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4 장 구주와 안식일 제 2 부 신약에 있는 안식일과 구세주
 두 번째의 치료는 시몬의 집에서의 종교적인 모임이 있은 직후에 수반되었으며, 시몬의 장모의 신체적인 회복을 가져왔다(눅 4:38-39; 막 1:29-31). 후자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므로”(눅 4:39) 전 가족에게 봉사기쁨을 가져왔다. 이 첫 번째의 치료에서 시발 형태로 제시되는 예배와 기쁨, 그리고 봉사의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봉사에서 분명히 안식일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91.5)
 불구의 여인
 누가복음에서만 보고되고 있는 꼬부라진 여인의 치료는, 안식일과 구세주의 봉사 사이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이 간략한 대화에서(눅 13:10-17), 통상적으로 “자유롭게되다, 풀리다, 놓이다”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인 루에인(luein)은 의도적이기보다는 우연한 용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세 번이나 주님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91.6)
 첫 번째는, 그 단어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눅 13:12, 이탤릭체 주의)라고 제시하신 데서 사용되고 있다. 그 동사는 두 번씩이나 다시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당장의 분노에 반응하여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5, 16, 이탤릭체 주의)라고 책망하시는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다. (91.7)
 작은 부분에서 큰 부분에 이르는 논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곡해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일 목적으로 합법적으로 안식일에 풀 수 있었으나(아마도 물이 없는 날에는 체중의 감량이나 시장에서 값이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여인은 그날에도 자신의 육체적 영적인 허약함의 족쇄로부터 풀려날 수가 없었다. (91.8)
 그리스도께서는 그 날을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당시에 편만한 몰이해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대하여 행동하셨다. 다른 안식일에 하신 치료와 마찬가지로 이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명령의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고 계시며, 오히려 그분께서는 누적된 전통이나 숫한 규정들로 인해 어두워졌던 그 날의 참 가치에 대해 논쟁하셨다. (92.1)
 안식일의 구속
 안식일에 사단의 속박에 묶여져 있는 희생자를 풀어 주는 착상(눅 13:16)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 눌린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기”(눅 4:18, 이탤릭체 강조함) 위한 자신의 사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언을 회상하게 한다. 육체적 영적 속박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해방시키신 예수의 행위가 안식일에 의해 표상 된 메시야의 해방이 성취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예시하고 있는가?(눅 4:21). (92.2)
 예를 들어, 안식일의 구속적인 표상과 안식일에 예수의 치유 사이의 관계가 폴 제웨트에 의해서 올바로 관찰된 다음의 진술에 의해서 이해되고 있다. “우리는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의 치유에서 사랑, 동정, 그리고 자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참 ‘안식일의 행위들,’ 곧 구약의 안식일의 쉼의 성취인 메시야의 안식일이 세상으로 들어 온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든 날 중에서 안식일은 치유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날인 것이다.”46) (92.3)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약의 안식일이 성취된 것은, 같은 저자가 논증한 것처럼,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 . 첫째 날에 모이기 위해서 안식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47)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구속적인 표상을 성취하시므로 그 날을 그분의 구속적인 사명을 기억하는데 적절한 날로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안식일 치유의 구속적인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기 위해서 그분께서 마련하시는 영적인 봉사에서 볼 수 있다(막 1:25; 2:5; 눅 13:16; 요 5:14; 9:38). (92.4)
 불구의 몸을 가진 그 여인과 같은 사람을 치료하신 행위는 단순한 사랑과 동정의 행위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의해서 표상 되고 약속된 메시야의 구속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봉사를 통해서 성취되어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참 안식일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안식일 봉사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모든 백성들에게는, 그 날이 그들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치유와,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구세주 안에 있는 자유로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92.5)
 어떤 학자들은, 안식일에 여물통으로부터 물을 마시울 목적으로 소나 나귀를 풀어주는 것과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한 여인을 해방시키는 것과의 사이에 있는 대조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자비의 사역을 위해 특별히 적합한 날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해석을 거절한다. 그들은 짐승을 풀어 물을 먹이는 일이 안식일과 상관없이 매일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는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행되었다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48) (92.6)
 그런 논증은 적어도 두 가지 사실에 의해서 부족함을 드러낸다. 그 첫째는, 짐승도 분명히 안식일의 축복 가운데 포함되기 때문이다(“너의 소나 나귀나 육축도”--신 5:14; 출 20:10 참조). 따라서 비록 말 못하는 육축들에게 조차도 친절을 배푸신 일이 특별히 안식일에 있었다.49)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는 치유가 “안식일”(눅 13:14)에 보다는 “엿새 동안에”있어야 한다는 회당장의 논쟁은 분명히 반대가 되며, 즉 그 여인은 “안식일에”(16절) 그가 매여 있는 속박으로부터 마땅히 풀려나야 한다며 도전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치료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날이 그 일을 행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었기 때문이다.50) (92.7)
 구세주께서 안식일에 그 아픈 여인에게 주신 신체적이고도 육체적인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해방이 그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a token)로 제시된다(눅 4:18-21). 더 나아가 이러한 안식일의 구속적인 의미는 앞으로 연구하겠지만 다른 경우에서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중재를 목격하고 경험한 그 여인과 백성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보았을까? 라고 질문할 수 있다. 누가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했으며, 온 무리는 기뻐하였으며”(눅 13:17), 그 여인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눅 13:13)고 보고한다. 의심 없이, 그리스도의 안식일의 봉사로 말미암아 치유를 받은 그 여인과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그들의 육체와 영혼의 치유와, 또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구세주의 자유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93.1)
 2. 마태복음에 있는 안식일
 구세주의 안식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의 거의 절반에서는 어떤 안식일 에피소드도 소개하지 않는다. 그 후에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쉼에 대한 제시에서 시간적으로 두 안식일(마 12:1-14)을 다음과 같이 관련을 시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구주의 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넓고 또 직접적인 문맥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93.2)
 더 넓은 문맥에서, 자신의 쉼에 대해 제시한 예수의 이야기들은 거절이나 또는 반대: 즉 침례 요한의 의심(11:1-6), 불신 세대와(11:7-19), 갈릴리 도시들에서의 반대(11:20-24), 바리새인들의 음모(12:14), 예수의 이유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거절(12:22-37), 불신 세대에 대한 책망(12:38-45), 그리고 자신의 친척들로부터의 오해(12:46-50) 등 여러 이야기들 사이에 끼여 있다. 흔치 않는 반대와 오해의 배경에서, 예수께서는 자신 스스로를 “아버지를” “알고” “나타내는” “아들”(11:27)로 선언하므로 자신의 메시야적 신원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메시야적인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의해 표상 된 메시야의 쉼을 제시하셨다(11:28-30). (93.3)
 우리는 이미 구약 시대의 안식일의 쉼이 메시야의 구속에 대한 소망을 고양시키기 위해 이바지한 것을 보았다. 메시야의 시대는 “영생 안에서의 전적인 안식일과 쉼”51)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안식일 쉼에 대한 기존의 메시야를 이해하는 빛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메시야로서 한 연설 직후 자신의 쉼을 제시하므로 메시야가 가져다주기를 기대했던, 즉 안식일에 의해 표상 된 평화와 쉼을 제공하므로 자신이 메시야라는 주장을 구체화시키시려고 의도하셨다.52) (93.4)
 구세주의 쉼과 안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