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토한 물에 대한 두번째 해석에서는 용의 “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입은 바로 물이 나오는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한 기만적인 말들을 상기한다. 그리하여 기만적인 언어들과 거짓 교리들, 그리고 거짓의 홍수야말로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물”이라 하였다. 이 해석에 의하면 물을 삼킨 “땅”“입”이 고고학과 지질학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고고학은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땅에서 출토해 냈다. 지질학은 표준 화석의 부재(不在)와 부정합(不整合)의 존재, 생명 형태의 복잡성(간단한 생명체의 경우에도)등의 증거들을 찾아냈는데, 이러한 증거들은 모든 진화론의 허구성을 폭로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319.1)
 상징적인 표현 자체는 전반적으로 창세기 6~9장의 홍수 설화에서 빌려 온 것으로 보여 진다. 만일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홍수의 그 큰 물이 여인의 후손(여기서는 하와의 자손들인 인류)을 다 휩쓸어 갔을 것이며 특별한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인간 가족을 보호하셨고 그럼으로써 전체 인간 가족이 보존되었다. 홍수가 오래 계속되자 그 물이 “지면(地面)”에 흡수되었다(창 8:13). (319.2)
 요한계시록 12장 14절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가 아닌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통해 여인(여기서는 참 교회)을 보호하사 큰 물에 떠내려가지 못하게 하셨다. 이것 역시 구약 성경에서 빌려 온 표현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탈출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독수리”의 날개로 저들을 업어 날랐다고 하였다(출 19:4). 하나님이 영원하신 팔로 저들을 붙들었다고 하였다(신 33:27). 하나님의 능력있는 사랑의 팔이 노아의 가족을 홍수로부터 보호하셨고 출애굽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셨고 1,260년간 참 교회를 가호하셨다. 그것들이 여전히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319.3)
 용이 “남은 무리”를 대적함
 1,260년간 참 교회를 멸망시키려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단은, 마지막 때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한다. “남은 자손들”은 노아와 그 가족이 홍수 때에 살아 남았듯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사단은 이 얼마 안되는 남은 무리들을 멸절시킴으로써 참된 교회를 진멸코자 한다. (319.4)
 어찌하여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양육을 받은 자녀들인데도 세상에서 그같이 심한 유혹에 부딪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이같은 필사적인 공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19.5)
 그렇다면 말세의 이 용감 무쌍한 남은 무리들 곧 여인의 고귀한 후손들은 도대체 누구들인가? 17절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 했다(관련 문제와 해답란을 참고하라). (319.6)
 남은 무리라는 개념에는 피상적인 것 이상의 중요한 뜻이 들어 있다(pp. 400, 401의 관련 문제와 해답란 참고). 이제는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는 서술로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검토해 보자. (319.7)
 4. 표범과 비슷한 몸을 가진 바다 짐승이 나타남(계 13:1~4).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계 12:17)있는 까닭은 모래가 땅과 바다의 만나는 점이기 때문인 것 같다. 대쟁투의 일곱 장면에 등장하는 두 짐승 중 첫째는 “바다”에서 나오며(13:1), 둘째는 “땅”에서 나온다(13:11). (319.8)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한눈에 크고 붉은 용을 닮았다. 용처럼 이 짐승도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용은 일곱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는 반면에 여기에 나오는 새로운 짐승은 열 뿔 위에 면류관을 쓰고 있다. (319.9)
 

열 뿔을 가지고 있고 표범의 몸통을 가진, 이 짐승은 다니엘이 앞서 본 짐승들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결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이 본, 두 뿔 가진 새 짐승은 들소였는가?
(320.1)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이 물결을 헤치고 그 큰 모습을 드러내자 요한은 더욱 놀랐다. 요한이 볼 때 그 짐승의 전체 모양이 “표범과 같았다.” 그러나 그 “발”은 곰의 발 같았으며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았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표범, 곰, 사자의 목록을 보았었다. 6세기 전에 다니엘은 사자, 곰, 표범, 그리고 바다에서 나온 심히 무서운 짐승을 묵시에서 보았다. 그들은 도합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었다(표범은 머리가 넷이며 다른 세 짐승은 각각 머리가 하나씩이고 네째 짐승은 뿔이 열이다). 다니엘 7장을 보라. (320.2)
 다니엘이 본 사자, 곰, 표범은 각각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들을 상징했다. 네째 짐승은 로마를 상징했는데 그 열 뿔 가운데서 열 한 번째의 뿔이 솟아나왔다. 이 뿔은 처음에는 “작은 뿔”이었으나 점차 억세어져 참람스럽게 박해하는 권세로 자라났다. 곧이어 대쟁투의 다섯번째 장면이 토의될 터인데 이 장면에서는 표범의 모양을 한 짐승의 행동이 작은 뿔의 행위와 동일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20.3)
 그러나 다섯째 장면으로 들어가기 전에 짚고 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네째 장면이 표범처럼 생긴 짐승의 활동 상항을 서론식의 형태로 개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첫째 장면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1,260년에 걸친 용과 여인의 활동 상항을 개괄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320.4)
 이 네번째 장면은 우리에게 표범처럼 생긴 짐승의 경력을 쭉 소개하고 있다.

 (1) 초기에 바다에서 나왔으며

 (2)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고 했다. 또 그 후에 요한이 보니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4) 그것은 죽게 된 상처에서 치유되었으며,

 (5) 그 결과로 온 세상이 표범의 몸을 가진 짐승과 그 후견자인 붉은 용을 경배하면서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였다. (320.5)
 우리가 대쟁투의 다섯째, 여섯째의 장면을 자세히 검토하면, 여기에서 취급한 서론적 설명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321.1)
 5. 표범의 몸을 가진 짐승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움(계 13:5~10).
 네째 장면을 간단히 일별한다 해도 표범의 몸을 가진 짐승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신원을 밝힐 유용한 정보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10절에서는 “사로잡힘”“칼에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조금 건너 뛰어서 여섯째 장면(계 13:11~18)으로 가 보자. 14절을 보면 다섯번째의 장면인 3절에서 “상하여 죽게 되”었다고 묘사된 것이 “칼에”상하였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3, 10, 14절을 함께 묶어 정리해 본다면 그 죽게 된 상처는

 (1) 칼 즉 일종의 군사력에 의해 발생된 것이고

 (2) 그 상처에는 “사로잡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21.2)
 현재 우리가 토의하고 있는 다섯번째 장면에서는 “마흔 두 달”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우리는 이 표현을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1,260일과 동일한 것임을 밝혔다. 그런데 이 기간은 용이 위의 세째 장면에서 여인을 괴롭힌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계 12:14). (3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