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4 장 구주와 안식일 제 2 부 신약에 있는 안식일과 구세주
 이러한 논증 가운데 어떤 것 하나도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그 첫 번째 논증은 편지의 수신자들(이방인이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의 예전(안식일은 주요한 부분임)에 너무도 매력을 가진 나머지 저자에게 있어서는 그 날의 실제적인 준수에 대해서 논하거나 아니면 권면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로 돌아가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73) 실제로 필요로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의 빛에서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102.5)
 두 번째 논증과 관련하여,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안식일의 쉼이 근본적으로 현재의 안식일 준수와는 관련이 없고 다만 미래의 유익을 위해 보여진 것으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있는”(히 4:9) 안식일의 쉼은 본래 “믿어온 자들이 들어가는(히 4:3) 현재의 경험으로 제시되어 있다. (102.6)
 “들어가는”(히 4:3)이란 동사는 현재 시제이며, 헬라어에서는 이 “쉼”의 경험을 현재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문장에 첫째로 놓고 있다. 이것은 “남아있다”(히 4:9)라는 동사에서도 사실이다. 만일 문맥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미래의 전망을 함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현재의 문맥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안식일의 쉼에 현재적인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호수아 당시(히 4:8)로 돌아가서 언급한다. (102.7)
 폐지냐? 아니면 남아 있느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쉼이 구약의 그림자나 또는 표상으로 남아 있어, 결과적으로, 그 안식일의 기능이 그분의 오심으로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세 번째 논증으로 인도한다. (102.8)
 히브리서는 안식일이, 성전이나 그곳에서의 봉사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기능이 끝났는가? 아니면 안식일은 그분의 오심으로 신선한 의미와 기능을 얻었는가? 복음서의 안식일 자료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께서 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메시야의 안식일 쉼을, 그 날의 실제적인 준수를 무효화하심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을 경험하고 나누는 시간으로 만드시므로 성취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102.9)
 이점에 있어서 히브리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도록 하자. 저자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오심이 옛 언약의 희생 제도의 “결정적인 단절”을 가져 온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7장에서 10장 사이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과 계속되는 하늘에서의 봉사가 어떻게 레위 제사장 봉사와 성소에서 표상적인 봉사(“모형과 그림자”- 히8:5)를 완전하게 대치시키셨는지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봉사들을 그리스도께서는 “폐하셨다”(히 8:13).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안식일도 폐하여질 옛 언약의 제도 중 하나로 보면서 그들과 같은 범주에 놓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으나, 그 구절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거의 그러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103.1)
 사바티스모스—안식일의 쉼”은 분명히 강조하여 제시되기를, 성전과 그곳에서의 봉사와 같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히 4:9)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제3장에서 “남아있다—아포레이페타이[apoleipetai]”라는 동사가 문자적으로 “뒤에 남겨져 있다”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현재 수동태 시제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4:9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남겨져있다.” (103.2)
 안식일과 성소 봉사 사이의 대조는 분명하다. 후자는 “폐하여진” 반면에, 전자는 “남아 있으므로” 따라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와 유사한 대조가 마태복음에서도 발견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마 27:51)과 관련을 맺고 있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성전봉사의 종결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예루살렘 도성으로부터 도망할 때가 안식일일 가능성(마 24:20)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는 그날의 준수의 영속성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103.3)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는 11절에 주어진 권고는 안식일의 영속성에 대한 부가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사람들이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은 안식일의 “쉼”의 경험이 현재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실현되는 것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쉼의 경험을 나타내고 있다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견해는 우리가 이미 구약에서와 그리고 후기의 유대인 문헌에서 발견한 것들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사회적인 부당함으로부터의 개인적인 쉼과 해방을 현재 경험할 뿐만 아니라 메시야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할 미래의 쉼과 평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그 자신의 방식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신선한 그리스도인 배경에서 안식일에 대한 구약적인 이해가, 미래에 있을 하늘 가나안에서의 최종적인 쉼을 바라보는 한편 구원의 현재적 쉼을 경험하는 날로 재확인한다. (103.4)
