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5 장. 안식일:구속의 기쁜 소식 II.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들
 유대교와 초대 기독교 사이의 충돌은 불행하게도 단순히 율법주의적인 경건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내면적인 의도에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실로 고매한 유대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우고 말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포들을 사랑하였으며 나중에는 이 무리들 속에서 메시야를 그들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수 만 명”(행 21:20; 2:41; 4:4)이나 나왔다.95 그러나 율법을 너무나 지엽적인 견지에서 다루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멍에로 느끼게 만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존재 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웠다”(마 23:4). 이같은 가르침이 짐진 영혼들에게 쉼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쉼을 빼앗는 째째한 율법주의를 조장시켰다. (143.5)
 그리스도는 새로운 모세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와 같이 그릇된 이해와 관습들을 논박하고 또 당신의 가르침과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셨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멍에”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의 멍에처럼 “무겁지”가 않고, “쉽고”, “가볍다”(마 11:30). 왜 그런가?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구세주께서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어떤 새로운 규칙들을 제시하고 그 준수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의 참된 해석자이시며 실현자이신 당신 자신에게 헌신하도록 호소했다는 데에 있다. 그분은 “네게로 와서 ∙∙∙ 나를 배우라”(마 11:28~29)고 하신다. 율법들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눅 23:27; 요 5:39) 그분은 당신의 사명과의 관계 속에서 율법들의 의미와 기능을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훈의 “멍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원의 쉼을 경험토록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쉼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44.1)
 새로운 규칙인가? 새로운 쉼인가?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당신의 쉼을 제공하여 이로써 안식일 계명을 무효화시키거나 또는 대체시키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쉼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쉼의 빛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분석했던 여러개의 안식일 일화들이 이러한 주장을 뒷바침해 주고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예수님은 고대해온 안식일의 구속을 실현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안식일에 선언하셨다(눅 4:16~21). (144.2)
 그리스도는 당신의 봉사활동의 과정에서 핍절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사단에 메인” 영혼들이 안식일을 자신들의 해방의 날로 경험하고 기억하도록(눅 13:16) 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일을 함으로써 그같은 주장을 실증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당신의 지상 봉사를 다 마치고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신 날도 금요일 오후였으며 그 다음 날인 안식일에는 무덤에서 쉬셨던 것이다(막 15:42, 46; 눅 23:53~54). 창조의 완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속의 완성도 안식일의 쉼에 의하여 명시되고 있다.96 (144.3)
 안식일의 이같은 의미는 마태가 그리스도의 쉼의 제공(마 11:28-29)과 연관하여 소개시키고 있는 두개의 안식일 일화들(마 11:28, 29)97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마 12:1~14). 이 두개의 일화에서 제기된 문제는 “어떤 일이 안식일에 합당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마 12:2, 10). 이 두 이야기를 미루어 볼 때 바리새 인들은 안식일의 쉼을 압제적인 부담으로 만들고 만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마 12:8) 안식일의 계명을 계율적인 광적 신앙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자비”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마 12:7).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에 관한 첫번째의 일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봉사는 물론 제자들의 봉사를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행하는 구속적인 봉사와 일치시키고 있음을 보았다(마 12:6), 손 마른 사람과 관련된 두번째의 일화에서 그리스도는 “선을 행하고”(마 12:12~13), “생명을 구하는”(막 3:4) 날로서의 “안식일”의 가치를 분명히 했다. (144.4)
 일면 생각해 보면 이 두개의 일화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관념 속에 있는 두개의 관련 영역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겠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경험하는 시간으로서의 안식일이요 둘째는 인간의 필요에 응답함으로써 받은 바 축복을 나누어 주는 시간으로서의 안식일이다. 요구된 규칙들을 모두 실행함으로써 자기 힘으로 안식을 획득하려는 헛된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제공하려는 “안식일의 쉼”은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에 대한 좀 더 새롭거나 좀 더 단순화된 일련의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그리고 그 날을 통하여 구원의 평화와 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144.5)
 7. 히브리서(書)의 안식일
 우리가 복음서에서 발견한 안식일의 구속적인 의미는 히브리서(書)에서도 나타나 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히브리서의 기자는 안식일 안식에 대한 기존의 종말론적 이해의 바탕에 서서 하나님이 창조(히 4:4)의 제칠일에 취하신 안식일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모든 안식과 평화에 연관시키고 있다. 히브리서(書) 기자는 창세기 2장 2절시편 95편 7, 11절을 하나로 묶어98 하나님이 창조의 시기에 약속하신 신령한 안식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에 정착함으로써 모두 충족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시 “오랜 후에” 다윗을 통하여 당신의 안식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7; cf. 시 95:7).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안식일의 쉼은 그 충분한 실현의 시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이제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그 실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히 4:9).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하나님의 창조의 “제칠일”에 약속하신(히 4:4) 안식의 기쁜 소식을 경험키(4:3, 10, 11)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45.1)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인가? 아니면 비유적인 준수인가? 히브리서의 수신자(受信者)들은 안식일의 실제적인 준수와 이해를 밝힌 이같은 귀절로부터 어떠한 추론(推論)을 끌어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주석자들의 입장은 이 귀절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지로 안식일을 지켰다거나 또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안식일 준수에 기독교적 해석을 부여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145.2)
