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맺는 말 제34장 엘렌화잇과 조사심판
 〈각시대의 대쟁투〉의 조사심판에 관한 장을 통하여 엘렌 화잇은 천사들이 재판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화잇은 그 장을 다니엘 7장 9, 10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 내용에는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 그녀는 같은 쪽의 둘째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짓는다. “심판을 주재하시는 분은 ∙∙∙ 하나님이시다. ‘천천만만’거룩한 천사들이 수종하는 자와 증인들로서 그 큰 법정에 열석하게 된다.”6) 다음은 조사심판에서의 천사들의 역할에 관한 화잇의 다른 진술들이다. (415.1)
 “그 때에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하늘 천사들의 시위 아래 지성소에 들어가∙∙∙ 조사심판을 하시고.”7) (415.2)
 “[예수님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상처 난 두 손을 쳐드신다.”8) (415.3)
 “죄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감추어졌을지 모르나 ∙∙∙ 하늘의 존재들 앞에는 다 드러난다.”9) (4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거룩한 존재들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그 기록에 대하여 염려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가.”10) (415.5)
 이 진술들은 엘렌 화잇이 천사들이 조사심판에서 역할을 맡았다고 이해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415.6)
 수동태.
 엘렌 화잇이 조사심판에 관하여 말한 장 전체를 통하여 결정이 내려지는 것에 관한 말들은 일관되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수동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고 있지만 누가 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공이 맞았다.”라고 한 진술은 온전한 문장이긴 하지만 “존에 의하여”라는 말에 가서야 비로소 누가 그 공을 쳤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심판에 관하여 서술하면서 엘렌 화잇은 “이름들이 가납되고 거절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수동태다. 엘렌 화잇은 누가 가납하였고 거절하였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또한 엘렌 화잇이 “심판에서 적합하다고 인정되었다”는 말을 하였을 때에 누가 그들을 적합하다고 여겼는지를 밝히지 않았다.11) 이 문제에 관하여 “누구누구가” 하였다는 말이 이 인용문 속에는 없다. 하나님이 바로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가정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진술은 그런 말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415.7)
 나는 다니엘 7장 21, 22절도 심판의 결정과 연결하여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심판이 주어졌다(KJV; 강조는 첨가된 것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성도들을 위하여 심판을 하였다고 가정하기 쉽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문장이 수동태이기 때문이다. (416.1)
 그와 유사하게 이름이 가납되고 거절된다는 엘렌 화잇의 진술 속에서 각 성도가 구원받기에 적합하다는 결정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으로 가정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에서 천사들이 심판에 참석한다는 엘렌 화잇의 거듭된 강조의 문맥 속에서 그 말들을 읽어야 한다. 나는 이름들을 가납하고 거절하는 것은 천사들이며, 성도들이 영생에 합당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천사들이라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재판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과정에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것이며, 엘렌 화잇의 진술들 중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느낌이 나는 부분들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416.2)
 물론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천사들이 이름을 받아들이고 거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리신 결정에 수긍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천사들이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 받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신다.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을 심판하는 데 있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결정이 의롭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 안에 그들의 믿음을 세운다. (416.3)
 심판에서 결정에 관한 수동태 문장 중 예외가 있다 조사심판에 관한 장의 거의 끝에서 엘렌 화잇을 진술하였다. “비록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사건을 조사하시기를 마치 세상에 그 한 사람밖에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세밀히 하실 것이다.”12) 이것은 능동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세밀히 조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심판에서 결정을 내리는 이는 그분이시라는 뜻이다. (417.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살다가 죽는 모든 시간 속에서 각 사람의 세밀한 부분을 살피신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나는 대답하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심판이 진행되는 지금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조사를 포함한다. 질문은 수 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구원에 합당한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삶을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는가이다. 나는 그분이 전지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엘렌 화잇의 이 진술로부터 하나님이 심판에서 결정을 내리신다고 결론짓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 진술이 나타나는 문단에서 엘렌 화잇은 각 신자가 심판을 생각하며 심각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많이 이야기 하였다. 나는 그것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라고 본다. 요점은 하나님이 실제로 삶을 살피시고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신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417.2)
