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11장 하나님, 그리고 인간의 적개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제6차 십자군은 유별난 것이었다. 아랍어를 포함한 수 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프레드릭 2세(Frederick)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협상에 의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나사렛을 얻어낸 것이다. (285.2)
 그러나, 십자군 원정은 여러 차례의 원정들을 균일하게 보았을 때 성공적인 원정이 아니었다. 그 중 어떤 원정은, 특히 소년 십자군은 끔찍한 재난이었다. 제 7차 십자군도 역시 “이 번이 그 전만 못했다”(29절). 중동으로 진출한 것으로는 마지막 십자군이 되는 이 원정에서 경건한 왕 루이 9세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포로 신세가 되었다. 10 년 후에는 오히려 이집트의 술탄과 그의 장군 바이반스(Baibans)가 그리스도인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상태가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285.3)
 십자군 전쟁 기간에 모슬렘들은 희랍의 군함들을 빌어 썼다. 그래서, 30절“깃딤의 배들”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깃딤의”란 말은 “서방의”란 뜻이다). 비록 로마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끝내지 못했지만, 이로 인해 유럽과 동방 세계 간의 무역이 크게 촉진되었다. (285.4)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제노바의 상인들이 특히 이득을 올렸다(28절). 유럽 인들은 설탕, 면사, 유리 거울, 삼베 등 여러 가지 동방 상품들을 즐기게 되었다. (286.1)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나 형통치 못하”“두 왕”(27절)은 십자군 경험을 두드러지게 특징짓고 있는 불성실과 위선을 압축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교전 쌍방 동맹자들의, 특히 기독교측의 상호 불신의 태도에 주목하고 있다. 더 좁혀 이야기한다면, 이 “두 왕”은 도량이 넓었던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Saladin)과 체결한 엄숙한 평화 협정을 열심히 파괴했던 샤틸롱의 레지날드(Reginald of Chatillon)와 기 드 뤼지농(Guy de Lusignon) 같은 기독교측 지도자들을 대표한다.13 그리고, 또 기회만 있으면 협약을 파괴한 기독교, 모슬렘 양측의 여러 지도자들이나, 또 모슬렘 촌락의 주민들이 항복하기만 하면 생명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해 놓고 약속을 어겨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 병사들을 대표하고 있다.14 십자군들은 모슬렘 들이 배 속에 삼켜 넣었을지도 모를 금(金)을 찾아내기 위해 때로는 모슬렘 들의 배(腹)를 쪼개었다. (286.2)
 비참하게도, 교황권은 십자군 전쟁과 십자군 전쟁이 저지른 소름 끼치는 잔학 행위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교황 우르반 2세가 제1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그 같은 야만적인 결과를 충분히 예상치 못했다고 하여 부분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일이 발생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열성적으로 후기 십자군들을 독려한 교황들 즉 유게네 3세(Eugene III),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M), 클레멘트 3세(Clement III), 인노센트 3세(Innocent III),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X)에 대해서는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실로, 교황권은 중동 지역에 출정한 십자군 들의 정신으로 담이 커진 나머지 이른바 기독교 “이단”을 박멸하는 끔찍한 유럽 십자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단들”의 대부분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지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28, 30절). 로마 교회가 일찌기 우리의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의 하늘 성소의 타밋 제사를 퇴색케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일이 저질러진 기간은 십자군 시대였다. (286.3)
 이러한 역사를 모르고 있지 않는 모슬렘 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286.4)
 또, 다니엘에서 중세 기독교가 이처럼 나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86.5)
 이와 같은 배경을 고려한다면,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30절)을 안티오쿠스가 얼마 동안 고대 예루살렘의 한 돌제단 위에 설치했던 금속 우상에게 한정하기는 분명히 어렵다. 그보다는 1천여 년 이상이나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사장 봉사로부터 돌이키게 하여 그들로부터 22절에 언급되고 있는 “동맹한 왕(언약의 왕)”에게 나아가는 길을 박탈한, 신앙과 실천의 거대한 체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쓰러진 “지혜로운 자들”(33절)은 자신들의 산 믿음을 포기하느니보다 차라리 목매임과 익사와 화형과 고문과 투옥을 선택했던 왈덴스 교도, 롤라드 교도(Lollards), 후쓰 교도(Hussites), 루터 교도, 재세례파 교도(Anabaptists), 유그도 교도(Huguenots)들 같은 용감 무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무리들 중에는 개신교도들이 중세의 압제적 정신에 휩싸여 박해를 자행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굳게 붙들었던 경건한 로마 카톨릭 신도들이 포함된다. (286.6)