 문자적인 준수인가 영적인 준수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여전히 중요한 “안식일의 쉼”(4:9)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저자는 안식일 준수의 문자적 준수와 영적인 표상으로서의 준수 중 어느 것을 고려하고 있는가? 그 구절은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지지하는 두 중요한 암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제3장에서 어느 정도 논의를 했기 때문에, 단지 그것들을 이 문맥에서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03.5)
 첫 암시는 히브리서 4:9에서 발견되는 사바티스모스-안식일 준수”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비록 그 용어가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4:9에서만 나타나지만, 그 용어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로서 세속적인 문헌들과 그리스도인 문헌에서 사용되고 있다.74) 결론적으로, 9절에서 사용된 사바티스모스-안식일 준수”의 용례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한다.75) (103.6)
 두 번째 암시는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라는 구절에서 발견되며, 일로부터의 정지로 묘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주석자들은 히브리서 4:10의 일로부터의 중단을 표상적인 의미에서 죄악적인 활동을 의미하는76) “비굴한 일로부터의 자제”로 해석해 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준수는 매일의 일을 그만두고 일곱째 날에 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죄악적인 행위로부터의 자제를 의미하고 있다. (104.1)
 그들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죽은 행실”(히 6:1; 9:14)로 언급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말씀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하나님의 중단과 인간의 중단 사이를 대조하고 있는 히브리서 4:10 말씀에서는 읽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악의 행실”로부터 쉬셨다고 생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될 것이다. 제3장에서 지적된 대로, 분석하고 있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의 일로부터 쉬신 것처럼, 단순하게 신자들도 그 동일한 날에 자신들의 일로부터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일로부터의 중단을 포함하고 있는 단순한 안식일 준수의 본질을 제시한 것이다. (104.2)
 안식일 준수의 의미
 히브리서의 저자는 단지 자신의 독자들에게 안식일에 자신들이 하고 있는 세속적인 일을 중단하도록 권고하고 있는가? 저자의 관심이 자신의 독자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유대인의 예전적인 관습들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성을 억제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 저자는 안식일 준수의 물리적인 “정지”(cessation)만을 강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면은 단지 기존의 유대주의적인 경향성을 유지하도록 용기를 주므로 부정적인 사상만을 갖도록 한다. 따라서 분명히, 저자는 안식일의 행위에 대한 더욱 깊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104.3)
 그 깊은 의미는 “불신”(unbelief-apeitheias) 곧 불순종의 믿음 없는 결과로 인해 하나님의 쉼에 들어가는데 실패한 사람들(히 4:6, 11)과 “믿음”(faith-pistei), 즉 순종의 결과인 신실성으로 말미암아(히 4:2, 3)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대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05.1)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쉬는 행위는 단순한 통상적인 의식(“제사”--마 12:7 참조)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이다. 그러한 반응은 사람의 마음을 강팍케 하는 것이 아니라(히 4:7) “그의 음성을 들”(히 4:7)을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쉼을 행위(works)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믿음(faith)으로, 행함으로(doing)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므로(being)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히 4:2, 3, 11). 안식일에 대해서, 죤 칼빈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허락하기 위해서 그들의 일을 쉬어야 한다.”77) (105.2)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있는 안식일의 쉼(4:9)은 단순히 지루한 하루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믿음으로 자유롭게 경험하기 위해 일의 걱정으로부터 스스로가 자유롭게 되므로 하나님의 쉼에 들어가기 위해 매 주일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히 4:11)고 권고한 이후, 구원의 축복에 대한 안식일의 경험은 현재에 소멸된 것이 아니다. 미래에 있을 이러한 안식일의 쉼의 국면은 히브리서에 있는 안식일의 준수가 구원의 현재적인 경험과 하늘 가나안에서의 종말론적인 완성 사이에 있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