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1 장 요한 바오로 2세와 안식일 제 2 부 일요일 준수에 대한 “성서적” 지원
 태양의 날을 기독교의 것으로 만든 것은 분명히 태양의 날에 태양신(Sun-god)을 숭배했던 이교도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태양의 날을 그들의 기독교 예배의 날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이미 그 날이 이교도적인 종교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7.8)
 주목할 만한 것은, 태양 숭배의 인기의 상승은 주일 중 두 번째 위치(토성의 날[Saturn-day] 뒤에 옴)에 있었던 태양의 날을 주일 중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날에 자리잡도록 만든 것이었다. 많은 역사적인 자료들은 이러한 발전이 2세기초에 일어났으며, 즉 바로 그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일예배를 위해 태양의 날을 도입했다고 지적한다.52) (18.1)
 요한 바오로는 태양의 날을 도입할 때 전도적인 의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기록하기를 “지혜로운 사목적 직관이 로마의 이름이었던 태양의 날을 같은 현대 언어들 가운데서 유지하도록 일요일의 개념을 기독교화 하도록 제안했다. 이 것은 또한 신실한 자들을 태양을 숭배하는 사교의 유혹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또 인간의 참된 태양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53)고 하였다. (18.2)
 불행하게도, 이 전략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빈번히 대중적인 태양의 숭배와 다른 혹성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유혹을 받으므로 어긋난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브레스시아의 감독이었던 필라스터(Philaster, A.D. 397년 경 사망)는 “태양의 날, 달의 날들의 이름은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 . 이교도들, 즉, 헬라인들은 인류가 일곱별에 의존한다는 개념을 가진 이름들로 그 이름을 만들었다”는 편만한 신앙을 이교적인 것으로 선언하였다.54) (18.3)
 아빌라의 스페인 감독이었던 프리스실리안(ca. A.D. 340-385)의 문서에는 “태양이나 달 ∙∙∙ 그리고 모든 천체의 별들, 곧 지옥불에 들어가야 할만큼 가증스러운 우상들을 그들의 예배 의식에서 신으로 경배하거나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문이 선언되었다.55) (18.4)
 성서적인 안식일 대신에 태양의 날을 받아들여 기독교화한 것은 결코 “현명한 사목적 직관에 의해” 입증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이교신을 숭배하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서적인 성일(Biblical Holy Day)을 이교적인 휴일(pagan holiday)로 간주하도록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18.5)
 일요일이 과연 필요했는가?
 이 지점에서 본인은 겸허하게 교황 요한 바오로에게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일 안식일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성취를 기념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제도였다면 무슨 권리로 가톨릭 교회가 일요일을 안식일의 합법적인 “성취”“완전한 표현”, 그리고 “확장”된 날로 만들었는가? 안식일의 신학과 표상이 십자가 이 후에는 더 이상 창조와 구속을 기념할 만하지 못했는가? 부활의 신비가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에 각각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지 않았는가? (18.6)
 그분의 구속의 사명이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외치신 금요일 오후에 이루어졌으며, 또 안식일의 계명을 따라 무덤에서 쉬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일요일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선택되어야만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 최종적인 회복의 쉼, 곧 신약이 그러한 의미를 안식일에 놓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것을 일요일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안식일의 쉼[문자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남아 있다[apoleipetai](히 4:9).” 어거스틴 자신도 “우리가 안식하면서 보고, 보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찬양할”56)그 마지막 안식을 웅변적으로 말할 때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8.7)
 본인은 다시 진지하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이유로 첫째 날인 일요일에다 안식일의 신학적인 의미와 종말론적인 기능을 부여하려는 교황의 시도는 잘 이해하나 그와 같은 시도는 진리를 오도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성서적인 안식일을 일요일로 돌리는 것은 그 날들의 기원의미, 권위경험에 있어서 실제로 확연하게 다르므로 잘못된 것이다. (19.1)
 (3) 주일 중 첫째 날의 종교적인 모임들
 교황의 사목교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을 사도교회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는 주장하기를 사도 시대부터 주일 중 첫째 날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신앙 생활을 꼴 지었다고 한다.57) 이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교황은 다음의 중요한 세 성경절을 사용했다:

 (1) 고린도전서 16:2,

 (2) 사도행전 20:7-12,

 (3) 요한계시록 1:10.

 이 구절들은 본인의 논문에서 길게 다루었다.58) 본인은 몇 가지의 기본적인 관찰을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 (19.2)
 고린도전서 16:2: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모임?
 요한 바오로는 고린도전서 16:1-3을 인용하여 그 첫째 날에 바울이 권고한 헌금 모금 계획이 “사도 시대로부터, 주일 중 안식 후 첫날에 있었으며, 그 날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생활 리듬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전 16:2 참조)고 한다.59) 교황은 “사도 시대 이 후부터 일요일 모금은 사실 가난한 사람들과 형제의 사랑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데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 16:2)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은 유대에 있는 가난한 교회들을 위한 조직적인 모금을 언급하는 것이다”60)고 단언한다. (19.3)
 요한 바오로는 본문에 있는 사도 바울이 권고한 첫째 날의 헌금 모금은 기독교회가 그 날에 예배를 위해서 모였음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무수히 많은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이다.61) 예를 들어 콜라도 모스나(Corrado Mosna)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9장 12절에 있는 “헌금”“봉사”(service-leiturgia)로 정의하므로, 그 모금[고린도전도 16:2]을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드리는 일요일 예배와 연결시키고 있음이 틀림없다.62) (19.4)
 바울의 헌금 모금 계획으로부터 정규적인 형태의 일요일 준수를 추정해 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창의력과 독창성을 나타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본문이 마련하는 실제적인 정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지 않고 분석적인 논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는 “스스로”(파르 헤아우토, par'heauto) 이 일이 행해진 것 외에는 그 어떤 공중 모임을 암시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 구절은 그 모금이 개인적으로 은밀히 행해졌음이 틀림없다. (19.5)
 만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함께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각자의 선물을 집에다 떼어 두라는 바울의 권면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위해서 함께 모였었다면 왜 그들이 자신들의 선물을 일요일에 집에다 떼어 두어야 하는가? 그 돈을 일요일 예배에 가지고 가지 말아야 했는가? (19.6)
 헌금 모금계획의 목적
 첫째 날의 기금 조성 계획은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는 사도의 얘기에 의해 명확히 진술되고 있다. 그 때 그 계획은 선물을 드리므로 일요일 예배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도착할 때에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모금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네 가지의 특징을 그 계획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헌금은 정기적으로(periodically, “매 주일 첫 날에”--2절), 개인적으로(personally, “너희 각 자가”--2절), 은밀하게(privately, “저축하여 두어서”--2절), 그리고 이를 얻은 대로(proportionately, “이를 얻은 대로”--2절) 떼어 놓았다. (19.7)
 같은 공동체의 다른 경우에, 바울은 형제들을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고후 9:5)했다. 사도는 그렇게 하므로 주는 자들에게와 모금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헌금이 “준비치 아니한 것”(고후 9:4)으로 인해 서로 당황하는 것을 피하기를 바랐다. 이 경우에 그러한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그는 시간적으로는--주일 중 첫째 날을, 그리고 공간적으로는--각자의 집을 권했다.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