 “스스로 높여 모든 신(神)보다 크다 하는”(36절) 왕은 중세의 교황권이었다. 이전에 그 어떤 교황이 이러한 일을 시도했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교황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 하지 않았다. (286.7)
 그러나, 교황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살해하고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변경할 권한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더 높인 것이 아닌가? (287.1)
 중세 교황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했을 때,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자르 2세의 이름을 좇아 율리우스 2세라 이름한 교황이 자신의 군대를 끌고 출전했을 때, 이들이 “세력의 신”(神)(38절)을 신봉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금은 보석으로 장식해 공경된 새로운 신(神)(38절)은 동정녀 마리아가 아니고 누군가? 동정녀 마리아는 그의 순결과 모성애 때문에 가톨릭 예배에서는 그의 신성한 아들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는가? (287.2)
 “동맹한 왕(언약의 왕)”이 저 한미한 오니아스 3세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 그리스도의 시대에 있어서도 아직 미래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니엘 11장의 기별도 궁극적으로는 7장8장의 기별과 동일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 11장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세속 제국들에서 정치—종교적 실체가 일어나

 (1) 가짜의 그리스도 봉사로 참된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를 대체시키고

 (2) 진정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백성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287.3)
 오늘날 여러 기독교 종파들에서 그리스도의 하늘 봉사를 퇴색케 하고, 이미 개정 중에 있는 특별 심판을 묵살하고 사람들에게 전체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는 중세 기독교의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는 한,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은 아직도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11장의 경고는 하나님께서 현재도 우리를 염려하셔서 위험을 경계시키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계시다는 현행적 증거이다. (287.4)
 아직까지는 40~45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 마지막 구절들은 분명히 로마 교회의 지나온 이력 및 그 종말과 부분적으로 유사하다. (287.5)
 다니엘 8장의 기별 중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취급할 때 보았듯이, 로마 기독교의 최대 결함은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 7장에서 로마 기독교는 매우 매력 없이 생긴 상징적인 짐승의 머리에 솟아 있는 작은 뿔로 상징되었다. 다니엘 7장 11절26절에서는 재림 전의 심판과 관련하여 이 짐승의 못된 행위를 처벌할 목적으로 이 짐승이 특별히 거론되고 있다.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 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 바” 되도록 일정이 갖추어져 있다. “심판이 시작 된즉 그(짐승)는 권세를 때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287.6)
 다니엘 11장 45절에서는 말세의 “북방 왕”“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풀 것이나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하였다. “영화롭고 거룩 한 산”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은유로 보이며,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의 성소를 상징한다. 지중해와 예루살렘 성전 사이에 “장막 궁전”을 베푼다 한 것은 그리스도의 성소 봉사의 대권에 대한 “북방 왕”의 침해를 상징한다. 이런 침해의 결과로 북방 왕은 처벌될 것이다. 그 결과, 북방왕은 그와 필적하는 저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짐승과 마찬가지로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작은 뿔 권력과 북방 왕은 동일한 지상 권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287.7)
 이 문제 중 일부는 이 책의 자매편인 「요한계시록 연구」(God Cares II)에서 더 상세히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성취를 수반하여 지상에 일어날 정확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할 때까지는 알 수 없을지 모른다. (287.8)
 예언의 목적은 항상 특별한 미래 사건을 미리 알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예언들은 그 예언들이 성취된 이후에만 이해 되도록 그래서 믿음을 세우도록 의도된 것 들이다. (2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