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I.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불교나 유교 같은 고등 종교의 기본적인 계명에 성경의 제칠일 같은 날짜에 관한 계명이 있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성경의 십계명에는 제7일의 계명이 포함되어있는가? (358.1)
 왜 안식일의 하나님과 안식일의 종교는 특정한 날에 대하여 이토록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쉬면 그만이지 왜 쉬는 날짜가 문제인가. 특정한 날짜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사람의 성격과 운명이 달라지는가. 일요일에 쉬면 사람의 성격이 나빠지고 토요일에 쉬면 사람의 성격이 좋아진다는 말인가. 쉬는 날짜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는가. 특정한 날의 쉼에 대하여 이토록 까다로운 안식일의 종교는 어떤 종교이며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358.2)
 날들의 셈 법을 가르치고 있는 창세기 1장의 교훈
 성경의 종교와 성경의 하나님은 만물의 쉼과 관련하여 제칠일 안식일 곧 특정한 날짜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앞서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날 자체, 시간 자체, 그리고 날짜 자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시며 그 점에 있어서 다른 신들에 대하여 자신을 차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358.3)
 생존의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간 자신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던 때가 없다. 공간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이다. 공간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소유욕과 지배욕으로 표현되어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이 지나친 소유욕과 지배욕을 문제로 삼게 되었다. (358.4)
 그러나 시간에 대해서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의 눈에 시간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물질과 공간에 눈이 멀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주 시간의 심각성을 소홀히 여긴다. 사람들은 삶의 문제의 전부가 물질과 공간으로 해결되는 줄로 알기 쉽다. 그리하여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놓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하면”(눅 12:19, 20)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밤으로” 자기의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렇게 욕심을 부려 모았던 공간과 물질이 생명에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로소 공간과 물질이 사람의 생명의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경은 이 사실을 깨우치고 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히 11:1). 시간 같이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은 세계가 실재인 것이다. 보아도 모르겠고 들어도 모를 것 같은(사 6:9) 세계가 참 세계인 것이다. 보이는 색계(色界)는 눈에만 그렇게 보이고 귀에만 그렇게 들릴 뿐이고 실지로는 안개 같고 구름 같고 도깨비 같은 헛것들의 세계인 것이다. (358.5)
 성경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중요시하고 날을 중요시하고 있다. 시간을 중요시하고 날을 중요시하는 태도에서 성경의 차별성이 나타나고 있다. 성경이 사람들에게 날과 날짜의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 1장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성경 창세기 1장은 날들을 셈하는 것으로 채우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둘째 날이다, 셋째 날이다 하고 가르치고 있다. 날들의 차이를 바로 알고 날들의 선후를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의 기초나 되는 듯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날들의 셈 법”을 가르치고 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 모든 날이 다 같은 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비로소 형성되는 날이라 할지라도 어느 날은 첫째 날이 되고 어느 날은 둘째 날이 되고 어느 날은 안식일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날의 차이를 알고 앞 뒤 바르게 “날 계수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359.1)
 창세기 1장의 교훈은 우리도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분노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두려워하지 못하는 까닭이(시 90:11) 모두 우리가 날짜를 제대로 셈하지 못하고 날들의 차이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고 우리의 날들을 제대로 계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지혜의 출발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었다면 성경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자기를 아는 지식은 곧 자기의 나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계수하는 지식이었다는 것이다. 델포이의 신이 소크라테스에게 “네 자신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몇 살이냐”라고 묻고 있다. 나이 값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야말로 사람이 “지혜의 마음을 얻는” 출발이라는 것이다. (359.2)
 보통 날과 특별한 날을 구별하는 인식의 신앙 윤리
 창세기의 날들은 모두 똑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보통 날이다(창 1:5). 그러나 이 날들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모두 똑같은 날이 된 것은 아니다. 이 날들은 모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평등한 날이면서도 앞서고 뒤서는 선후의 차이로 다른 날들이 되었다. 이 날들은 첫째 날과 둘째 날로 다르고 셋째 날과 넷째 날로 달랐다. 뿐만 아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다섯 날들은 선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똑같이 “좋은” 날이고 “선한” 날이지만(창 1:4, 10, 12, 18, 21, 25) 사람이 창조된 여섯째 날은 다섯 날과 똑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공통성을 갖고 있고 그 날들과 다른 그밖의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날에 사람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심히 좋은” 날이 되었다. “심히 선한” 날이 되었다(창 1:31). 날들은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보다도 그 날에 일어난 사건 곧 그 역사성에 의하여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3월 1일이 3월 2일과 다르고 8월 15일이 8월 14일과 다르게 되는 이치와 똑같다. (359.3)
