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4 장 구주와 안식일 제 2 부 신약에 있는 안식일과 구세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손 마른 자가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그곳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 자신이 회당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회당에 예배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기”(막 3:2)위해 왔다. 마태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질문하기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0)고 질문하고 있다. 그들의 질문은 환자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 의해서 동기가 유발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이 어떻게 치료 봉사와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탐구하기를 원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랍비의 궤변에 의해 예견된 모든 예외 규정들을 알고 있는 권위 있는 자들로서 그들의 세부 규정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심판하고자 그곳에 있었다. (97.2)
 그들의 생각을 읽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막 3:5)하신다. 그분께서는 도전을 수용하시고 그리고 그 도전을 공정하게 정면으로 대하신다. 첫째, 그는 그 앞으로 오도록 사람을 초청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리로 오라”(막 3:3)고 하신다. 이 단계는 아마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해서 알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듯하다. 그제서야 그분께서는 율법의 전문가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물으신다. 마태에 따르면, 이 질문을 예리한 초점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비유의 말씀 형태에서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 12)라는 두 번째의 질문을 부가하신다. (97.3)
 이 질문들은 중요한 문제를 부각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예증을 담고 있는 두 번째의 질문을 보여주신 원칙에 관한 질문을 하므로, 그분께서는 안식일의 명령을 완전히 폐지하시려고 의도하셨는가? 아니면 그분께서 그 안식일의 본래의 신적인 가치와 기능을 가진 제도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를 선택하는데 동의한다. 예를 들어, 레오날드 고펠트(Leonard Goppelt)는 강조하여 진술하기를 “예수의 이중 질문은 안식일 계명의 끝을 표징 한다: 그것은 더 이상 법으로 정해진 조령이 아니며, 또한 그것은 비록 모든 것을 총 망라하고 중첩되는 선택 사항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유효하지만 더 이상 절대적인 유효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제시한다.63) (97.4)
 이러한 해석은 “생명을 구하는 것”은 안식일의 정신과 기능에 반대된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이것이 진리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안식일 계명의 본래 목적이 아니라, 아마도 안식일에 대한 편만한 오해와 오용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제정하셨을 때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는데 실패한 죄를 하나님께 돌리도록 해야 한다. (97.5)
 안식일: 관심을 보이는 날
 안식일의 본래의 목적과 관련 제도들은 이웃, 특히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안식일 계명에 대한 다양한 역본들에서, 안식일에 쉴 자유를 승인 받은 사람들에 대한 목록들이 나타난다. 특별히 선정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종들, 여종들, 여종의 자녀들, 가축들, 여행자들, 또는 외국인들이다. 이것은 안식일이 특별히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 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 (97.6)
 닐즈—에릭 앤드리어슨(Niels—Erik Andreasen)은 적절하게 주석 하기를, “땅 주인은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가치에 관심을 두기를, 마치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64)고 한다. 그것은 심지어 안식일이 가축에 대해서조차도 관심을 두도록 고안된 것으로 실제로 옮겨간다. 그러나 한스 왈트 울프(Hans Walter Wolf)는 “그것은 모든 매여 있는 노동자들, 여종의 자식들과 외국인을 특별히 지정한 것에 대해서 더 큰 감명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일하도록 명령을 받는다면, 그들은 전혀 의지하거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65)라고 지적한다. (98.1)
 동료들에 대해 관심과 동정을 보여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날로서의 안식일의 본래의 국면은 예수께서 계실 당시에는 거의 잊혀졌다. 안식일은 그날에 올바로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가난한 인간들의 부르짖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날이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러한 편만한 곡해에 대한 적절한 예를 두 종류의 안식일 준수자들을 대조시키므로 마련한다. 한편에는 참소 자들의 “완악 함을 근심하시면서”(막 3:4, 5) 불쌍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가가시는 그리스도를 세웠다. 다른 한편에는, 비록 예배의 장소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안식일 시간을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그의 잘못들을 찾고 또 그를 죽일 방법들을 생각하는데 바치고 있었던 율법의 전문가들을 세웠다(막 3:2, 6). 이러한 자세들의 대조는 안식일에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의 합법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잘 마련하고 있다(막 3:4). 안식일에 다른 사람들의 육체적인 구원과 영적인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파괴적인 노력과 자세에 가담하게 된다. (98.2)
 안식일 개혁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획은 율법에 대한 그분의 전반적인 자세에 대한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자신의 사명은 다양한 규정들로부터 율법의 본래의 의도를 회복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마 5:17, 21). 그 계명들 배후에 있는 의도를 분명히 하는 이 일은 축척된 전통들이 여러 경우에서 그 율법의 본래의 기능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에 더욱 급박하게 절실히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막 7:9)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회복의 중요성을 제시하신다. (98.3)
 예컨대, 사람에게 “네 아비와 어미를 공경하라”(막 7:12, 13)고 명하는 다섯째 계명은, 그리스도에 따르면, 코르반(Corban, 막 7:12, 13)의 전통으로 폐하여졌다. 이 행위는 자신의 부모에게 돌려야 하는 봉사나 책임을 성전에 바치는 선물로 바꾸는 것으로 담고 있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은, 많은 무의미한 궤변적인 제약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창조주이시며 구속 주이신 분을 사랑하고 자신의 동료들을 사랑하는 시간으로보다는 자신의 의를 위한 제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98.4)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계명의 의도를 분명히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 축제로 말미암아 고양된 메시야의 회복을 어떻게 성취시키셨는지를 실증해 보이셨다.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행된 이러한 의도적인 치유 행위는 구세주의 쉼과 안식일 사이에 있는 관계를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98.5)
 요약하자면,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의 쉼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쉼을 주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태에 의해서 보고된 두 안식일 에피소드들은 안식일의 쉼의 의미를, 첫째는 자비에 대한 말씀들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수행된 안식일 봉사를 통한 메시야의 구속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안식일에 양을 구출하는 것과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키시는 것의 예를 통한 메시야의 회복으로 안식일의 쉼의 의미를 분명히 하신다. 이러한 안식일에 대한 구속적인 이해와 메시야적인 이해의 빛에서, 전반적으로 안식일이 어떻게 마태 공동체와 사도교회에서 준수되었는가? 이 질문은 사도교회에서 안식일 준수의 방법을 다루는 본 장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99.1)
 3. 요한복음에 나타난 안식일
 요한복음에는, 안식일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사이의 관계가 안식일 두 기적들인 중풍병자의 치유(요 5:1-18)와 소경의 치유(요 9:1-41)에서 제시되어 있다. 그 두 이야기는 실제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함께 다루도록 한다. 치유를 받은 두 사람은 장기적으로 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들로서, 한 사람은 38년간이었고(요 5:5),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이었다(요 9:2). 이 두 경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행동하기를 명하셨다. 중풍병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말씀하셨으며, 소경에게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 9:7)고 말씀하셨다. 이 두 행위는 랍비의 안식일 법을 깨뜨리는 것을 나타내며, 따라서 이 두 행위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안식일을 파괴하는 책임이 그리스도께 있다는데 이용되었다(요 5:10, 16; 9:14-16). 이 두 경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구속 사업이 안식일 계명에 의해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이 고려되고 있다고 반박하신다(요 5:17; 7:23; 9:4). 특히 그리스도의 칭의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인상적인 진술을 통해서 표현된다. (99.2)
 안식일의 부정이냐 확증이냐?
 그리스도께서 공식적으로 안식일을 파괴하는 자라는 책임증가를 받으실 때 자신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을 옹호하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분께서 자신의 아버지의 예를 사용하신 것이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의 안식일 준수의 의무를 파기하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그 날의 참 본질과 뜻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였는가? 그것을 함께 놓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진술이 안식일 법의 부정(negation)인가? 아니면 분명히 하는 것(clarification)인가? (99.3)
 앞서 한 연구에서 본인은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까지 일하시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해석: 즉

