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4장 안식일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이다
 마태복음 22장 40절에는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초로 생각되는 두 개의 위대한 계명이 언급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요약했다고 해서 요약의 대상을 폐기하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60.1)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요약 명령을 순종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레 19:19; 마 22:39)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을 무시하거나 파괴한다면 지각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의 더 중요한 것”(마 23:23)을 인식하도록 촉구했을 때 곧이어 율법의 덜 중요한 것들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60.2)
 우리는 마태복음에 근거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살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더욱 밝히 들어냈으며 어떤 경우에서는 더 강화하셨던 것이다(마 5:21, 22, 27, 28). 하나님의 율법의 기독론적 실현과 연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신약성경의 안식일론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60.3)
 Ⅱ. 히브리서에 있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안식일과 언약의 관계의 바른 인식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신약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히브리서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를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9절에서 분명하게 “안식할 때(안식일을 지킬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261.1)
 안식일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히브리서 4장 9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고 한 “안식할 때”(sabbath keeping) 곧 희랍어 원문의 “사바티스모스”를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로 해석하지 않고 날마다 영적 구원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히브리서 4장 9절을 근거로 해서 제칠일 안식일의 계속적인 준수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절에서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이 있다”하였는데 안식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옛 예법이 하나이며(레 23장), 이 예법이 그리스도의 구속봉사로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261.2)
 히브리서가 말하는 구약 종교 전통의 비연속성
 레위 제사 제도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히브리서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비연속성을 가르쳤다는 주장은 옳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끝이 났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십계명의 도덕적인 원칙이나 특히 안식일 계명에까지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261.3)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사람들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히 7:11)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과 성소와 그 제사는 모두 비유이고 상징이었기 때문에(히 9:9, 8:5) 그것들 자체로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가 없었다”(히 9:9).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오시어서 “세상 끝에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실”(히 9:26)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오심으로서 성전과 관련된 레위 계통의 제사들이 모두 “폐하고”(히 7:18), “없어지고”(히 8:13), “폐기되었다”(히 10:9). (262.1)
 그런데 이런 주장은 레위 계통의 제사 제도에 국한되어야 한다. 예식적인 율법은 출애굽기 25-40장레위기 1-27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경고하신 율법들인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성전 “식양”을 따른 것들이었다. (262.2)
 또 히브리서 9장 1절“첫 언약의 섬기는 예법”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 제사제도와 율법과 기능들 중에는 “언약의 비석”(히 9:4)도 포함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이 “언약의 비석”은 지상 성소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기명들의 하나로 지적된 것이지 그 비석 안에 있는 십계명의 내용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상 성소의 제사들이 종식된 것이지 단지 십계명이 성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법궤 안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십계명까지 폐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262.3)
 새 언약에 있어서 십계명의 연속성
 히브리서는 이제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어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히 9:24) 하늘 성소가 예루살렘의 성소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그가 이상 속에서 하늘 성전을 바라보았을 때 성전 안에 십계명을 간직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았다(계 11:19)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공의(십계명)와 자비(시은소) 위에 세운 하나님의 보좌를 대표한다. 십계명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없어진 성소의 일개 설치물에 불과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요한에게 이상을 통하여 십계명을 간직한 언약궤를 보여 주셨겠는가? (262.4)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 하늘의 성소에 언약궤가 보였다는 사실은 십계명의 원칙이 아직도 하나님 정부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263.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비연속성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연속성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째로 동일하신 하나님이 “옛적에는 선지자들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시고” 지금 곧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로 말씀하시는”(히 1:1-2) 그 계시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이어지는 충성과 업적의 연속성(히 3:2-6)을 말할 수 있다. 또 지상 성소에서 제사장들에 의해 모형적으로 이루어진 구속 봉사와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실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 봉사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히 7-10장). 그리고 구약의 의인들이 붙잡았던 그 믿음과 약속들(히 11-12장)에 신약의 신자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믿음과 소망의 연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63.2)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아폴레이페타이) 안식일 준수 곧 사바티스모스” 안에 연속성이 있다. “남아 있다”(아폴레이페타이)라는 동사의 문자적인 뜻은 “뒤에 남겨 있다”이다. 그래서 9절의 뜻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남겨 있다”가 될 것이다. (263.3)
 안식일의 항구성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히 4:11)라는 권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안식일 안식 경험의 성취가 미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안식일 안식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모두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서의 기자가 레위 계통의 제사직과 그 봉사에 대하여 “폐해졌고”(히 10:9), “쇠하고,” “없어지게 되었다”(히 8:13)고 말하면서도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 4:9)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64.1)
 히브리서 4장 9절“사바티스모스”란 희랍어 단어는 그 시대의 이교도들과 기독교도들 모두에게 “안식일 준수”(Sabbath Keeping)라는 고유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플루타크, 유스티노스, 애피파니우스 등의 저술가들과 “사도들의 헌법” 같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도 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3 (264.2)
 위의 예들은 모두 희랍어 칠십인역 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다”(출 16:23; 레 23:32, 26:34; 대하 36:21)란 뜻으로 “사바티조”의 동족 동사를 사용한 사례와 일치한다.4 (2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