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16에서 바울이 “안식일들”(Sabbaths)의 준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의해서 반박된 “골로새의 이설” 가운데 유일한 하나의 국면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골로새의 신자들을 “실격시키려고”(골 2:18) 위협하는 거짓 교사들의 전반적인 속성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모세의 법들이며 또한 그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도말하시고 제하여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의문에 쓴 증서-케이로그라폰[cheirographon]”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147.1)
대부분의 주석 가들은 골로새의 이설을 헬라주의 적인 요소들과 유대주의 적인 요소들을 통합한 신인동형적 가르침(syncretistic teachings)으로 정의한다.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둘다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국면들을 가지고 있었다. (147.2)
신학적인 국면
골로새인들의 “철학”(골 2:8)은 신학적으로서, 신자의 충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와 경쟁하고 있었다. 그 철학의 권위적인 요소는 인간의 “전통”(골 2:8)이었으며, 그 철학의 목적은 참 “지혜”(골 2:3, 23), “지식”(골 2:2, 3; 3:10)을 나누어주고, 그리고 신의 “충만하심”(골 2:9, 10; 1:19)에 접근하여 참여할 수 있는 보증을 주는 것이었다. (147.3)
이러한 우주적인 권력들과 권세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골로새인 “철학자들”은 천사들의 권세들(골 2:15, 18, 19, 23)에게 경배하고 또 의식적인 관습과 금욕적인 관습을 따르도록 권했다(골 2:11, 14, 16, 17, 21, 22). 그런 과정에 의해, 사람은 신의 “충만하심-fullness[pleroma]”(골 2:9, 10; 참조 1:19)에 접근하고 또 참여하는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오류는 열등한 중재자들을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삽입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골 2:9, 10, 18, 19). (147.5)
실제적인 국면
골로새 이단들의 신학적인 추론이 가져다준 실제적인 부산물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의식주의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육적인 몸을 벗는 것”(골 2:11—세상으로부터 물러난다는 뜻이 분명함), 몸을 괴롭게 하는 것(골 2:23), 어떤 종류의 음식과 음료를 맛보거나 만지는 것을 금함(골 2:16, 21), 그리고 신성한 날들과 절기들—절기, 월삭, 안식일(골 2:16) 등을 조심스레 준수하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147.6)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이러한 금욕주의적인 관습들에 항복하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항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들은 부가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완전한 접근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도록 인도를 받았던 것 같다. 이것은 “세상과 초등학문을 좇아”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좇아”(골 2:8) 사는 것 사이에 있는 바울의 구분과 그리고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한 사도의 일관된 주장으로부터 추론된 것 같다.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골 2:9)하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의 요소들을 숭배함으로가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2:10; 참조 1:15-20; 3:3)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애의 “충만함—fullness[pleroma]”에 이른다. (148.1)
이 명백한 개요는 안식일이 라쯔라프가 주장하는 대로7) 옛 언약의 율법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하는 문맥 안에 있는 구절들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오히려 구약으로부터 온 요소들에 포함된 신인 협동적 신앙과 실천의 문맥 안에서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후자는 골로새 “철학자들”에 의해서 옹호된 금욕주의적인 원칙들을 위한 정당성을 마련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이 교사들이 어떤 종류의 안식일 준수를 말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주도면밀한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강조에 기초하여, 그 날이 가장 엄격하고도 미신적인 방법으로 준수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148.2)
할례와 침례
위에서 언급된 거짓 교사들과의 싸움에서, 바울은 “신성의 충만함”(골 2:9)을 소유하시고 충만한 구속과 죄의 용서를 마련하시는(골 2:11-14)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탁월성을 찬양하기를 선택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확실성과 충만함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세 개의 은유, 곧 할례, 침례, 그리고 “의문에 쓴 증서”(골 2:11-14)를 활용한다. (148.3)
처음 두 은유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1-13). (148.4)
안식일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옛 언약의 한 부분이라는 자신의 논쟁을 지지하기 위해, 라쯔라프는 이 구절이 할례와 침례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옛 언약에서는 입적의 표징이었던 할례가 새 언약에서는 침례로 대치되었다고 가리키는 것으로 주석한다. “바울은 할례가 옛 언약에 들어가는 표징으로 그 역할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미리 예시하였는지를 보여주지만,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표징으로 계속되지는 않는다. 새 언약에서는 침례가 할례의 자리를 대신한다.”8)(148.5)
라쯔라프의 해석의 문제점은 바울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거나 또는 대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유익을 할례와 침례라는 비유를 통해서 확증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할례와 침례의 비유는 바울이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토론을 하기 위해서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용서의 완전하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완성되었고 또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선포가 금욕주의 실천의 수단으로 천사들(골 2:18)과 “세상의 초등학문”(골 2:8)을 숭상하므로 완전을 시도하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대답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148.6)
(2) 십자가에 못 박힌 의문에 쓴 증서
11절에서 13절에 분명히 언급된 하나님의 용서의 확실성과 완전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은 14절에서 하나님을 심판자, 곧 “의문에 쓴 증서-케이로그라폰[cheirographon]을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는” 분으로 합법적인 비유를 사용한다. (149.1)
모세의 율법
십자가에 못박은 “의문에 쓴 증서—케이로그라폰”은 무엇을 말하는가? 전통적으로 안식일을 포함하여, 이른바 하나님께서 떼어놓으시고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그것은 모든 규정들을 담고있는 모세의 율법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 해석은 라쯔라프에 의해서 옹호되고 있으며, 그는 기록하기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부채 증서’ 또는 ‘법령’은 무엇인가? 문맥에서, 바울은 옛 언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옛 언약이 ‘우리를 반대했는가?’ 우리는 옛 언약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서 그것의 기능가운데 하나는 마치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증거’로 행동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신 31:26). 깨어진 율법과 관련된 저주와 정죄하는 율법의 능력은 둘 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라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 8:1).”9)(1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