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4 장 구주와 안식일 제 2 부 신약에 있는 안식일과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에서 안식일 준수에 대한 이러한 확장된 해석은 분명히 그날의 준수에 대한 지나친 유물론적인 이해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떼어놓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안식일의 쉼으로 말미암아 고려되는 축복의 영구성을 재 확신시키기 위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축복들의 본질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히 4:3)에게 주시는 현재의 구원의 쉼과 미래의 회복의 쉼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105.4)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남아 있는 안식일 준수는 일곱째 날에 육체적인 일로부터의 중지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 곧 “오늘” 예라고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칼 발트가 웅변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안식일에 쉬는 행위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처음과 나중의 말씀이 되도록 허용하기 위해”78) 구원을 성취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105.5)
 안식일의 쉼에 대한 히브리서의 해석은 일찍 우리가 복음서에서 발견한 그 날에 대한 구속적인 이해를 주로 반영한다. 기대했던 안식의 “해방”(눅 4:18)과 “쉼”(마 11:28)을 주시기 위해 오셔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늘날”(히 4:7, 9)도 유효한 “안식일의 쉼”의 핵심을 제시한다. 유사하게, 최종적인 안식일의 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와 그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요 5:17)는 그리스도의 확신이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히 4:1)는 권고에서 반사되고 있다 (105.6)
 히브리서 4장이 안식일의 복음적인 이해를 지상의 순례가 끝날 때 완전히 실현될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식일이 사도교회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랑을 축하하는 시간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5.7)
 5. 안식일 준수의 방법
 신약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봉사로부터 이끌어 온 확장된 구속의 의미의 빛에서 어떻게 안식일을 준수했는가? 먼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거행되는 안식일 예배에 참석했다(행 13:14, 43, 44; 17:2; 18:4). 그러나 점차,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예배 장소를 세웠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저희 회당”(마 12:9)에 들어가시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분리의 과정이 이미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저희(their)라는 대명사를 통해서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마태 공동체가 더 이상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그들은 그때 예배를 위한 자신들의 장소를 마련했었을 것이다. (105.8)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공동체들 사이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차이점이 표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있었다. 복음서들에서 보고된 다양한 안식일의 상황들은 그리스도인 회중들과 유대인 회당들 사이에 계속적인 논란이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 장소가 바로 길 건너에 있었다는 것도 반영한다. 논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께서 보이신 모본의 빛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에 주로 모아졌다. 그 날이 근본적으로 “제사,” 즉 안식일 율법의 외형적인 성취로서 준수되었는가? 아니면 안식일이 “자비,” 즉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고 선을 행하는 날로서 준수되었는가?(마 12:7) (105.9)
 선을 행하는 날
 안식일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므로 메시야의 구속을 기념하기 위한 날로서 준수하는 그리스도인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해서, 전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치심과 모본에 호소한다. 예를 들어, 불구 여인을 치유하신 일에서, 누가는 안식일 준수의 두 다른 개념들 즉 율법사와 그리스도를 대조한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백성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순종해야하는 율법들로 이루어져 있다(눅 13:14).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신체적인 자유와 영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는 날이었다(눅 13:12, 16). (106.1)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사의 오해에 대해 안식일에 짐승에게 물을 먹이는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호소하므로 도전하셨다. 만일 짐승의 매일의 필요가 안식일에 채워질진대, 하물며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6). (106.2)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인도주의적인 이해가 세 복음서에서 보고된, 손 마른 사람의 치유의 이야기에서도 표현된다(막 3:1-6; 마 12:9-14; 눅 6:6-11).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눅 6:9)라고 원칙적인 질문을 하시므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는 것의 합법성에 대해 시험하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논박하셨다. (106.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둘 다에서, 그리스도께서 질문에 사용된 치료하다(to healtherapeuein)라는 동사를 선을 행하다”("to do good"—agathopoiein)와 구하다(to save,”sozein)라는 동사로 대용하셨다. 이러한 변경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관심이 안식일 계명의 의도 속에는 한 형태의 자선 행위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선 행위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대한 그러한 넓은 해석은 랍비가 허용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음을 발견한다. (106.4)
 자선 봉사의 날
 마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준수의 원칙을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 12)라며 분명한 예증을 담고 있는 두 번째의 질문을 더하시므로 자선 봉사를 행하는 날로 예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칙적인 질문과 그에 따른 모든 예화들을 통해서, 안식일의 본래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베풀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안식일에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신자는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으로 이동해 간다. (106.5)
 그리스도를 참소 하는 자들은, 안식일에 다른 사람들의 신체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에 관심을 보이는데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이해하고 경험하는데 부족함이 있음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구원의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축하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결점을 찾아 그를 죽이기 위한 방안을 찾으므로 파괴적인 일에 가담하였다(막 3:2-6). (106.6)
 안식일을 수동적인 태만의 시간으로보다는 오히려 필요한 영혼들에게 적극적인 사랑의 봉사를 행하는 시간으로 보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적인 이해는 현대의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Epistle to Diognetus)으로 알려진 초기의 문서(A.D. 130-220 사이의 문서임)에서도 증명된다. 이 문서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분[하나님]께서는 우리[그리스도인]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을 금하셨다.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 라고 주장하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 말하는”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79) 안식일 준수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이고도 인도주의적인 이해는, 복음서에서 제시된, 안식일의 구속의 표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