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4장 안식일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의 순종과 동행한다(갈 5:6). 어느 누구도 믿음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으로 순종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지 않는 구원의 믿음도 없다. 율법주의의 문제는 이 율법들을 저 율법들로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옛 언약이든 새 언약이든 모두 백성들에게 효력 없는 것이 되게 할 뿐이다. (247.3)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계명을 순종하라고 호소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지 율법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심이 아니었다. 율법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추가된 것이다(롬 3:30; 5:13,20; 갈 3:19). 율법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금하는지를 밝힘으로써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로마서 4장에 제시되고 있는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을 믿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보장하고 있다. (248.1)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덕적 행동의 원칙들만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제사 제도의 유형을 통한 구원의 방식도 함께 계시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 올리시어 “율법과 계명”의 두 돌비(출 24:12)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고안된 “장막의 식양”(출 25:9)을 함께 주셨던 것이다. (248.2)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중요한 차이는 율법과 은혜라는 구원의 두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은 그림자이고 새 언약은 실체라는 사실에 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더 뛰어난”(히 8:6) 구속 봉사의 “상징”이다(히 9:9). 따라서 그리스도가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이다”(히 9:26). (248.3)
 옛 언약도 하나님이 믿음을 통한 은혜에 기초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언약이다. 신약성경에서 선포되고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과 꼭 같은 언약이다. 차이가 있다면 옛 언약의 율법은 구세주의 오심을 바라다보는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언약에서는 구세주와 그의 구원의 봉사를 예견하는 약속들과 예언들과 예식들의 준수와 모형들의 그림자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운영되었다. (248.4)
 반면에 새 언약 또는 복음은 율법들이 예견했던 구원의 성취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침례와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과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새 언약은 운영되고 있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태도와 언약의 본질은 율법이나 복음에서 똑같다. (249.1)
 구약성경은 구원과 의로움의 길에 대하여 신약성경과 다른 것을 제시하거나 가르치고 있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의는 “여호와 우리의 의”이다(렘 23:6). 구약성경의 백성들도 히브리서 11장의 주장대로 “믿음”의 백성들이다.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이었다(창 15:6; 롬 4:3; 갈 3:6).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였다(사 45:25).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고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다(롬 1:17; 갈 3:11). (249.2)
 그리스도의 오심의 결과로 옛 언약과 관련된 모든 레위 제사들이 “폐하게 되고”(히 7:18), “없어졌으며”(히 8:13), “철폐되었다”(히 10:9).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절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을 포함한 모세의 율법 전체가 폐기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은 히브리서의 이 구절들이 옛 언약의 제사 제도의 철폐를 언급할 뿐이고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의 원칙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안식일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겨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히 4:9). (249.3)
 (2)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율법과 사랑의 차이인가?
 어떤 사람들은 옛 언약은 율법에 기초하였고 새 언약은 사랑에 기초했다고 주장한다. 십계명을 “증거판”(출 31:18)이라, “언약의 말씀 곧 십계”(출 34:28)라, “증거”(출 40:20)라, “여호와의 언약”(왕상 8:9, 21)이라 일컬었고 또 다른 율법들도 출애굽기나 신명기 중에서 “언약서”(출 24:7) 또는 “율법책”(신 31:26)이라 불렀기 때문에 십계명은 언약이며 율법책들은 이 언약의 해석이나 확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0.1)
 반면에 새로운 언약의 핵심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언약도 새 언약에서처럼 “서로 사랑하라” 하였다. 구약성경의 도처에서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새 언약의 새로운 요소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새 언약의 차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옛 언약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지만 “예수님이 사랑한 것 같이” 라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언약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차별화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사랑의 방식에서 찾지 않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고, 어디서 예배하고, 언제 예배하고, 어떤 옷을 입는가 하는 방식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는가 하는 사랑의 방식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250.2)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그 언약의 표징들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옛 언약으로 들어가는 표징은 할례였으며 이 언약을 상기시키는 표징은 안식일이었는데 새 언약으로 돌아가는 표징은 침례이고 이 언약을 기억하는 표징은 성만찬이라는 것이다.2 (250.3)
 이 주장에 의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결국 몇 개의 표징을 수반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율법으로 축소된다. 이 율법들은 더 좋고 더 못하고의 차이를 가졌을 뿐이다. 옛 언약은 수많은 율법들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 위에 세워졌고,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좀더 단순한 사랑의 율법에 기초한다. 간단히 말하면 옛 언약의 도덕적인 원칙인 십계명은 새 언약에서 그리스도가 주신 단순한 사랑의 원칙에 의하여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251.1)
 그런데 신약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새 언약과 더불어 옛 언약의 계명보다 “더 좋은 계명”을 주시었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리스도께서 그의 율법 안에 나타내신 도덕적 요구를 바꾸시어야 하는가? 왜 그리스도께서 그의 거룩하고 완전한 도덕률을 바꾸시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구약의 율법과 계명을 가리켜 말하기를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롬 7:12)고 외쳤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의 적법성을 당연시하여 말하기를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가 아노라”(딤전 1:8)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의 도덕적 요구를 바꾸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같은 도덕적 요구를 거슬린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롬 4:25, 5:8, 9; 8:1-3).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요 1:29; 고전 5:7) 희생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장차 나타날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키워주고 강화시켰던 모든 희생 제도와 제사 율법을 성취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그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폐하고”(히 7:18), “없어지게 하고”(히 8:13), “철폐한”(히 10:9) 제사의 율법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남겨 놓은”(히 4:9) 안식일의 법이 따로 있다고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251.2)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는 새 언약은 십계명을 좀더 단순하고 좀더 나은 율법으로 교체하는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십계명을 사람의 마음에 내면화하는 언약이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하였다(렘 31:33). (252.1)
 예레미야 31장 33절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율법과 사랑의 차이로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양심에 내면화되지 못함으로써 결국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귀결된 반면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는 내면화에 성공함으로써 율법의 순종으로 귀결되었다는 차이가 지적되고 있다.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하나님의 율법을 내면화하고 있는 새 언약의 신자들에게는 율법을 범하는 일이 어렵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롬 8:2). 그리스도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술 습관을 끊게 하고 흡연 습관을 끊게 하듯이 다른 죄들로부터도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252.2)
 하나님의 율법의 내면화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의 마음에 내면화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적용된다. 실지로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꼭 같은 약속을 교회에게도 제시하고 있다(히 8:10, 10:16). 새 언약에서 율법은 단순화되거나 교체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내면화되고 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하고 율법의 높은 윤리에 일치하여 살게 한다. (252.3)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 율법이 더 이상 상관이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율법의 요구에 일치하는 삶을 살 때 그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이 더 이상 그들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롬 14:10) 율법에 대해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253.1)
 성령은 진공상태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기능은 율법의 기능을 무시하거나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신자를 도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케 한다(갈 5:18, 22, 23).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참으로 율법을 성취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새 생명인 것이다(롬 8:3, 4, 13:10; 갈 5:14). (2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