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1장—교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사데 교회는 그리스도교가 그 근원으로 돌이킴을 묘사한다. 개혁교회의 사람들은 성경의 원래 기별을 재발견한다. 진리 탐구의 불이 다시 붙고 마음은 열린다. 종교개혁 운동은 사제(司祭)와 전통의 장벽을 제거하고 성경 문서들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확립하였다. 학자들은 성경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된 원어로 읽는 것을 장려하였고, 최초의 히브리어 문법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57.2)
 그러나 변화의 역동성은 신속하게 교조(敎條)로서 굳어졌다. 교회는 새로운 전통과 신경(信 經)을 들여왔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보다 정확한 교리에 대한 관심이 우세하였다. 교회의 생활에 불관용이 다시 기어들어 왔다. 개신교회에는 그들 나름의 종교재판이 있었다. 칼뱅은 미카에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년)같은 학자들을 화형대에 처형하였고, 루터는 가톨릭교도들과 유대인들에 대하여 분노하였으며 자신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근절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더 많은 범죄들을 저질렀고, 유럽에서 종교전쟁의 희생자는 개신교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개신교회와 가톨릭 양측의 교회는 서로 강력한 교권을 확립하였다. 진리의 근원을 망각한 채, 개신교회는 그들이 중세시 대에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실수에 빠져들었다. (57.3)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반복된다. 계속하여 경계심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다. 그 도시의 경계병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룩한 편지는 “일깨라!”고 촉구한다.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 3:2).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라”(3절). (58.1)
 사데에 보내는 편지에는 “일깨라!” “굳게 하라” “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 등의 명령들 이 시종 천둥처럼 울리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옛날 사데의 거민들처럼 부와 안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58.2)
 편지의 저자는 “그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사데에 그들의 시작에 충실한 “몇 명이”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4절)하였다. 성경에는 “남은 자”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다. 아담의 셋째 아들 셋으로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있던 성전 건축자들까지, 아브라함, 이상 야곱으로부터 엘리야의 제자들까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맺은 언약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이렇게 고귀한 소수, 살아 남은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58.3)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와 동일한 남은 자손의 약속을 해주셨는데, 그는 자신의 아들 스알 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의 이름을 통하여 그의 잠들어 있는 백성에게 주는 징조로서 선포하였다(사 7:3). 요한 역시 스테리손!”(sterison, 잠을 깨라!)과 동일한 두음(音)을 가진 사데라는 이름으로 언어유희를 만들어 그의 예언적 기별을 전달한다. 사데라는 이름 안에서 우리는 죽음의 혼수상태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을 깨우는 강력한 스테리손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다. (58.4)
 빌라델비아
 사데로부터 60킬로미터 동쪽에 지진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과거의 상처를 입은 빌라델비아가 자리잡고 있다. 주위의 그 넓은 화산 분출 평원은 카타카우메나(Katakaumena, 불탄 땅)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하고 싶었던 버가모의 식민주의자들이 아탈루스 2세(기원전 159~138) 때에 그 도시를 설립하였다. 빌라델비아(“형제 사랑”)의 도시명은 그 왕이 그의 동생 유메네스 2세를 위하는 큰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 도시에는 다른 이름도 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을 원조해 준 티베리우스(기원후 14~37년의 로마 황제)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新) 가이사랴(가이사의 신도시)라는 이름을 택하기도 했으며, 그 후에는 또(플 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기원후 69~79년 통치)에게 사례하기 위하여 플라비아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그 도시의 괴로운 과거를 반영한다. 예언은 다시 상세한 역사적인 사실을 그 기별의 예증으로 이용한다. 빌라델비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예언적인 빌라델비아 교회도 식민주의자들이 설립하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유럽의 영역을 넘어 아프리카와 남북 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해가는 선교 시대(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의 교회였다. 초창기의 정신과 열성과 열심의 회복이 그 시대의 기독교 정신이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

