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유비의 원칙은 성경의 명료성을 포함한다. 성경적 원칙은 성경은 분명하여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해 주는 어떠한 교회의 교권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는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별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리고 독자들을 격려한다(참조 신 30:11-14; 눅 1:3, 4; 요 20:30, 31; 행 17:11; 롬 10:17; 계 1:3). (95.1)
 성경의 의미는 분명하고 직선적이며, 부지런한 연구자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 예수는 법관을 취급 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것을 예증하였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다시 말하면, 그는 성경이 이해되기를 기대하였다. 법관이 신명기 6:5레위기 19:18을 인용했을 때 예수는 그가 정확하게 대답했다고 칭찬했다(눅 10:28). 예수는 여러 차례 동일한 요점을 지적하였다. “너희가 성경에서 결코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마 12:3, 5; 19:4; 22:31; 막 12:10, 26; 눅 6:30.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 24:15; 막 13:14). (95.2)
 성경 기자들의 일관된 모본은 성경이 분명하고 명확하게 상징을 의도하지 않는 한 성경을 그것의 분명하고, 문자적인 의미대로 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자적인 것과 상징적인 언어 사이의 상이성에 관해 예수께서 구별하신 것과 제자들이 인식한 것을 특별히 주목하라(요 16:25, 29). 오직 입문한 사람들만 발견할 수 있는 신비적이고 숨겨진, 풍유적인 의미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하여 문자적 의미의 “껍질”을 벗겨낼 일이 전혀 없다. (95.3)
 성경은 또한 성경 기자들의 분명한 진리의 의도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관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구절에 대한 수많은 가능한 해석 중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갖고 인간 기자와 신적 저자가 의도한 참된 의미를 말하였다(참조 행 3:17, 18, 22-24). 동시에 신약의 해석은 주어진 구약의 구절들의 의미를 모두 드러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조심스럽게 주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성경 기자들이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하고 미묘한 차이들을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들 중에 의도적으로 어떤 단어나 구절을 사용한 예들도 존재한다(참조 요 3:3). (95.4)
 묵시적 예언과 관련되어서 특정한 진리의 의도가 생생하게 제시되기도 한다. 천사 해석자가 일관되게 각각의 상징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제공한다(참조 단 7:16-27; 8:15-26; 묵시예언 II. E). 다른 예로는 예수 자신이 각 부분의 의미를 해석해 준 예수의 비유들이 존재한다(참조 마 13:18-23, 36-43). (95.5)
 이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확장된 의미나 미래의 성취 등 그들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예컨대, 표상학, 예고적 예언, 상징과 비유). 이러한 경우에도 확장된 의미나 성취는 특별한 진리의 의도를 가진 본문으로부터 발생하고 일치해야 하며, 사실상 그 본문의 주요 부분이어야 한다. 성경 자체는 그와 같은 확장된 의미 혹은 성취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참조 III. E. 3). (95.6)
 원래의 청중들이, 심지어 영감 받은 기자까지도 성경의 모든부분을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베드로전서 1:10-12에서 사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 속에 있는 모든 메시아적 의미들을 언제나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베드로는 성경의 명료성의 원칙의 다른 측면을 제시한다. 곧 더 분명한 부가적 계시가 덜 분명한 구절들을 더 충분하게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점이 베드로후서 3:16에도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바울이 기록한 어떤 것들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이러한 어려운 구절들이 출발점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 이것들은 좀 더 분명한 성경적 진리의 진술이라는 더 큰 문맥 속에서 연구되어야한다(18절; 참조 2절). (95.7)
 또한 성경의 명료성의 필연적인 귀결은 “점진적 계시”의 개념을 포함한다. 히브리서 1:1-3은 구약 선지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점진적 계시를 지적한다(참조 요 1:16-18; 골 1:25, 26등). 이것은 나중의 성경이 이전의 계시와 모순되거나, 그것을 파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중의 계시가 앞에 제시된 진리들을 조명하고 명확하게 하며 보충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산상설교에서(마 5장) 십계명의 계율을 무효화하지 않으셨고, 그것들로부터 오류가 있는 전통의 오염물들을 벗겨버리고 그 진리들의 심오한 의미와 적용을 드러내셨다. 이러한 율법의 더 충만한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들은 이미 구약에 존재했고, 예수께서는 어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해석으로부터 그것들을 해방시키므로 이러한 진리의 보배들이 더욱 더 빛나게 만드셨다. 또 점진적 계시는 예수는 구약의 여러 가지 표상과 예언들의 성취라는 의미에서 발생한다. (96.1)
