역사의 목표를 거룩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차별적 본성이 거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거룩을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룩과 연관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자기 “됨”의 어떤 충족감을 갖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창세기의 날들은 “좋은” 날들에서 “심히 좋은” 날로, 그리고 다시 “복되고 거룩한” 날로 행진하고 있다. 사람은 “좋은” 사람에서 “심히 좋은” 사람으로, 그리고 다시 “복되고 거룩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거룩한 날이 복된 날인 것이며 거룩한 사람이 복된 사람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거룩한 나라가 하늘나라이고 거룩한 삶이 구원받은 삶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을 살고 구원받은 삶을 사는 것이다. (364.1)
 그리고 삶을 거룩하게 하고 역사를 거룩하게 하고 세대를 거룩하게 하고 사람을 거룩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시간이 거룩해져야 한다. 성일이 있는가 없는가는 거룩하게 되는 삶의 바탕을 갖는가 못 갖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최초로 “거룩하다”(카도쉬)라는 낱말이 사용되었던 대상이 시간인 제칠일이다(창 2:3). 성일로서의 안식일은 이처럼 사람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364.2)
 그리고 성일로서의 안식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날이다. 하나님이 그 거룩한 낯을 사람에게 향하는 날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다.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날이다. 사람이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는 날이다”(마 4:10). 사람이 얼굴을 씻고 몸을 씻어 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날이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인간의 얼굴에서 “신의 형상”이 반영되어야 하는 날이다. (364.3)
 진실로 안식일은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히 12:2) 주님을 바라보는 날이다.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 예배하면서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크게 자라나는 날이다. 마치 한 알의 겨자씨처럼 작은 존재가 나물보다 큰 나무 같은 존재로, 흙 같고 물체 같고 육체 같은 존재가 물체보다 크고, 육체보다 큰 영적 존재로 자라나는 날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장하는 날이다. (365.1)
 안식일 자체가 큰 나무 같고 신령한 인격 같은 날이다. 흙이요 물체요 육체 같은 모든 피조물들을 그 가지와 날개와 품에 깃들게 하여 그 삶에 쉼을 가진 신령한 존재로 성장케 하는 예배의 날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 교제를 나누어 하나님의 신성에까지 자라나게 되는 날이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이러한 날이 없다는 말은 그들에게 이같은 성장, 이같은 삶, 이같은 신성의 세계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같은 예배, 신령과 진실의 예배는 영적인 존재로 성장하려는 존재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기회이며 권리이다. 지상 명령 같은 절대적 가치의 날이다.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해서도 안되는 특권의 날이다. (365.2)
 안식일은 성일로서 세상의 성역 같고 금역 같은 날이다. 하나님이 거하는 집 같은 날이다. 신성불가침의 날이다. 공간 속에 구별된 하나님의 도성 같고 시간 속에 성을 둘러 구별된 하나님의 도성 같은 날이다. 이 땅에 있는 신의 세계가 안식일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들로부터도, 우주 전체로부터도 구별된 거룩한 금역이다. 하나님의 성소보다 더 두렵고 더 아득하고 더 깊은 지성소 같은 날이다. “지존하신 자의 은밀한 곳”(시 91:1)이다. 절대 금역이다. 신성 절대불가침의 영역이다. 사람이 마땅히 “삼가 거룩히 지켜야” 하는 날이다.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잡것들이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365.3)
 그런데 하나님은 삼킬 자를 찾아 사자같이 부르짖는 채권자와 율법과 죄와 본능과 죽음과 무의미 같은 것들에게 쫓기는 죄인들과 추방자들과 빚쟁이들을 이곳으로 초청하셨다. 그리하여 이 날은 이들에게 도피성 같은 날이다. 이 날 안으로 도피한 자는 신성 절대불가침의 나라에 도피한 것이다. 아무도, 무엇도 이들을 쫓아 이 거룩한 안식일의 도피성으로 쳐들어오지 못한다. 신성 절대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둥과 벼락 같고 불칼 같은 “가라사대”로 이 도피성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365.4)
 안식일은 휴일로서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휴일이다(막 2:27). 안식일은 사람들과 육축들이 차별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고 노는 날이다” (출 20:10). 안식일은 사람의 쉼을 위해 있다. 사람 낳고 돈 낳았지 돈 낳고 사람 낳은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낳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낳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숨쉬는 것들을 긍휼히 여겨서 제정하신 날이다. 생명있는 것들에게 쉼은 곧 생명의 연속이기 때문에 생명을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이 사람과 뭇생명들로 하여금 “숨을 돌리게 하고자” 하여 만드신(출 23:12) 날이 안식일이다. 모든 생명체의 목숨은 들고 나는 숨이고 숨쉼은 곧 숨을 돌리고 숨 고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365.5)
 사람의 삶은 크게 휴일이 있는 삶과 휴일이 없는 삶으로 나눌 수 있다. 세상에는 일하는 6일과 일하지 않는 제7일이 있듯이 일만 하는 사람과 쉬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무겁고 수고스러운 일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돌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채 숨돌릴 겨를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쉬지 못하여 숨넘어가는 목숨들이 있다. 성경의 종교에서 제7일마다 일손을 놓고 숨돌리며 사는 사람은 사람 같이 사는 사람이고 숨돌릴 겨를 없이 사는 사람은 사람같이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쉬고 못 쉬는 것으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별이 생기고 있다. (366.1)
 그런데 경쟁적인 사회에서, 숨쉬고 숨돌리는 문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생명들에게 선택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능력의 문제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쉴 수가 있으나 힘이 없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마 26:41) 쉴 수가 없다. 마음은 원이로되 돈이 없어서 쉬지 못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권력이 없어서 쉬지 못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시간이 없어서 쉬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안식일의 명령은 차별 없는 초청이다. 종이나 여종의 자식이나 나그네나 육축에 차별 없이, 지위나 능력에 차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는 은혜의 초청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는 누구나 다 오라하는 초청이다(마 11:28). (3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