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바위틈에 숨은 사람들과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은 얼마나 큰 대조를 보여 주고 있는가! 산과 바위에게, 무너져 자신들을 죽여 달라고 외치는 아우성과 순교자들이 구원의 반석(시 95:1)이신 주님께 호소하는 기도는 얼마나 서로 다른가! (188.5)
 주님의 낯을 두려워하여 숨으려는 사람들의 공포와 그의 오심을 기다려 기쁘게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기쁨은 얼마나 대조적인가(사 25:9). 어린 양의 진노로 말미암아 공포에 떠는 것과 어린 양의 의로 옷입은 것은 얼마나 서로 다른 것인가. (188.6)
 어린 양의 낯을 피하려 하는 사람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도 피하려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과 동행하신다. 모든 거룩한 천사들도 마찬가지이다(마 25:3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사 동안쯤(잠시 동안) 고요”(계 8:1)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에는 그때 찬송을 부를 존재가 하나로 남아 있지 않는다. (188.7)
 우리의 시련을 위해 족한 도움을 주신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복스러운 소망”(딛 2:13)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했을 때 재림의 소망을 확고한 신념으로 언급하였다(살전 4:13~18). 현재 우리들이 우리의 기도에 대해 응답받았다고 생각하는 응답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응답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최종적인 응답이다. (188.8)
 그러나, 우리가 병들거나 외롭거나 학대를 당하거나 슬플 때면 재림이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재림의 기쁨을 마음 속으로 현상화해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우리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습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필자 자신은 이렇게 할 때마다 늘 마음이 새로와지는 경험을 하였다. 이 때문에 어린 양이 여섯째 인을 떼시고 그것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188.9)
 그러나, 하나님도 예수님의 재림도 아득히 멀어 보이고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시는 것 같지도 않을 때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을 마땅히 재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너무나 자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너무 외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여러 다른 것들과의 상호 관련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189.1)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요 16:33) 리라고 말씀하셨다. (189.2)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막지 않으셨다. (189.3)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감옥에서 목베임을 당해 죽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189.4)
 예수님은 순교자들을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로 묘사하셨다. (189.5)
 예수님께서는 한 차례에 한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요 14:13)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하나의 조건을 추가하셨다. “내 이름으로”란 말은 나의 성품으로란 뜻이다. 굿스피드(Goodspeed) 교수의 번역에서는 이같은 뜻을 반영하려고 애쓴 노력이 엿보인다. “나는 너희가 나의 추종자로서 나에게 구한 것을 무엇이나 시행하리라.” 즉 이 말은 만약 너희가 나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리고 나의 방식대로 기도한다면 너희가 구하는 것을 내가 시행하리라는 뜻이다. (189.6)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처형을 면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을 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다(마 26:39). 필립의 번역에서는 좀더 평범한 영어로 옮겨겨 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대로 되어서는 안 되옵고 당신의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의 참된 추종자로서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성품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굴복시켜, 하나님이 비록 우리의 소망에 위배되는 것일 지라도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선한 것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189.7)
 겟세마네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동기는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일부 동기들과는 얼마나 다른가. 야고보서 4장 3절은 왜 우리들의 일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지를 설명해서 말하기를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셨다. (189.8)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주님의 결정에 내맡겨야 한다. 그리하여, 항상 이기심 없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기도하거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위해 건강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도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189.9)
 우리의 기도는 외견상 사심(私心)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고집이 담긴 기도일 경우가 많다. (189.10)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보다 더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믿을 수 없는가? 장기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위해 잘 해주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청 때문에 최선이 아닌 것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인가? (189.11)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께 신원(伸寃)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 즉 하나님의 의와 영생의 흰옷을 주셨다. (189.12)
 사도 바울은 눈병 낫기를 위해 여러 해 동안 기도했었다. 그는 좀처럼 완치되지 않는 그 눈병이 낫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189.1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눈병 낫기를 바라는 바울의 기도에 대해 대신 은혜로써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바울 자신에게 최선의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상 바울은 그가 눈병으로 고생할 때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목사로 생활하였다. 그는 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진실되이 신뢰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 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 10)하였다. (18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