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4장 안식일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이다
 히브리서 4장 9절“사바티스모스”가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뜻하지 않는다고 내세우는 이유들을 들어보자. 첫째 이유는 히브리서가 주장하기를 여호수아의 때나 다윗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분명히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으니(4:3, 5, 6) “사바티스모스”는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264.4)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일 안식의 의미를 세 단계로 나누어 말한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 안식의 뜻을

 (1) 제칠일 안식일의 육체적인 휴식,

 (2)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누린 민족적인 안식,

 (3)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또는 메시야적인 안식으로 나누어 주장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히 4:8), 그들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안식일 안식의 영적인 차원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고 주장하였다(히 4:2, 6). (265.1)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후인 다윗의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히 4:7). 그 때까지도 안식일 안식의 영적인 차원이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경험으로 성취되지 못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 안식(사바티스모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은 어떠한 안식일 안식인가? 두말할 나위 없이 영적인 안식을 동반하는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이다. 안식일 안식을 위해 “자기 일을 쉬는” 육체적인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265.2)
 안식일 안식의 영적인 차원은 몸 없이 정신으로만 경험되는 차원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칠일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칠일에 육체적으로 쉬었기 때문에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과 불순종 때문에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이고 무엇이 순종인가. 아무리 하나님의 안식의 영적인 차원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초청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은 어떻게 나타낼 수밖에 없는가. 그 믿음과 순종을 육체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 제칠일 안식일에 육체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영적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은 영적 안식을 동반하는 문자적 안식일 준수이다. (265.3)
 제칠일 안식일의 문자적 준수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히브리서 4장 10절에서 “자기 일을 쉬었느니라(한글성경에는 ‘쉬느니라’)”고 과거 시제를 사용했으므로 이것은 신자들이 제칠일마다 쉬는 안식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 도달했던 은혜의 안식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266.1)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쉬었다”고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그 바로 앞의 구절에서 “안식에 들어갔다”는 과거 시제와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간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이르는 방식은 “자기 일을 쉬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266.2)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는” 것과 사람이 “자기 일을 쉬는” 것을 단순히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칠일에 자기 일을 쉬었듯이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신자들도 제칠일 안식일에 자기 일을 쉰다는 것이다. (266.3)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 하고 “제칠일에 자기 일을 쉬었다”(카타파우센)고 하여 모두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이 과거와 현재의 두 영역에 두루 걸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안식일에 자기 일을 쉼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에 의해 안식일 안식이 경험되었듯이 현재에도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하기” 때문이다(히 4:11). 일부 번역(RSV와 NIV)에는 두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들어가다, 쉬다). 왜냐하면 문맥 자체가 안식일 안식의 현재적 성격과 무 한정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66.4)
 안식일 안식은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누리는 은혜의 안식인가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날”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였고, 새로운 언약에서는 신자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해 일 주일의 끝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267.1)
 그러나 히브리서 4장에서 “오늘날”(세메론)은 날마다 누리는 안식일 안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으로 말미암아 경험하지 못한 제칠일 안식일의 “하나님의 안식” 경험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히 4:6).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장 7절을 인용한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히 4:7; 시 95:7).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시대에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안식의 초청을 다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쉼”으로서의 안식일의 영적인 영역이 아직도(오늘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나타내고자 하는 말이다. (267.2)
 “오늘날”이란 말은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안식을 누림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이라는 말을 다윗의 때에 말씀하셨다는 역사적 문맥까지 무시하는 것이다. 과연 다윗의 때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오늘날”이라고 표현하셨다 하여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폐지하고 날마다 안식일을 지켰거나 아무 날도 안식일로 지키지 않았다는 말인가. 다윗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은 제칠일을 다른 날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가. (267.3)
 구약성경의 안식일 안식 해석의 세 단계
 히브리서 3, 4장에서 논의된 안식일 안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약성경과 유대 문헌에서 사용된 안식일 안식의 세 단계 의미를 참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 성경에서는 안식일 안식이 일차적으로 제칠일 안식일에 육체적으로 일을 쉬는 것을 뜻했다(출 20:10, 23:12, 31:14, 34:21). 그리고 이차적으로 안식일 안식은 안식의 땅에서 평화스러운 생활을 살고 싶은 민족적 열망을 요약하고 있다(신 12:9, 25:19; 14:3). 그런데 민족적 평화와 번영의 정치적 열망을 뜻하는 안식일 안식이 대체로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 안식의 세 번째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날들의 끝”이나 “도래할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메시야 시대의 상징이 그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안식일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성경절의 3분지 2는 “날들의 끝”에 대한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사 56:4-7, 58:13, 14, 66:22-24)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안식일과 끝 날에 대해 말할 때 똑같이 “즐거움”(오넥)과 “존귀”(카보드)란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즉 너희는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부르고 이를 존귀히 여기라”(사 58:13) 하셨고 끝날에 “너희는 그 영광(존귀)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 66:11) 하셨다.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분명하다. 끝날을 특징짓는 즐거움과 기쁨은 안식일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268.1)
 후기 랍비 문서들과 묵시 문서들은 안식일의 메시야적 종말론적 해석의 더 분명한 실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예컨데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는 말하기를 “우리 랍비들은 칠년기의 끝에 다윗의 아들이 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수많은 안식일이 지나갔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Sanhedrin, 97a)고 하였다. 그리고 기원 1세기의 작품인 “아담과 이브의 책”에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셋에게 권고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아, 죽은 자를 위하여 6일 이상 애곡하지 말라. 왜냐하면 제칠일은 부활의 표징이며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안식이기 때문이다.”5 (269.1)
 어떻게 해서 안식일이 도래할 세계의 상징으로 간주되게 되었는가? 첫 번째는 출애굽의 광야 경험이 작용했고 둘째는 바벨론의 포로 경험이 작용했다. 여행과 포로의 힘든 삶을 살면서 에덴의 안식일을 미래 메시야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실상, 메시야의 시대는 물질적인 풍요(암 9:13, 14; 욜 4:19; 사 30:23-25; 렘 31:12)와 사회적 정의(사 61:1-9)와 사람과 동물들 사이의 조화(호 2:20; 사 65:25, 11:6)와 무병 장수(사 65:20; 슥 8:4)와 찬란한 빛(사 30:26; 슥 14:6, 7), 그리고 눈물과 죽음이 없는 삶(사 25:8)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269.2)
 요약하건대 구약 성경과 후기 유대 문헌에서는 매주 안식일의 경험이 가나안 땅에서 평화스럽게 살려는 국가적 열망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안식일과 쉼으로 간주되기에 이른 메시야 시대의 희망을 키우기 위하여 안식일의 경험이 이용되었다. (269.3)
 히브리서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의 세 단계 해석
 히브리서 3, 4장은 구약성경에서 안식일 안식이 개인적, 국가적, 메시야적 실재 등 세 단계로 해석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안식일 안식의 세 가지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즉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3장4장에서 시편 95장 11절창세기 2장 2절을 하나로 묶어 안식일 안식의 세 단계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270.1)
 제 1단계에서는 안식일 안식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진”(히 4:3)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을 지적하고 있다. 제 1단계의 의미는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함으로써 형성되고 있다. (2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