 그런데 일곱째 날, 곧 제7일은 다른 날들과 똑같이 저녁과 아침으로 하루가 된 날이었지만 좋은 날들과 다른 날이되었고 심히 좋은 날과도 다른 “거룩한” 날이 되었다. “복 있는”날이 되었다(창 2:3). 앞서의 여섯 날과는 너무나 다른 날이 된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보통 날과 같은 차원의 날이 아니다. 다른 여섯 날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게 나는 큰 날이다. 그 날의 차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차이도 아니고 한 날에는 동물이 창조되고 다른 한 날에는 사람이 창조되는 식의 차이도 아니었다. 수평적 차이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차이였다. 안식일의 계명은 우리에게 이러한 차이를 명심하라는 교훈이다. (360.1)
 그래서 창세기 기자는 제칠일 안식일의 차별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앞의 여섯 날에 대하여 사용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제칠일을 묘사하지 않았다. 앞의 여섯 날에 대하여 사용했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란 표현을 제칠일에 대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표현은 보통날들에나 사용하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왕위를 계승하는 왕자에게 보통 소년의 옷을 입히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날에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제7일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날이 아니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제칠일의 정신적 특성이 앞서의 6일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고 그 차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6일들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제7일은 물리적으로도 6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날인 듯이 말하고 싶다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었다. 마치 안식일은 저녁이 없는 날 같은 날이고 일하는 아침이 없이 휴식만 있는 저녁의 날 같은 날이라는 것이다. (360.2)
 이처럼 성경의 사람들에게 모든 날들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되는 날이라고 해서 다 같은 날이 아니다. 앞에 오는 날이 있고 뒤따르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질서 속의 날들이라는 것이다. 모래 같이 흩어진 현상으로서의 날들이 아니라 상호 관련 속의 실재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날들은 외견상으로는 똑같으면서도 그 역사적 성격 때문에 “좋은” 날들과 “심히 좋은” 날로 구별되기도 하고. “거룩하고 복 받은” 날로 구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하는 날과 쉬는 날로 구별된다. 보통 날들과 특별한 날로 구별된다. (360.3)
 안식일 계명은 명령하기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 10)고 했다. 6일은 일하는 보통 날이고 제7일은 일하지 않는 특별한 날이다. 일하지 않고 쉬는 복되고 거룩한 날이다. (360.4)
 이처럼 성경은 전체적으로 인간에게 시간과 날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의미심장한 삶의 토대이고 대상인지를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차별적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보통 날인가 특별한 날인가를 식별하고 있는가 또는 식별하고 있지 못하는가에 따라 삶의 모양과 성격과 운명이 달라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361.1)
 차별의 윤리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보통성과 특별성의 문제는 시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만물은 어느 면에서는 다 같다. 사람과 모든 것들의 사이를 규정하는 하나의 윤리는 보통성이다. 평등성이다. 보편성이다. 그래서 평등 사상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평등 사상에서 보면 차별은 잘못이다. 그러나 세상의 만물은 어떤 면에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공간과 사물들도 근본적으로 대등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각 사람에게 특별한 공간과 사물이 있다. 사람도 기본적으로 평등하지만 동시에 평등하지 않다. 사람에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평등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되고 잘못이 되는 관계가 있다. 자기 부모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접하면 불효가 되며 부부 사이가 남들과의 관계와 다름이 없다면 잘못된 관계이다. 그래서 사람과 만물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원리는 특별성이다. 차별성이다. 특수성이다. 개체성이다. (361.2)
 이리하여 사람에게는 보통의 시간과 보통의 사물과 보통의 관계가 필요한 것처럼,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물, 특별한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사람, 특별한 공간, 특별한 사물, 특별한 관계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은 중요한 결핍이 될 수 있고 그 때문에 그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그 때문에 그는 불행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에게는 부모가 있느냐. 남편과 아내가 있느냐, 자식이 있느냐, 형제가 있느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당신은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느냐. 특별한 삶을 누리고 있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있느냐, 스승이 있느냐, 가치관이 있느냐, 하는 질문은 당신에게 정신적 차원의 삶이 있느냐 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361.3)
 그리고 우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날들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다. 그대에게는 성일이 있는 가, 그대에게는 휴일이 있는가. 그대에게는 축제일이 있는가. 그대에게 특별한 날이 있는 가. 만약에 우리가 그런 질문을 받고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상실감과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내게 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특별한 날이 없는 빈곤감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 없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이나 사물의 없음보다 더 큰 결핍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일의 결핍은 성소의 결핍보다 더 중요한 뜻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등 예배할 곳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요 4:21-24). (361.4)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