 이같은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세가지 이유들이 제기되어 있다. 첫째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안식일의 실제적인 준수의 문제를 논의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쉼의 영속성과 또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한 안식일의 쉼의 실현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의 문자적인 준수에 관한 추론은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리는 안식일 안식”(히 4:9)의 실현 시기는 미래99이기 때문에98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라는 권고(히 4:10, 11)는 안식일의 현재적 준수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옛 언약(계약) 제도들의 일부가 “낡아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히 8:13; 7:11~19, 28) 안식일 제도 역시 필시 과거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100 (145.3)
 이러한 이유들은 여러가지 결함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 이유는 히브리서의 수신자(受信者)들(유대 기독교인들이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건 막론하고)101 이 유대교의 종교 의식에 너무 깊이 빠져있는 자들이어서102 (안식일은 이러한 의식 중에서도 기본적인 것이었다) 히브리서의 기자로서는 안식일의 실제적인 준수를 권장하는 논의가 전혀 불필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식치 못하고 있다. 유대교의 전통으로 되돌아 가려는 유혹에 빠져있는 그 그리스도인들이 실지로 필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도래라고 하는 사건과의 관련 속에서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히브리서의 기자가 의도했던 것이기도 했다. (145.4)
 조지 웨슬리 부카난(George Wesley Buchanan)은 이 귀절이 약속된 땅에서의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생존으로 이해 된 “안식일과 희년의 해방”이라는 구약의 개념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히브리서의 기자나 수신자 모두가 그때까지도 자신들의 시대 안에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조국의 독립이라는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약속된 바 안식일 안식의 실현을 보게 될 것으로 소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103 (145.5)
 비록 이같은 주장이 가나안의 땅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권고(히 4:9~10)에 비추어 볼 때 좀처럼 옹호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기는 하지만 이로써 일부 학자들이 한 공동 사회의 사고방식에 미치는 바 안식일 신학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의 기자가 안식일 준수의 타당성을 위한 논쟁적 옹호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4:9), 미제(未濟)로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의 축복을 경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는 사실은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를 한층 더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안식일의 준수가 당연지사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가적인 지시들도 곧 제공될 것이다. (145.6)
 현재냐? 미래냐? 두번째의 이유에 대한 비판으로는 히브리서에서 안식일의 쉼이 안식일의 현재적인 준수와는 무관한, 주로 미래의 축복으로만 간주되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교회의 모형을 하늘에 있는 안식처를 향해 여행하는 일단의 방랑자들과 일치시켜 왔다.104 (146.1)
 히브리서에 나타나 있는 순례적 요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는”(히 4:9) 안식일의 안식이 미래의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주로 “이미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히 4:3) 현재적 경험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지 않으면 안된다. “들어가는”이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이며 희랍어에서는 이 “안식(쉼)”의 경험의 현재적 실재를 강조하기 위하여 문장의 첫 머리에 나타나 있다.105 (146.2)
 “남아 있다”(히 4:9)는 동사도 마찬가지다. 문맥과 관계없이 본다면 미래의 전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으나 전후 문맥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이 동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안식일의 쉼의 현재적 영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미 지나간 여호수아의 때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히 4:8). A T. 링컨(Lincoln)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히브리서의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여호수아의 때 이래로 안식일의 준수는 계속 미제(未濟)의 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106 두 동사가 모두 현재 시제(時制)로 사용된 것은 안식일의 미래적인 완성 보다는 안식일 안식의 현재적 영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귀절 속에는 안식일의 쉼의 미래적 차원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지 않으면 안되며 이점은 곧이어 살펴보게 될 것이다. (146.3)
 낡아 없어졌는가 아니면 남아있는가? 이제는 안식일이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최종적인 안식의 그림자 또는 모형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안식일의 기능은 끝났다고 하는 세번째 주장을 검토 할 차례이다.107 그러면 과연 이것이 히브리서나 신약성경의 여타 부분이 가르치는 주장인가? 성전이나 성전 봉사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기능은 그리스도 의 도래(到來)와 함께 끝나고 말았는가? 아니면 안식일의 의미와 기능은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새로움을 입게 되었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복음서에 있는 안식일 관계 자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실제적인 준수를 무효화시킴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날을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원을 경험하고 그것을 남들과 나누는 시간으로 만들므로써 메시야적 안식일 안식의 표상학적, 종말론적 기능을 성취시킨 사실이 밝혀졌다. (147.1)
 이제는 이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하자. 히브리서의 기자가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옛 언약의 제사제도에 “결정적인 단절”이 이루어졌음을 명백히 가르키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과 또 그 후속 과정인 하늘 성소 봉사가 레위 제사장 제도 및 성전 제도의 표상학적(모형과 그림자:히 8:5) 기능을 완전히 대체시킨 사실을 7장에서 부터 10장까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이러한 제도들을 “폐하셨고”(히 10:9), 따라서 그 제도들은 “쇠하여 지고” “없어져 가는”(히 8:13) 것들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안식일까지라도 “낡아빠진” 옛 언약의 한 제도로 간주하고 꼭 같은 범주 속에 안식일을 포함시켰다는 말인가? 일부 학자들은 실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이러한 주장이 자료의 객관적인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기 보다는 토대가 없는 억측위에108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47.2)
 “안식일의 안식”은 명백하고도 뚜렷하게 성전이나 성전의 제사제도들과 같이 “낡은”것으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있는”(히 4:9) 신령한 유익으로 제시되어 있다. “남아있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아폴레 이페타이의 문자적인 의미는 “뒤에 남겨두다”이며 여기에서는 현재 수동 시제로 사용되어 있다. 만약 문자적인 의미로 히브리서 4장 9절을 번역한다면 “그런 즉 안식일의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뒤에 남겨 있다”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안식일과 성전 봉사의 대조는 분명하다. 후자는 “낡아진”것이지만 전자는 “뒤에 남겨진 것”으로서, 아직도 시의성을 가진 것이다. (148.1)
 이와 비슷한 대조는 마태복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때를 맞추어 성소의 휘장이 찢겨진 사건(마 27:51)이 성전 봉사의 종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장차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경고함으로서(마 24:20) 안식일 준수의 영속성을 당연한 사실로 취급하고 있다. (1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