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4장 안식일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이다
 안식일에 대한 주요 공격의 하나는 안식일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도가 끝나게 된 옛 언약의 한 유물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안식일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주로 십자가를 가지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분리시키고 안식일과 일요일을 분리시키려 한다. 그들은 십계명이 옛 언약의 핵심이고 안식일이 십계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공격함으로써 안식일과 함께 모세의 율법 전체의 합법성을 파괴시키고자 한다. (242.1)
 이들은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사도 시대의 제도라고 내세워 안식일을 공격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로 말미암아 안식일의 약속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폐했다고 안식일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우리에게 별도의 한 날을 주일로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안식일 안식으로 예표된 구원의 안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누릴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242.2)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세대주의파와 새언약파의 주장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두 파는 모두 율법에 기초한 언약과 은혜 위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새 언약의 차별을 강조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을 각각 이스라엘과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두 개의 확실히 구별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하나는 땅과 거기에 사는 백성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과 거기에 사는 백성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목적이다. “땅의 나라는 유대교이고 하늘의 나라는 기독교이다.”1 (242.3)
 간단히 말해서 세대주의자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이스라엘과 교회라고 하는 두 개의 상이한 백성들을 위한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속의 계획을 대표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 두 공동체의 운명은 영원히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하나로 통일한 것을(엡 2:14) 세대주의자들은 다시 유대와 교회 사이에 벽을 쌓아 이 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으려 하고 있다. (243.1)
 그래서 우리는 첫째로 과연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서로 다른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아니면 두 언약이 모두 동일한 도덕적 원칙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연결이 끊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율법과 안식일이 폐했는지 아니면 안식일 계명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원칙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지를 히브리서를 통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243.2)
 1. 옛 언약과 새 언약
 (1) 두 언약에 차이가 있는가
 이른바 “새 언약” 신학의 주장자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장하였다. 옛 언약은 율법들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구원의 언약인 반면에 새 언약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구원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244.1)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안식일은 옛 언약의 율법의 하나이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안식일 준수의 명령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이 그 핵심인 옛 언약은 본질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옛 언약의 문제가 백성들이 언약을 순종할 마음이 없었고(신 31:16-21,27-29), 또 언약을 믿지도 않았다(히 3:19)는 사실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옛 언약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이들은 옛 언약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반응 방식에 옛 언약의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244.2)
 이들은 새 언약이 “더 좋은 약속”(히 8:6)에 기초했기 때문에 옛 언약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의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믿음과 약속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내산에서 추가된 율법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폐지되었으며 폐지된 율법 대신에 새 율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은 셈이 되는 것이다. (244.3)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준수가 구원의 기초였던 것이 아니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반응을 대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폐하고 단절된 것은 예식적 율법의 전통이지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이 아니다(고전 7:19). 우리는 특히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폐하게 된 레위 법들(히 7:18; 10:9)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뒤에 남겨진” 안식일 준수(히 4:9)가 분명히 구별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244.4)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의 때나 신약의 때에 구별 없이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구약 시대에도 구원은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받아주심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율법의 순종을 통하여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지속시키는 일이었다. 언약 관계의 지속은 율법의 순종에 기초하였다. 레위기 18장 5절에서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였다. 이 구절에서 약속된 생명은 하나님과의 친교 안에서 평화스럽고 풍요스럽게 즐기는 현세적인 생명이다.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원칙과 일치하는 삶을 살 때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45.1)
 시내산 언약: 율법과 은혜
 이른바 “새 언약” 신학의 또 다른 문제는 이들이 시내산의 언약도 새 언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실 구원의 계획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출 3:7-10,16).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출 3:10)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요구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마 12:7).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신약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은혜의 구원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전자는 후자의 모형이다. (245.2)
 “새 언약”의 주장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 . .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0, 31)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언약의 계획을 제시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셨다. (246.1)
 이 말들은 모두 하나님이 순전히 은혜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무 공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신 9:4,5)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신 7:6ff)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 (246.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 민족들로부터 분리시키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에게만 소속하게 하셨다.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 인도하였다”(출 19:4)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의 언약을 통하여 그들을 율법의 원칙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예배공동체가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속하게 하고자 하셨다. 시내산 언약에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이같은 계획은 궁극적으로 모형이 원형을 만나는 십자가의 사건에서 실현되었다. (246.3)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의 경험에서 이끌어낸 정서적 표현으로 시내산의 언약을 호소하였다. 이스라엘은 양이고 하나님은 그 목자이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이고 하나님은 포도나무 관리자이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들이고 하나님은 그 아버지이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신부이고 하나님은 신랑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시내산 언약을 사랑의 만남으로 만들고 있다(에스겔 16장 6-14절은 좋은 실례의 하나이다). 시내산의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과 사람의 순종의 사랑이 서로 만나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이스라엘의 옛 언약에 무엇인가 큰 결함이 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247.1)
 믿음이 전부가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시내산 언약에서 요구된 순종은 구원의 수단으로서 요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조치에 대한 사랑의 응답으로 요구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신구약 중간시대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율법을 구원의 유일한 보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화되었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만을 구원의 기초로 생각하는 경향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2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