 1) 지속적인 창조,

 2) 지속적인 돌봄, 그리고

 3) 구속적인 행위 등으로 수용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66)

 이러한 세 견해의 주석가들은 그리스도의 선언이 안식일 계명의 분명한 폐지라는데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결론은 그 구절의 합법적인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구절을 독단적인 가정을 가지고 읽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까지”(until now: heos arti)라는 부사의 역할과 “일한다”(is working: ergazetai)라는 동사의 역할과 그 구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간략하게 점검해야 한다. (99.4)
 “이제까지” 부사
 전통적으로 “이제까지”라는 부사구는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법을 무시하거나 무효화하시고 계속해서 일하시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그것이 창조이든지, 보존이든지, 또는 구속이든지). 그러나 부사 그 자체(“까지”)가, 특히 헬라어에서는 동사 앞에 놓여 강조하는 위치에 있을 때는 계속성(constancy)이 아니라 완성(culmination)을 전제로 한다. 후자는 어떤 번역가들에 의해 “이제까지”라는 강조형 용례를 통해서 이끌어 낸 것이다.67) (99.5)
 이 부사구는 시작(terminus a quo)과 (terminus ad quem)을 예상한다. 전자는 분명히 첫 창조의 안식일(창 2:2, 3)을 말하고, 후자는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선언된 비슷한 안식일로 보여진 마지막 안식일의 쉼이다. 그 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창조의 마지막에 놓으셨지만 죄로 인해서 그분께서는 약속된 안식일의 쉼이 결실을 보도록 “지금까지” 일해 오셨다.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