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말한다면 1,260일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1,260일들은 각기 다른 1,260일 기간들이 아니라 하나의 기간일 뿐이다. 일곱 번씩이나 언급된 것은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도표를 보아라. (321.4)
 표범과 같은 몸을 가진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였다. 위의 요약은 다니엘 7장에서의 작은 뿔에 대한 설명과 거의 일치한다. 다니엘은 말하기를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 다고 했다. (321.5)
1260일에 대한 일곱 번 언급표
1. 단 7:25 한 때, 두 때, 반 때
2. 단 12:7 한 때, 두 때, 반 때
3. 계 11:2 마흔 두 달
4. 계 11:3 일천 이백 육십 일
5. 계 12:6 일천 이백 육십 일
6. 계 12:14 한 때, 두 때, 반 때
7. 계 13:5 마흔 두 달
한 때는 한 해, 즉 열두 달(12X30) 360일.
두 때는 두 해, 즉 스물 네 달(24X30) 720일.
반 때는 여섯 달(6X30) 180일.
한 때, 두 때, 반 때는 마흔 두 달(42×30) 1260일.
(321.6)
 다니엘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까이 서 있던 한 천사가 설명하기를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고 했다(단 7:21, 25). 다니엘 8장 11~14절에서는 로마가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봉사를 반대할 것이란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322.1)
 다니엘 7, 8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3장의 표범의 몸을 가진 짐승을 비교한 다음의 도표를 참고하라. (322.2)
작은 뿔(단 7, 8장) 표범 같은 짐승(계 13장)
하나님을 거스려 큰 말을 함 하나님을 거스려 참람된 말을 함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함
성소와 군대를 짓밟음 하나님의 이름과 그 계신 곳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함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성도들을 괴롭힘 성도들과 마흔 두 달 동안 싸움
(322.3)
 가톨릭 교회는 공공연한 로마 교회이다. 그 긴 역사 동안 지금껏 사용하고 있는 공식 명칭은 “로마의 거룩한 가톨릭(보편적인) 및 사도교회”(Th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of Rome)이다. 노트르담 대학의 존 L. 맥켄지(John L. McKenzie) 교수는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로마주의야말로 그들의 교회의 정통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2 (322.4)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는 어떻게 하여 그 로마적 독특성을 지니게 되었는가? (322.5)
 용이 그 교회에게 능력과 보좌를 줌
 우리는 서론적인 네째 장면에서 용(여기에서는 로마 제국)이 표범과 닮은 짐승(로마 교회)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는 사실을 보았다(2절). (322.6)
 보좌는 권세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미 같은 구절 안에 능력과 권세라는 표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여기의 보좌는 좀더 문자적인 뜻을 전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근본적으로 보좌는 중요한 사람이 앉는 자리인 것이다. 보좌란 뜻의 희랍어로는 카데드라(Cathedra)가 있고 라틴어로는 세데스(Sedes)가 있다. 세데스에서 영어의 시(see)라는 단어가 왔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교의 보좌(또는 카데드라)가 놓여 있는 건물을 그의 “카데드랄”(Cathedral :敎座 성당 또는 대성당)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의 보좌가 위치한 도시를 “시”(see:주교구 또는 주교청)라 부른다. 가톨릭 교회의 최고 교구를 교황청(Holy See)이라고 하는데 이는 교황의 보좌가 위치해 있는 도시를 뜻하는 것으로서 바로 로마를 지칭한다.* 그런데 용인 로마 제국이 어떻게 그 능력과 권세와 그리고 그 통치력의 장소(보좌, 교구, 또는 도시)를 로마 교회에게 주었는가?

* 특별히 1929년 이탈리아와의 라테란 조약 이후 로마 교황청은 로마시 안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의 108.7에이커의 바티칸 시로 축소되었다.
(322.7)
 로마 제국의 이름은 로마 시에서 연유되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이 있다. 로마는 서방 세계의 최대 도시였다. 영원한 도시로 추앙된 이 도시는 무서운 힘과 신비로 고동쳤다. (323.1)
 그런데 이 도시의 가공스러운 세속적 위광(威光)이 로마 교황에 의해 유산으로 계승 되었다. 로마의 교황은 단지 로마의 감독이란 사실 때문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현재의 이스탄불에 콘스탄티 노플이란 새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교황의 위신이 엄청나게 신장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부터 동쪽으로 1,300 km나 떨어져 있었다. 군대가 행진해 가는데도 한 달 이상이 소요된다. 19세기 영국의 추기경인 헨리 에드워드 매닝(Henry Edward Manning)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포기는 교황들의 “해방”을 뜻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교황은” 자신이 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교황은” 서유럽에서 “질서와 평화와 법률과 안전의 유일한 원천이었다.”3 (323.2)
 콘스탄티누스 외에도 다른 여러 교황들이 교황권에 권력을 양보하거나 제공했다. 실로 로마 제국(용)은 단계적으로 그 보좌와 능력과 권세를 가톨릭 교회(표범의 몸통을 가진 짐승)에게 넘겨 주었다. 그 과정은 538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 제국의 군대가 아리우스 파 신앙을 신봉하는 동고트 족을 로마로부터 축출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538년부터, 1,260년의 기간이 시작될 수 있었다. (323.3)
 죽게 되었던 상처
 장장 1,260년이 다 지나간 1798년에 교황은 사로잡힘을 당했고 가톨릭 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대로 너무나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323.4)
 교황권은 1,260년간에 여러 다른 군사적 패배와 사로잡힘을 경험했다. 그러나 1798년의 사건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여타의 것들과 현저히 달랐다. 1798년의 사건은 유럽인들의 마음에 가톨릭 신앙의 영향이 퇴조되어 온 그 막바지에 발생했다. 그것은 군사적인 쿠데타였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교황권을 종식시키려는 의도에서 교묘히 계획된 공격이었다. (323.5)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 그리고 프랑스 혁명 정부의 지시에 따라 알렉산더 베르띠에(Alexander Berthier)장군은 1798년 2월 15일 로마에 포고령을 반포하고 교황 비오 M세와 로마 시민들에게 교황은 앞으로 더 이상 “어떤 기능도 행사할 수 없다”고 포고하였다∙ (323.6)
 당시 로마에 체류하고 있던 영국의 작가 리처드 뒤파(Richard Duppa)는 말하기를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의 교황 재위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다가 사로잡혔다고 했다. 프랑스 군의 병참감이었던 시티즌 할러(Citizen Haller)와 또 베르띠에 장군 휘하에서 로마 주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한 체르보니(Cervoni)는 “이 불행한 권력자를 사로잡는 특별한 전공을 올림으로써 크게 만족스러웠다.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는 사이에 위의 두 사람은 성당 안으로 들어갔으며 할러가 보좌에 앉아 있는 교황을 향하여 그의 통치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이 가련한 노인은 예기치 못한 통고에 순간 충격을 받은듯 했으나 이내 위엄을 되찾았다.” 교황을 호위하던 스위스 용병들은 해산되고 그 대신에 공화국 병사들이 배치되었다.5 (323.7)
 교황은 당시 80세의 고령에 건강까지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는 그를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의 여러 곳으로 거칠게 끌고 다녔다. 그는 1799년 8월 29일 발렌스(Valence) 요새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한동안 그의 시체는 매장도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다음은 조지 트레버(George Trevor)의 말이다. (3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