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1장—교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하나님은 초청해서 모셔 들여야 할 분이다. 그 식사는 우리 중에서 먼저 나누어야 한다. 빌라델비아의 상황과는 달리 그 문은 우리만 열 수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겠다고 말씀한다. 변화와 회개를 바라는 오랜 간청 끝에(15~19절), 그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요청이다. 그것이 더욱 애처로운 것은 라오디게아가 그 변화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의로운 백성”이라는 그 이름에 이미 나타나 있고, 그 편지도 분명하게 언급하듯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 한 것이 없다’ 하나”(17절). (63.3)
 이것이 정확히 말해서 바로 그 부(富)와 잘 다듬어진 은행 조직으로 알려진 고대 도시 라오디게아의 태도이다.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기원전 106~43)는 소아시아를 여행할 때 항상 거기 들러서 그의 신용장들을 갱신하였다. 라오디게아 백성은 기원전 2세기 이래로 그 지역신(神)의 모습이 새겨진 그들 자신의 화폐를 발행하였다. 완전 자급자족을 이룬 라오디게아에는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원후 61년의 지진으로 그 도시가 황폐하게 되었을 때 라오디게아 도성이 로마 정부로부터 아무 원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재건한 것에 대하여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기원후 55~120)는 놀랐다.60

  (64.1)
 라오디게아가 그토록 부유하였던 것은 그곳의 비옥한 농장과 초장(草場)들 덕택이기도 하였다. 거기서 풀을 뜯어먹는 양들의 까만색 양털로써 그 도시는 또한 명성을 날렸다.61 그곳은 번창하는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다. 그 도시는 거기서 나는 안약(眼藥) 수출로도 이름나 있었다. (65.1)
 그러나 예언의 편지는 그 도시의 모든 부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 편지는 그 교회에게 “불로 연단한”(18절) 금을 사라고 권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 교회의 옷장을 조롱하며, 옷을 사서 입으라고 권고한다. 자기만족으로 눈이 먼 그 교회는 자기가 벌거벗은 것도 보지 못한다. 라오디게아의 속물들은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 차려입었다는 망상으로 가득 차서 거들먹거리고 다니지만 사실은 벌거벗었고 가련한 신세이다. 이제 편지는 그들에게 안약을 사서 발라 자신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라고 촉구한다. (65.2)
 하나님은 금과 옷감과 안약과 모든 재산으로 부유한 라오디게아에 결핍된 것이 있음을 보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부가 잘못된 근원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내게서”(18절), 즉 예수에게서 사야 한다. 이 마지막 때 신자들의 부는 쓰레기와 같은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은 더욱 비극적이다. 그들의 심리는 하나님을 배제한 채 세속주의와 인본주의를 자랑하는 그 문명의 증상일 뿐이다. 그들의 부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까지도 이성의 행위에 의하여 축적된다. 종교적인 이슈에서는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이 배제되었다. 이적은 고대의 신화나 믿음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건설한 것이 되었다. 제도적인 교회 또는 국가가 하나님의 도성을 대체하였다. 정치가 종교를 대신하고 이성이 계시의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방면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에게까 지 스며들었다. 그들이 달성한 진리의 확실성과 도덕과 영성의 높은 수준은 그들을 자기 만족 감과 자만심에 빠지게 만들뿐이다. 선교사역, 행정, 교회의 사업들의 성공적인 결과와 같은 물질적 부유함이 실제 상황의 비참함을 감추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감지했을 때에도 열성이 따라주지 않는다. 무관심에 무지가 동반된다. 그들의 문제를 진단한 후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 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16절). 그 고대 도시의 근처에는 광천수가 나는 샘이 있었다. 유황이 섞인 미지근한 물보다 더 구역질나는 것은 없으며, 그것은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하였다. (65.3)
 우리 모두가 그러한 특성에 들어맞기 때문에 특별히 어느 이름을 거명할 필요도 없다.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는 또한 “백성을 심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지의 저자는 그 해결책이 인간의 수단 밖에 있다고 한다. 새로운 세미나를 개최하고, 위원회를 조직하거나, 권력이나 자금으로 수단을 부리는 것에 의지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66.1)
 해답은 다른 곳에 있으며, 역할을 서로 바꾸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가난한 자가 부자의 역할을 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백성은 부자로 통한다. 하나님은 거지의 누더기를 취함으로 대답하신다. 해결책은 문 뒤에 있는데, 그 문은 솔로몬의 아가 에서처럼 안쪽에서만 열 수 있다(아 5:5). 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 “이기는 자”는 사데에서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예 하나님과 함께 다스릴 특권과 권세를 얻 는다.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계 3:21). (66.2)
 마음의 문을 여는 자들은 하늘의 문을 통과할 것이며, 새로운 통치와 또 다른 주권에 참여 할 것이고, 아무도 감당 못할 일들의 새로운 기쁨을 누릴 것이다. (66.3)
 흥미롭게도, 바로 다음 장은 문으로 시작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계 4:11)고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 준다. 계시록은 두 문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는 마치 솔로몬의 아가에서 연인이 두드리듯이 그 아래서 하나님이 열렬히 두드리시는 문이다. “나의 사랑 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 문 열어 다고”(아 5:2). 이 문맥에서 그 문 두드림은 극히 거칠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 동사 다파크(defaq)는 세게 두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그 동일한 단어를 목자가 그의 양을 서둘러 몰아가는 것을 묘사할 때 쓴다.62 이 문맥에서는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분의 열렬함은 그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심각한지 보여 준다.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신앙은 매일의 실존적 현실과 씨름하는 것이며, 우리의 고투와 선택에 관계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하나님의 간청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66.4)
 다른 문은 하늘로 열린다. 오직 하나님만 그 문을 닫을 수 있다. 그 문은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그분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신앙은 단순히 윤리적·정서적 의미를 가진 실존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과 현재에 관계된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중에 만 있는 것도 아니다(참조 눅 17:20, 21). 계시록은 오직 하나님만이 여실 수 있는 하늘에 있는 또 다른 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계시록은 동일한 문의 이미지를 통하여 개인적인 영역과 우주적인 영역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아래에 있는 우리가 문을 열 때 시작된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계 3:20)으리라. 그 잔치는 우리의 실존 속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내려오셔서 우리의 상에서 잡수신다. (67.1)
 그러나 그분의 임재 앞에 우리에게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우리가 그분과 나누는 친교는 더 깊은 친밀함을 바라는 욕구를 창조한다. 그 음식은 우리 식사의 주(主) 요리에 대한 애피타이저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더욱 갈망하게 되고, 이 식사에 빠진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수록 하늘 위에서 열릴 큰 잔치를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문을 더 열수록,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다른 문을 더 많이 열어 주시기를 열망하게 된다. (67.2)
 주(註)
 1) 요한계시록에서 5장 6절만이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그 어린양의 죽음이 5장에 나오는 보좌의 장면에 앞선다.