 명료성의 원칙의 마지막 실천적 적용은 한 구절이 다른 구절을 조명함에 따라 나선적인 이해가 중 폭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나중의 성경 저자들은 이전에 기록된 것들에 관해 세심하게 유의하면서 기록하고, 때로는 이전에 온 것들을 붙잡고 그것들 위에 기별을 세운다(이것을 후성[後成]의 원칙[the epigenetic principle] 혹은 선행 성경의 유비[analogy of antecedent Scripture]라고 부르기도 함). 나중의 구절을 자세하게 읽으면 이른 시기의 구절들의 메아리[반향]나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나중 것의 더 충만한 의미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이것은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른 시기의 구절들은 나중 계시의 빛으로 보기 전까지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표상학과 예언에서 그렇다(참조 마 12:6, 42, 43; 벧전 1:10-12). 이렇게 이해의 나선은 후의 것이 앞의 것을 조명하고, 앞의 것이 후의 것을 조명함에 따라 증가한다. (96.2)
 D.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됨”
 성경 해석의 넷째 대원칙은 선(先)이해 또는 객관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현대의 성경 해석학적 방법은 그 어떠한 영적인 초자연적 도움과 완전히 동떨어져서도 해석학적 원리와 주석적 도구를 철저하게 적용하면 성경 기자의 원래 의도를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따라서 비(非)그리스도인도 정확하게 도구들을 사용하고 원칙들을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뜻을 결정할 수 있다. (96.3)
 그러나 성경적 자료들은 다른 결론으로 인도한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2:11, 14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96.4)
 1. 성령의 역할
 성경은 궁극적으로 인간 저자의 마음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에(참조 고전 2:12, 13), 원래 의미와 그것에 대한 현재의 적용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고, 그것은 바울에 따르면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을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전 2:13, 14; 고후 3:14-18; 참조 요 6:45; 16:13). (96.5)
 어떤 이들은 해석학적 나선(媒旋) 속에 성령이 자리를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주관적 요소가 건실한 주석적/해석학적 연구를 정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서 발생하는 주석과 해석학의 원칙들을 주의 깊게 적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에만 의지하려는 오직 “영적인 주석”은 주관주의로 끌려가기 쉽다. 그러나 건전한 해석학적 방식에 기초한 철저한 주석과 성령을 의지하는 것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것만이 주관주의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하는유일한 탈출구이다. (96.6)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입견과 가정과 편견을 갖고 성경에 접근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신앙적 편견” 없이 본문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에 의해 고쳐질 수 없다. 사실상 성경은 신앙적 반응을 요구하기 때문에 “중립적” 입장의 시도는 성경의 의도를 이미 거스른 것이다(참조 마 13:11-17; 요 6:69). (97.1)
 신앙을 가진 성령으로 인도함 받는 해석자도 자기 자신의 편견과 선(先)이해를 갖고 접근하며, 오류에 전혀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참조 행 11:2-18). 그러나 성경의 약속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자기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일을 크게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롬 12:1, 2).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여기에서 “너희”가 복수형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몸된 교회의 교제 안에서 해석자들을 함께 지도하신다(시 119:63; 행 2:42; 4:32; 롬 12:4-8; 고전 12; 엡 4:3-6). 교회 안에서 그들은 서로 교환하고 다른 신자들의 교정으로 유익을 얻을수 있다. (97.2)
 해석자들은 그들의 이해가성경으로부터 비롯되고 성경의 조종을 받도록 결정해야 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성경에 기초하여 그들의 사상을 수정하고 확대해야 한다. 그들은 어떠한 외부적인 열쇠 혹은 자연주의(초자연적인 것이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닫힌 인과율의 체계), 진화론(발전 원리), 인본주의(최종 규범이 인간임), 상대주의(절대적인 것을 거절함) 등 성경 밖의 어떠한 체계도 성경에 강제로 주입하려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절해야 한다. 성경 해석자는, 말씀에 영감을 주신 성령께서 말씀을 따라서 그의 선입견을 조명하고 조정하고 수정하시며, 그들의 이해가 말씀에 충실하게 기초되도록 지켜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97.3)
 2. 해석자의 영적 생활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 된다”는 것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성령의 필요뿐 아니라 해석자가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성령은 마음을 조명할 뿐 아니라 해석자의 마음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해석자의 방법은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기꺼이 따르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고 말씀하셨다. (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