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5 장. 안식일:구속의 기쁜 소식 II.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들
 구약 시대에도 안식일의 메시야적 내지는 구속적 이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어떻게 그같은 구약의 구속적인 기대를 성취시키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기대와 구약에서 안식일에 의하여 예기(豫期)되었던 메시야적 회복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성립되는가? 그리스도는 안식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종말론적 기대들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전 봉사의 경우에서 처럼(히 8:13; 9:23~28) 안식일의 기능을 끝내고 말았는가 아니면 당신의 구속적인 봉사를 통하여 안식일의 의미와 기능을 풍요하게 하셨는가? 이와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구세주께서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봉사하신 일에 대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몇가지 중요한 증언들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127.1)
 1. 나사렛에서의 설교
 안식일 준수의 귀감? 그리스도의 봉사의 첫 시작 장면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구세주와 안식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적절한 장소이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표제(標題)적인 설교를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자신의 봉사 생애를 시작한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한다.38 무엇보다도 누가가 그리스도를 습관적인 안식일 준수자로 소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자기 규례대로”눅 4:16).39 누가가 이렇게 전하는 의도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모범적인 안식일 준수자로 소개하자는 것인가? (128.1)
 M. M. B 터너(Turner)는 “우선적으로 유의해야할 사항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습관은 그분이 다소 뒤늦게 습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는 “사도 행전 17장 2절에서도 바울의 안식일 회당 봉사와 관련하여”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란다.40 누가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습관적으로 가르치신 일까지 생각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이나 바울을 안식일 예배와 관련시키는 신학적 인질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결론은 정당화 될 수가 없다.41 (128.2)
 왜그런가? 첫번째 이유는 누가가 그리스도의 습관적인 안식일 준수에 관한 진술을 함에 있어서 나사렛에서 보면 예수님의 성장기에 곧장 관련시키고 있는 사실이다(“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16절). 여기에는 그리스도가 초년기에 안식일을 습관적으로 지켰다42는 암시가 들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설사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습관적으로 가르치신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신학적인 본보기의 제공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가(토요일 또는 일요일) 설교예배 시간에 성경을 낭독하거나 성격을 강론하는 것은 안식일에 가르치는 이 본보기를 채택한 것이 아닌가?43 (128.3)
 세번째는 “안식일”이란 낱말이 누가복음에는 21회, 사도행전에는 8회에 걸처 나오고 있는데44 이 횟수는 다른 세 복음서의 어느 경우에 비교하여 본다고 해도 거의 갑절에 가까운 숫자라는 점이다. 이점은 누가가 안식일이란 날짜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했다는 뚜렷한 암시로 이해되지 않을 수 없다. 네번째는 누가가 안식일에 그리스도의 지상봉사가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끝도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록하기를 예수님이 “안식일이 거의 다다른 예비일에”(눅 23:54) 장사되었다고 하였다.45 마지막으로는 누가가 그리스도의 장사에 대한 설명을 약간 부연시켜 말하기를 여인들이 “계명을 쫓아 안식일에 쉬더라”(눅 23:56)고 했다는 사실이다. (128.4)
 누가는 왜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도 습관적인 안식일 준수자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소개한 참고절들은 결코 하찮하다거나 우발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누가가 소개하고 있는 안식일 준수의 여러가지 사례들과 그 상황들을 미루어 볼 때 누가의 진정한 의도는 독자들 앞에 “안식일에 대한 존경의 본보기”를 제시하려는 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46 그러나 그같은 “본보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와 그밖의 전도자들이 안식일과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는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128.5)
 안식일 해방의 메시야적 성취. 나사렛에서 행한 그의 첫 취임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주로 이사야 61장 1, 2절58장 6절에 있는 귀절을 취하여 읽으시고 강론하셨다. 그는 낭독하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 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눅 4:18) 하였다.47 (129.1)
 이 귀절의 핵심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이미 거론한 바가 있다. 한스 콘젤만(Hans Conzelmann)은 이 3절을 전체 “메시야적 프로그램”의 간결한 요약이라고 말하였다.48 앞에서 보았듯이 이사야서에 있는 원래의 구절은 하나님의 종에게 기대하는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안식년의 표현을 빌어 묘사하고 있다. 유대교의 본류(本流)나 소수 문화집단들이 다같이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의 사업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사야 61장 1~3절(그리고 58장 6절)에 나오는 안식년적인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의의가 한층 중요하다 할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안식년들의 꿈에 의하여 키워져 내려온 저 메시야적 기대의 실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49 (129.2)
 이같은 결론은 이사야서의 이귀절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의 요약이라고 해도 좋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는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여 뒷받침 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이사야가 안식년을 빌어 약속한 때 메시야적 구속은 “이제” 실현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폴 K. 지웨트(Paul K. JeWett)가 잘 지적했듯이 “메시야의 도래(到来)로 죄를 벗고 메시야에게서 유업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대 희년의 안식은 하나의 실제가 된 것이었다.”50 (129.3)