 2) 성경과 유대 전통에서 뼈는 부활을 암시한다(겔 37:1~14; 왕하 13:21을 보라, 참조 욥 10:11; 시 34:20; 사 66:14; 창 50:25). 위경 희년서(기원전 2세기)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하는 금령(禁令)이 부활의 기적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뼈가 부활을 위하여 온전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Jubilees 49:13)고 말한다.

 3) Didache 10. 6; 참조 16:22.

 4) Babylonian Talmud, Shabbath 53b.

 5) 단 2:28을 보라; 참조 2:37, 44, 45; Doukhan, Secrets of Daniel, p. 27.

 6) 창 1; 출 34:18; 레 23:36; 민 28:11, 19, 27 등을 보라.

 7) 4 Ezra (2 Esdras) 13:1; Ecclesiasticus (or Sirach) 7:3; 20:12; 22:12 등을 보라.

 8) 골 1:2; 4:13.

 9) Canon Muratorianus: The Earliest Catalogue of the Books of the New Testament, ed. Samuel Prideaux Tregelles (Oxford 1867), pp. 19, 45.

 10) 계 2:7, 11, 17, 29; 3:6, 13, 22.

 11) 미 1:10~16.

 12) 단 11을 보라; 참조 Doukhan, Secrets of Daniel, pp. 171~174.

 13) W.M. Ramsay, The Letters of the Seven Churches, updated ed., Mark W. Wilson (Peabody, Mass.: 1994), pp. 131~133을 보라.

 14) 단 2:37, 38; 참조 창 1:28, Doukhan, Secrets of Daniel, p.30.

 15) 벧전 5:8; 참조 70인역 욥 1:7.

