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11장 하나님, 그리고 인간의 적개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동방에서 적수를 축출하는 데 신속히 성공한 셀류쿠스는 내쳐 소아시아 시리아로 밀고 들어가 리시마쿠스를 축출하여 “북방 왕”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에게 해(海)에서 인도에 이르는 알렉산더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유다까지 이집트로부터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려웠을 때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받은 도움 때문에 야심을 관철할 수가 없었다. (275.9)
6. 몇 해 후에 그들(안티오쿠스 1세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그러나 이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이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 때에 도와 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
(276.1)
 우리는 서론에서 이 구절을 읽었다. 이 사건의 세부적인 이야기가 3백 년 앞서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었던 것이다. 이 구절의 서두에 나오는 “그들”은 안티오쿠스 2세 데오스(Antiochus II Theos, 261~246)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Ptolemy II Philadelphus, 285~246)를 말하고 있다. (276.2)
  (276.3)
남방 왕들과 북방 왕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셀류쿠스 왕가
Ptolemy I Soter *323~282 Seleucus I Nicator 312~281
Ptolemy II Philadelphus 285~246 Antiochus I Soter 281-261


Antiochus II Theos 261~246
Ptolemy III Euergetes 246-221 Seleucus II Callinicos 246~225


Seleucus III Ceraunos 225~223
Ptolemy IV Epiphanes 221-203 Antiochus III the Great 223~187
Ptolemy V Epiphanes 203~181 Seleucus IV Philopater 187~175
Ptolemy VI Eupator 181 Antiochus IV Epiphanes 175~164
Ptolemy VII Philometer 181-145 Antiochus V Eupator 164~150
Etc., to B.C. 51
Etc., to B.C. 65
Cleopatra VI 51~30

* Ptolemy 1 Soter는 323~305년 기간은 태수(太守)의 직함에 있었으나 305년 이후 왕이 되었으며, 제위 연대는 323년으로 소급한다. 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연대표는 Edwyn Bevan의 「The House of Ptolemy」에서, 셀류 쿠스 왕조의 연대표는 Parker and Dubberstein의 「Babylonian Chronology」 제2판에서 취함. (277.1)
 안티오쿠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하기 위해 라오디케와 이혼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자 안티오쿠스는 라오디케를 다시 데려왔으나, 라오디케는 안티오쿠스와 베레니케와 그의 어린 아들과 측근들을 살해하였다. (277.2)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외국의 국왕과 새로운 선린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이 왕은 아내와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77.3)
7. 그러나 이 공주의 본족(族)에서 난 자 중에 하나(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의 위를 이어
북방 왕(안티오쿠스 2세)의 군대를 치러 와서
그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쳐서 이기고
(277.4)
 안티오쿠스 2세는 이혼과 재혼으로 말미암아 그가 얻으리라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실하였다. 이집트의 새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베레니케의 오라비로서 베레니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그는 군대를 끌고 바벨론과 여타 지역을 짓밟고 스스로 퇴군하였다. 그의 해군은 수도 안티오키아의 관문인 셀류키아 항을 점령하였으며, 한동안 이집트가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277.5)
8. 그(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 신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과
그 은과 금의 아름다운 기구를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 갈 것이요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
(277.6)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 원정에 승리하여 금은 우상 2,500 점을 노획하였는데, 그 중 상당수가 이집트의 신상들인데 이들은 과거 수세기에 걸쳐 대륙의 정복자들에 의해 탈취되어 갔던 것들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이 생명 없는 우상들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돌아갈 때 길가에서 이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필시 경멸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277.7)
 그러나, 이집트 인들은 그들의 국왕이 그들을 위해 이룩한 큰 성취에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왕을 그들의 “은인”(恩人)으로 찬양하였다. 희랍어로 은인을 “유에르게테스”라 한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 유에르게테스란 이름이 생겨났다. (278.1)
 프톨레마이오스 3세 유에르게테스(Ptolemy III Euergetes)는 많은 이득이 뒤따랐던 시리아 원정으로 크게 만족하고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시리아를 침공치 않았다. (278.2)
9. 북방 왕(셀류쿠스 2세)이
남방 왕의 나라로 쳐들어 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 가리라.
(278.3)
 프톨레마이오스 가(家)와 셀류쿠스 가(家)의 싸움은 미국의 민담(民譚)에 나오는 하트필드(Hatfield)가(家)와 멕코이(McCoys)가(家)의 불목과 유사했다. 1세기 이상이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거쳐 오르내리는 군대의 행렬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어느 쪽이 이기고 지는가에 따라 상전이 달라지고 자유와 세(稅) 부담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78.4)
 242년에 셀류쿠스 2세 칼리니쿠스(Seleucus II Callinicus)가 전날 이집트의 침공에 대한 보복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육군은 싸움에 패배되고 해군도 무너졌다. 그는 빈 손에 피투성이의 몸으로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278.5)
10. 그 아들들 [셀류쿠스 2세의 두 아들 즉 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된 셀류쿠스 3세(225~223)와
안티오쿠스 3세 대왕(223~187)]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의 넘침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11. 남방 왕(프톨레마이오스 4세)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 나
그 무리가 그(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손에 붙인 바 되리라.

12.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즉 군대를 패퇴시킨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 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
(278.6)
 이 세 구절은 일차적으로 기원전 217년 6월 22일의 라피아(Raphia)전투를 취급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든 전투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표명하는 증거로서 특별히 이 전투에 주의를 돌리기로 작정이나 하신 듯싶은 구절이다. (278.7)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께서는 전투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일까? (278.8)
 기원전 217년 라피아에서 대략 7만 명의 보병과 5천 명의 기병이 서로 대치하여 싸웠다. 다음날 병력을 점검한 결과, 안티오쿠스 3세는 1만 명의 전사자와 4천 명의 포로를 내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측의 손실은 이보다 좀 가벼웠으나 역시 심각하였다. 적개심이 넘쳐 흐르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는가? (2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