 약속실현의 주제는 모든 복음서들 속에 되풀이하여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의 여러 측면들이 구약 예언들의 성취로서 되풀이하여 제시되고 있다. 누가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가르침과 사명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눅 24:44; cf. 24:26-27)의 성취를 뜻한다고 설명하셨다.51 (129.4)
 약속과 실현의 주제에 안식일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안식일 해방 약속의 실현이 곧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안식일 제도는 원형(原形)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현을 본 하나의 모형이며 따라서 그 모형의 임무는 이제 끝났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취지였는가?52  (129.5)
 이런 경우라면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대신에 새로운 예배일을 마련하실 법도 한 일이다. 아니면 예수님은 당신의 구속적인 사명을 통하여 이미 약속된 안식일의 안식과 해방을 실현시키셨으며 이로 인하여 안식일로 하여금 당신의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한 적절한 통로가 되게 하신 것일까? (129.6)
 이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안식일 가르침과 봉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통해 발표된 메시아적 회복의 성취라고 주장하면서 안식일에 자신의 강령적인 연설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사 61:1-3; 58:6). (129.7)
 안식년인가 안식일인가? 안식년에 의하여 약속된 구속의 메시야적인 성취는 한 주일에 한번씩 맞이하는 안식일에도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M. M. B. 터너(Turner)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는 이사야 61장과 11Q 멜기세덱이 “1주 1회의 안식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의 언어들을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들에 대해서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째는 “누가가 구약의 그 귀절이 특별히 안식일에만 적용된다는 암시를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눅 4:21‘오늘’은 그 내용상 안식일 보다도 훨씬 광범위한 범위를 가지고 있다).”53 (130.1)
 이같은 반대 이유들은 모두 타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는가? 터너의 첫번째 반대 이유는 안식년과 안식일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적인 유착성을 간과하고 있다. 안식년의 근본적인 기능은 안식일에 의하여 베풀어지는 잠정적인 “해방”을 히브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더욱 공고히 하고 실질화시키는 데 있었다. 결과적으로 안식년도 역시 “여호와께 대한 안식”(레 25:4; 대하 36:21)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안식년은 물론이려니와 안식일의 안식도 메시야의 안식과 회복을 예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안식년에 대한 언급은 안식일 안식을 배제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30.2)
 두번째의 반대 이유에 관련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메시야적 희년 모티프”(동기, 주지)가 자신의 구속적 사명의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티프를 유독 자신의 안식일 봉사에만 국한하여 사용하셨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세번째의 반대 이유도 도무지 정당화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누가가 구약의 그 귀절을 특별히 안식일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암시한 일이 없다”54는 주장은 진실된 것인가? 누가가 오늘(눅 4:21)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사용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130.3)
 호와드 마샬(Howard Marshall)은 지적하기를 “오늘”이란 말은 주로 “예수께서 예언들이 성취되기 시작한 날이라고 말한 그 날을 뜻한다”고 하였다.55 그렇다고 해서 “오늘”이란 말의 관련 영역(領城)이 “주의 은혜의 해”(눅 4:19)인 메시야의 시대의 개시(開始) 부분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가 곧 이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들을 치료해 주신 두개의 이야기(눅 4:31~38)와 관련시켜 예수님이 안식년 회복의 성취를 선언하신 기사(눅 4:16~21)를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해야 할 “암시”가 아닐 수 없다. 이 일련의 기사들은 예수님께서 대망의 안식년 해방의 실현을 선언하신 연후에 그 실현의 양상을 실지로 보여 주셨음을 전해주고 있다. (130.4)
 안식일 해방과 구세주의 구속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 61장 1~2절58장 6절를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표제어(標題語)는 아페시스라는 짤막한 한 마디이다.56 이 말은 누가복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처음에는 포로된 자에 대한 “자유”(release)로, 두번째는 눌린 자에 대한 “자유”(Liberty)로 번역되었다(눅 4:18). 이것은 예수께서 특별히 안식일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시는 영적 육체적인 치료를 통하여 실현된, 약속된 바 저 안식일 “해방”인가? 마가와 누가가 모두 귀신들린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사건(막 1:21~28; 눅 4:31~37)을 예수님의 첫 기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짐작하건데 이는 “이것을 시발로 삼아 후속하여 일어나는 안식일 활동과 치료 봉사들을 소개하려 함”이었던 것 같다.57  (130.5)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의 봉사는 안식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평일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매일의 봉사 역시 고대했던 안식일 해방의 실현을 뜻하고 있는 것인 이상 안식일의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닐 수 없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안식일 구속 봉사에 대한 적용 범위를 넓게 잡고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안식일 준수에 대한 여러개에 달하는 논란들 말고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료해 주신 일화가 최소한 일곱개가 넘는다.58 더욱 중요한 것은 안식일에 행하신 그리스도의 치료 봉사의 속성으로 자주 지적된바 구속적 의의이다. (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