 16) Hippolytus (died about 226 C.E.) 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 7. 24 (Ante-Nicene Fathers, vol. 5, p. 115); Epiphanius (died in 403 C.E.) Adversus Haereses 1. 2. 25 (Patrologicae Graecae, vol. 41, cols. 319~330). 또한 D. M. Beck, “Nicolaitans,”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1962), vol 3, pp. 547, 548을 보라.

 17) 기독교 영지주의에 대한 초기 견해에 대해서는 R. M. Grant, “Gnosticism,”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1962), vol. 2, p. 404을 보라. 18) 창 1:29을 보라. 참조 단 1:16; Doukhan, Secrets of Daniel, pp. 19,20

 20) Babylonian Talmud, Ketubot 111b; cf. Zohar 2. 151a~151b를 보라.

 21) 행 7~9장을 보라.

 22) Donald Kagan, Steven Ozment, and Frank M. Turner, The Western Heritage, 3rd ed. (New | York: 1987), pp. 191, 192.

 23) Doukhan, Secrets of Daniel, pp. 108, 109, 143~145을 보라.

 24) Aboth 5. 1~9.

 25) Franz Cumont, Etudes syriennes (Paris: 1917), pp. 63ff.

 26) 계 20:6, 14; 21:8.

 27) Targum of Jeremiah 51:39, 57; cf. Targm of Deuteronomy 33:6 and of Isaiah 22:14; 65:6, etc.

 28) 다니엘 12장 2절에서 다니엘은 아마도 두 종류의 사망과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29) 민 25:1~5.

 30) Samuele Bacchiocchi, From Sabbath to Sunday: A Historical Investigation of the Rise of Sunday Obervance in Early Christianity (Berrien Springs, Mich.: 1977), and Kenneth A. Strand, “The Sabbath and Sunday From the Second Through the Fifth Centuries,” in The Sabbath in Scripture and History, ed. Kenneth A. Strand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 Pub. Ass., 1982), pp. 323~332을 보라.

 31) Doukhan, Secrets of Daniel, pp. 34, 35.

 32) Ibid., pp. 106~111.

 33) 출 16:15; 시 78:25.

 34) 출 16:33, 34; 히 9:4.

 35) Mekhilta 16. 25; cf. 2 Baruch 29:8; Babylonian Talmud, Hagigah 12b.

 36) 창 17:5

 37) 창 32:28.

 38) 렘 33:16.

 39) 출 3:13~15을 보라, 참조 창 32~29, 30; 아 13:17, 18, 이는 결국 하나님의 성호를 발음하 지 못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다(see Babylonian Talmud, Kiddushin 71a; Mishnah, Sanhedrin 10.1).

 40) Babylonian Talmud, Baba Bathra 75b.

 41) Midrash on the Psalms, Psalm 21, section 2.

 42)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7. 13. 2을 보라.

 43) 왕하 8:18, 26, 27, 10, 11.

 44) 1 Maccabees 8:14; Homer The Illiad 4. 141~145.

 45) 출 25:4; 28:5, 6; 39:29, Josephus Wars of the Jews 5. 5.4.

 46) 행 16: 14. 15, 40

 47) Doukhan, Secrets of Daniel, p. 109을 보라.

 48) Babylonian Talmud, Sukkah 52a.

 49) Pesiqta Zutarta, Num. 24:17.

 50) Babylonian Talmud, Baba Bathra 75b.

 51) A History of the People of the U.S. From the Revolution to the Civil War (New York: 1920), vol. 7, p. 136.

 52) See especially Menahem Mendel, Zemah Zedek (1870~1874)

 53) See Mirza Husain Hamadani, The Táríkh-i-jadid, or New History of Mírzá 'Alí Muhammad, the Báb, trans. and ed. Edward G. Browne (Cambridge: reprint 1975), p. xxxv.

 54) NIV는 “God of truth”(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한다. 아멘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뜻의 에매트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55) 요 1:1도 보라.

 56) 창 14:18~20, 31:54; 신 12:5~7, 17, 18, ; 14:23, 26, 15:20; 출 18:12; 24:11; 삼상 9:11~14; 잠 9:1~5.

 57) 마 5:6; 9:11; 22:1~14; 막 6:35~44; 눅 13:29을 보라.

 58) 막 14:25; 고전 11:26.

 59) 계 2:7; 3:20; 19:7, 9:22;

 60) The Annals 12. 27.

 61) Strabo The Geography of Strabo 12. 8. 16.

 62) 창 33:13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