  (58.5)
 빌라델비아의 택함 받는 사람들은 사데의 남은 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행한다. 그들도 말씀을 간직한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더 좋은 조건에 있다. 사데 교회에는 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그 편지는 말씀의 남은 것을 “굳게 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빌라델비아에 보내는 편지는 말씀을 “지킨” 사람들의 인내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빌라델비아의 상황은 사데의 상황을 넘어서 진보하였다. 사데의 신자들이 꿈꿀 수만 있었던 것이 이제 빌라델비아에서는 현실이 된다. 사데에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도적 같을 수도 있었다. 열망하기는커녕 기다리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의 도래는 도적 같은 것이다. 그러나 빌라델비아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부정적인 어조가 없고, 그 표현을 보면 신자들이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 다. 그 편지는 “내가 속히 임하리니”(11절)라고 말한다. (59.1)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부흥의 시대이다. 심지어 교회의 원수들까지도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인식한다. “[내가 그들을]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절: 참조 시 23:5). 우리는 그 언약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상호 관계가 있는 것이 두 절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본다. “네가 지켰”다는 말과 “내가 또한 너를 지키”(계 3:10)리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선지자들은 이미 이러한 관계를 선언하였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7:23). 아가에서는 그것이 사랑의 언어로 표현된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 참조 아 6:3; 7:10, 11). 이러한 독점적인 관계는 그 교회의 빌라델비아, “형제 사랑” 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울려난다. (60.1)
 여기서 다시 계시록은 종말론적인 희망을 확인한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계 3:11), “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은 사데 교회에 주는 약속을 능가한다. 이제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래로써 시작되는 새 나라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약속이다. “[내가 그를]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12절). 그 “기둥”이라는 말에 이미 지속적인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유대 세계에서는 한 사람을 죽은 후에까지 기억하고, 그리하여 그 개인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불멸하도록 돕는 기념물로서 기둥을 세우는 것이 관습이었다. 예컨대 그러한 기둥들이 고라신이나 케파르 나훔(가버나움)의 고대 회당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둥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성전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훨씬 더 발전된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될 것인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레코 로망의 도 시처럼 빌라델비아는 그들에게 혜택을 베푼 분,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린다. 어쨌든 이 보상은 그 의인들의 신원과 운명에 깊은 영향을 미쳐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 의인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그분의 성전과 맺은 관계로써 확인되는 사람이 되었다. “찬송을 받으실 거룩하신 분의 이름으로 불리는 셋이 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으니, 의로운 자, 그리스도 그리고 예루살렘이다.”50 (60.2)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특징을 삼고 있다. 이 기간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종말적인 소망에 열중했던 때일 것이다. 그러한 소망이 미합중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를 사로잡았다. 당대의 역사가인 존 B. 맥마스터(John B. McMaster)는 미국 전체 인구 천 7백만 중에서 거의 백만 명이 이 운동에 참여 하였다고 기록한다.51 그들은 성경 예언의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는 더욱 열렬하였다. 종교 지도자들은 심지어 예언을 계산하여 1844년이라는 특정한 연대를 정하기까지 하였다. (61.1)
 흥미롭게도 동일한 열병이 유대인과 무슬림들까지도 사로잡았다. 유대교에서는 하시딤 운동을 통한 유럽 유대인들의 부활에 5603년(1843/1844년)에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었다.52 바하이 교도들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헤지라6) 1260년, 다시 말해서 1843/1844에 (bab, 문, 감추어진 이만[liman]으로 통한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53 그리고 세속 세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의 진보에 대한 희망과 낙관주의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선전하였다.

6) 회교의 기원(역자 주).
(61.2)
 우리는 그 편지의 약속이 의미심장함을 더 잘 이해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8). “열린 문”의 이미지는 다음 장에서 또 등장한다(계 4:1) 빌라델비아 교회의 시대는 하늘과 땅을 향하여 열린 문에서 묘사되듯이 소망과 기대의 시대, 즉 위로부터 오는 구원을 위하여 준비하는 때이다. (61.3)
 라오디게아
 빌라델비아를 지나서 예언자의 시선은 남쪽으로 약 68킬로미터 이동하여 라오디게아로 향 한다. 그곳은 종착지, 마지막 때, 즉 우리의 시대이다. 마지막을 상징하는 일곱째 편지라는 사실에서 이미 그러한 개념을 의식할 수 있다. 결말이라는 개념이 그 기별에 퍼져 있다. 이미 그 발신자는 자신을 “아멘”이라고 소개한다(계 3:14). 여기서 우리는 모든 약속들의 성취를 뜻하는 모든 기도의 마지막 말을 본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주 여호와를 “아멘의 하나님”(사 65:16, “진리의 하나님”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두 본문 모두 아멘 뒤에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따라온다. (62.1)
 이사야서에서 아멘의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17절)라고 다짐한다.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멘의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7)이라고 소개한다(계 3:14). “시작”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아르케(archē)는 창세기 1장 1절의 히브리어 브레시트(bereshit, 태초에)를 번역하는 데 쓰는 말이다.55 마지막의 하나님은 또한 시작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최후까지 존재하고 계신다.

7) 개역한글판에는 “근본”으로 번역됨(역자 주).
(62.2)
 지금과 같은 말세에 하나님의 강림이 이렇게 가까웠던 적은 없다. 아가(雅歌)에서도 그의 연인이 문 앞에 있는 것을 묘사한 것처럼(아 2:8, 9; 5:5), 이 편지는 그분이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고 묘사한다(계 3:20). 예수께서 문 앞에와 계시며, 신약에서 그 말은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뜻이다(마 24:33: 막 13:29). 그 다음에 나오는 친밀한 식사에 대한 언급도 동일한 의미를 띠고 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62.3)
 그 식사는 마지막 재결합에 대한 열망을 오랫동안 상징해 왔다. 레위기의 절기에 들어 있는 모든 거룩한 식사에는 간절한 기다림의 개념이 들어 있다.56 그것은 시편 23편에도 나타나는 데, 거기서 잔칫상은 죽음의 지점에서까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남아 있는 사람에게 명예를 돌린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식사에도 동일한 의미가 들어 있다.57 그들이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 세데르(seder)를 먹을 때도 그들은 하늘에서 마침내 다시 만날 소망 가운데 먹었으며,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표현하게 되었다.58 (63.1)
 마지막 재연합의 잔치는 계시록의 중요 주제들 중 하나이다.59 성경의 소망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촉각, 후각, 시각 그리고 미각은 각기 이 소망을 향유하는 데 한몫 한다. 손님의 존재는 그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전통적인 표현인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말은 나아가 그 관계의 친밀성과 상호성을 나타낸다. 중동에서 사람들은 관습적으 로 바닥에 함께 앉아 같은 그릇에다가 음식에 담아 서로의 음식에 손을 대고 나누어서 손으로 먹는다. 실제로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 식사는 참으로 친교의 행위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재연합이 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경험하는 실제적인 사건이 되도록 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본 구절에서 그것을 바라는 쪽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문을 두드리고 간청하는 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20절). (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