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6 장 바울과 안식일 제 1 부 골로새서 2:14-17; 안식일의 시인이냐 정죄이냐?
 이러한 해석은 많은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옛 언약이 “우리를 거스렸다”는 잘못된 추측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거스리는 언약을 만드신 죄를 범하신 것이다. 은혜로우신 구속의 하나님께서 그런 부당한 일을 하실 수 있었을까? 백성을 거스린 것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언약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노출된 그들의 죄였다. 그 이유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롬 8:3, 4)이기 때문이다. (149.3)
 더욱 심각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문에 쓴 증서”에 대한 라쯔라프의 잘못된 해석이다. 그는 이 문서를 이른바 하나님께서 제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안식일을 포함한 옛 언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10) 이러한 대중적이고도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적으로 적어도 두 이유에서 근대 학문계로부터 불신임을 받아 왔다. 첫째, 에듀얼드 로지(Eduard Lohse)가 골로새서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지적한 것처럼 “편지서의 전반에서 율법이라는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불가피하게 보이는 율법의 중요성도, 그가 복음을 제시할 때는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11) (149.4)
 두 번째, 이 해석이 하나님의 용서의 완전하심을 입증하기 위해 고안된 직접적인 논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율법이나 의문의 율법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보증을 거의 마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죄는 율법의 조항을 파괴하므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단지 도덕적인 원칙이 없는 인류만을 남겨 두게 될 것이다. (149.5)
 이러한 언급들에 대한 유효성은 캠브리지 대학교의 신약 교수이시며 본인의 안식일에서 일요일로(From Sabbath to Sunday)라는 논문에 주로 답변하고 있는 안식일로부터 주일로(From Sabbath to the Lord's Day)라는 학술 심포지엄에 기고자인 더글라스 데 라시(Douglas R. De Lacey)에 의해서 조차도 승인을 받는다. 라시는 기록하기를, “바키오키는 노모스[율법, nomos]라는 용어가 골로새서에서 전적으로 빠져있다는 사실에 크게 강조를 두고 있으며, 비록 종종 자신의 해석에 확신이 없을 때도 있지만, 그는 이 구절이 모세의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없어졌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자신의 결론에서는 분명히 옳다고 한다.12) (149.6)
 죄를 기록한 책
 성경에서 단지 이곳에서만 나타나는(골 2:14) 케이로그라폰(cheirographon)의 뜻은 묵시문서와 랍비의 문서에 나타나는 그 용어의 용례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서 분명해졌다.13) 그 용어는 “죄가 기록된 책” 또는 “죄의 부채 증서”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나, 도덕률이나 또는 의문률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중도에 제하여 버렸다”(골 2:14)는 구절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중도에”라는 구절은 참소하는 증인에 의해 소집된 법정이나 의회의 중심에 위치한 곳이었다. 골로새서의 문맥에서, 참소 하는 증인은 “죄를 기록한 책”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법정으로부터 없애 버리시고 제하여 버리셨다. (150.1)
 이 대담한 은유에 의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의 완전함을 확증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법들이 우리를 거스렸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기록한 문서를” “취소하셨고,” “제하셨으며,”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죄를 기록한 문서의 법적인 기초는 “묶는 규칙들,” 또는 “규정들”(토이스 도그마신, tois dogmasin)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제하신 것은 죄에 얽혀 들도록 하기 위한 법적인 근거(율법)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기록한 문서였다. (150.2)
 우리의 죄의 증거를 파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은 자들을 참소 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못하도록 하신 이 후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리셨다”(골 2:15).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구속과 용서를 마련하신 이 후, 그리스도인들이 불완전함을 느껴서 열등한 중보자들의 도움을 찾을 이유가 도무지 없다. (150.3)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문서는 일반적인 면에 있어서 율법이나 또는 특별한 면에 있어서 안식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의 기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본문을 율법이나 또는 안식일을 언급한 것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문맥상의 지지나 또는 언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150.4)