 우리가 간단히 취급해야 하는 그와 관련된 이슈는〈각 시대의 대쟁투〉에 있는 엘렌 화잇의 진술이다. 심판 때에 “중보자 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를 얻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 간청하신다.”13)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죄가 용서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의 죄가 고백되면 바로 용서를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다(예, 요일 1:9). (417.3)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정로의 계단〉,〈실물교훈〉, 〈시대의 소망〉,〈가려뽑은 기별〉(1권, 350-400)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장들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녀가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면 바로 용서와 가납을 받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해주었다. 모든 저술가들은 때때로 자기가 믿는 것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할 수도 있으며, 또한 다른 곳에서 매우 분명히 진술할 수도 있다. 바울 자신도 가끔 이랬다(롬 3:202:13을 비교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우선적인 신조 시스템을 기초로 그의 글들을 이해하고 그러한 테두리 안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해석해야 하지 동떨어져 있고 모순되게 보이는 진술들을 저자의 신념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위에서 내가 인용한 진술들을 취하여 그녀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분명히 말한 것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왜곡한다면 우리는 엘렌 화잇을 잘못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정로의 계단〉, 41의 마지막 문단과〈가려뽑은 기별〉, 1:382, 392 참조. (417.4)
 용서에 대한 엘렌 화잇의 진술이 있는〈각 시대의 대쟁투〉의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 법정의 공판에 대하여 사람들이 나타내는 가장 깊은 관심도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이 온 세상의 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서 심사되는 하늘 법정에서 기울이는 관심에 비하면 다만 희미한 것에 불과하다.”14) 이 후에 예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진술이 따라 나온다 그러면 누가 “하늘 법정에서”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천사들이 그렇게 한다고 주장한다. 성도들을 반대하는 사단의 고소 앞에서, 천사들은 그 고소를 살피고 있으며, 예수님은 천사들에게 성도들에게 내린 자신의 심판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엘렌 화잇의 요점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분의 결정은 죄 사함과 “완전하고 충분한 용서와 의”를 뜻한다.15) 그리고 물론 그들이 받아들일 것이다. 엘렌 화잇이 이 점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장에서 말하는 내용과 일치된다. (418.1)
 조사심판과 속죄
 재림교회의 조사심판의 개념에 대한 주요한 비판 중 하나는 그리스도가 그 때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신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이 사상을 매우 분명히 진술하였다. “그 때에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하늘 천사들의 시위 아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서서 ∙∙∙ 속죄의 은사를 입을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속죄 사업을 하시게 된다.”16)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를 하셨다고 이해하며, 조사심판 중에 속죄가 남아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불편한 것이다. (419.1)
 이슈는 속죄(atonement)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늘 성소의 중보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해도 되는가? 이다. 신약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제임스왕역〉로마서 5장 11절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그를 통하여 지금 우리가 속죄를 얻었다.” 이 구절에서, 속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카탈라게(katallage)의 역어다. 모든 현대 역본에서 이 단어를 “화목”(reconciliation)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신약의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게 번역하였다. (419.2)
 속죄는 전적으로 구약의 단어다. 이미 19장과 20장에서 자세히 논의한 것처럼 그것은 구약에서 히브리어 킵푸르(kippur)를 번역한 것이다 구약에서 킵푸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표하는 짐승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하늘 봉사를 대표하는 죄인을 위한 제사장의 중보 두 가지를 뜻하는 매일 제사의 결과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레 4:13-20). 또한 킵푸르는 연례제사인 속죄일과 연관하여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 날 드려진 희생뿐만 아니라 회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장의 중보를 분명히 포함한다. 그리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 교회가 하늘 성소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중보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속죄란 용어는 성경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조화를 이룬다. 참으로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성경의 용례에 더 가깝다. (4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