 (3) 안식일 준수에 대한 허가인가 정죄인가?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의 신학적인 추측을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그분의 구속의 완전성을 재확인하므로 반대하면서, 바울은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들에 대한 실제적인 국면으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 17). (150.5)
 안식일을 반대하여 경고하는가?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루터가 제시한 것처럼, “여기서 바울이 이름을 거명하며 안식일을 폐했다고 하며 또 그것을 지나가 버린 그림자로 불렀던 것은 몸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오셨기 때문이다”14)라고 해석해 왔다. 라쯔라프는 그 구절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문맥은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이 안식일과 또 다른 옛 언약의 회합들을 지키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는 자들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준수하지 않아도 죄의식을 도무지 느끼지 않도록 허용되어야 한다.”15) 그는 “따라서, 누구든지 너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를 안식일을 포함한 다섯 가지의 언급된 관습들을 반대하는 바울의 경고로 해석한다.16) (150.6)
 이것은 잘못된 해석으로서 그 이유는 본 구절에서 바울은 골로새인들이 이러한 관습들을 반대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먹고, 마시고, 거룩한 시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하는 이는 “누구든지”(tis) 반대하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을 가하는 자는 바울이 아니라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골 2:23) 하기 위해 이런 관습들을 어떻게 준수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골 2:20), 곧 규칙들을 삽입하여 넣은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이다. (151.1)
 이미 앞에서 인용한 안식일을 주일로라는 학술심포지엄에 기고자인 더글라스 데 라시는 다음과 같이 올바로 진술하고 있다. “심판자는 골로새인들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금욕적인 경향성을 가진 어떤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을 가장 자연스럽게 취하는 길은 그도 역시 축제의 날들의 의식을 삽입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준수하는 어떤 요소들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17) 아마도 그 ‘심판자’는 공동체가 이러한 관습들을 더욱 금욕적인 방식으로(“몸을 괴롭게 하는데”골 2:23, 21) 준수하기를 원한 것 같으며; 그것을 뭉툭하게 놓기 위해, 그는 골로새 교인들이 축제는 적게 하고 금식은 많이 하기를 원했다. (151.2)
 안식일에 대한 허가
 축제들을 어떻게 준수하는 지에 대해 “폄론”하는 거짓 교사들의 권리를 거스려 경고하면서, 바울은 그러한 축제들의 유효성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준수하는 방법을 입법화하는 거짓 교사들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분명한 뜻은 바울은 안식일 준수를 포함하여 언급된 관습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51.3)
 비록 데 라시가 바울이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보는 자신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여기서 다시(골 2:16), 바울은 행복하게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엄격한 규정들이 축제들에 부가되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해석한다.”18) (151.4)
 시카고의 성 싸비에르 대학교(Saint Xavier University)의 교수인 트로이 말틴(Troy Martin)은 뉴 테스트먼트 스터디즈(New Testament Studies)에서 출판된 최근의 한 기고문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골로새에 있는 바울의 공동체가-반대자들이 아닌자들-골로새서 2:16에 개요된 그 당시에 있었던 분파들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마련한다. . . 골로새서 2:16에 있는 목록의 기능에 대한 이 연구는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절기, 월삭, 그리고 안식일을 포함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사들에 비평하지 않고 참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19) (151.5)
 라쯔라프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옹호된 전통적이고도 대중적인 해석과는 반대로, 골로새서 2:16은 신약에 있는 안식일 준수의 조종(弔鍾)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바울이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학자들을 보도록 용기를 주고 있다. 그렇다면 라쯔라프는 비록 그가 이 심포지엄을 자신의 책에 주요 자료들로 사용하면서도 왜 데 라시 교수(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포함하여)의 결론은 전적으로 무시하는가?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독자들이 자신의 골로새서 2:16의 반 안식일 해석에 어떤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론에는 자신의 결론을 제시하기 전에 반대 견해들을 점검해보기를 요구하는 학문의 책임성이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 (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