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5 장. 안식일:구속의 기쁜 소식 II.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들
 앞에서 보았듯이 안식일이나 안식년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눌린 자들에게 “해방” 즉 아페시스를 제공하는 일이다. 성전 봉사와 안식일 희생제사를 강화한 것은(평일에는 어린 양들을 희생으로 바쳤으나 안식일에는 넷을 희생물로 바쳤다. 민 28:8~9) 모두 하나님이 안식일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와 죄책의 짐을 벗게 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안식일은 특별한 형태로 하나님의 용서의 안식과 또 활기찬 새 출발을 경험하는 날이다.80 (139.5)
 그리스도와 성전.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행하는 이와같은 구 속적인 활동들 속에서 당신의 제자들의 안식일 봉사는 물론 당신 자신의 안식일 봉사를 정당화시키는 확고한 근거를 발견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봉사를 “성전 보다도 더 큰 무엇”(마 12:6)으로 보셨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들의 성전 봉사에 의하여 표상론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를 통하여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그들의 구속 봉사를 수행한 것이 안식일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니었던 것처럼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모시는 일을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하는 것도 안식일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140.1)
 성전 봉사와 제사들을 통하여 약속된 구속의 성취라는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봉사 활동은 안식일에도 계속 되어야 하며 또 이 활동은 안식일에 더욱 적합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제사장들로서 마땅히 예수님의 하신 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않된다. 엘렌 화잇이 적절히 말했듯이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예표하는 의식들을 실행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수고는 안식일의 목적과 조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자신이 이 땅에 강림하셨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함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 일을 성취하는 데에 필요한 일을 안식일에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81 (140.2)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그들이 종교적인 활동을 할 때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제사장들과 제자들을 대응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82 그렇다면 하나의 행위를 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 행위의 의도된 기능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일 때는 종교적인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빵을 굽는 일은 예사 일로 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안식일에 집에서 빵 굽는 일을 하지 않는다(출 16:23). 그러나 성전에서는 이 일이 종교적인 활동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들 가운데 하나로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적법하게 이행할 수 있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1:3~6; 레 24:8). (140.3)
 제자들은 성전 보다도 더 크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른 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의 순회 여행에 수행하여 다니는 동안에 그들의 개인적인 핍절함을 돌보는 일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겠는가? 종교적인 활동의 범위를 특정의 성역(聖域)안에서 이행되는 활동에만 극한시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셨듯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 호 6:6)한 호세아 서(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일 뿐이다. (140.4)
 권위냐? 적법성이냐? 그리스도께서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거론한 것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안식일 계명을 초월하시는 당신의 권위를 내세우신 행위인가? 아니면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계명의 요구를 벗어 나지 아니하는 적법한 것이었음을 주장한 행위인가? 많은 학자들이 전자(前者)의 입장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항은 “적법성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의 문제”이다.83  (141.1)
 예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다윗과 제사장들의 비교이며, 다른 면에서는 제사장들과 그리스도의 비교인데 그 취지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안식일 법을 무시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데에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을 죄책으로부터 보호해 준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라는 것이다.84 이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를 끝까지 밀고나가 그리스도의 이처럼 권위 있는 가르침은 부활 이후에야 실지로 발생하게 되는 예배일의 변경을 미리 내다본 말씀이셨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85 그러한 추론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일요일 준수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예수의 논증에서 정당하게 도출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41.2)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안식일 계명을 폐지시킬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든 것인가? 인간적인 권위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을 초월하는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렇게 된다면 인간적인 권위와 하나님의 계명 사이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고 발생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논리에는 그같은 충돌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바리새 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다윗이나 제사장들 같은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저촉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예외적인 행동들은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 취지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141.3)
 이 점은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마 12:5)는 예수님의 반문(反問)에 의하여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선례(先例)를 율법 밖에서가 아니라 율법에서, 율법 안에서(마 12:5) 찾아내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들 또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안식일 계명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안식일 계명의 기본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죄가 없었던” 것이다.86 (141.4)
 그리스도, 율법의 해석자. 모든 율법은 해석되어야 한다. 제사장들의 경우야말로 적합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제사장들의 법에 따르면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있는데(민 28:9; 데 28:8) 그렇게 되면 안식일의 안식법을 어기게 된다(출 20:8~10).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율법의 모든 조항은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수가 없고 특정한 경우에 적용할 때에는 차별을 두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법원이 국법의 의도에 대한 최종적인 유권 해석을 내린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 12:8; 막 2:28)으로 선언하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 권위였다. 그것은 안식일 계명을 폐지시키거나 대체시키는 권위가 아니라 안식일 계명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밝히는 권위였다.87 (141.5)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들의 무죄를 주장함에 있어서 다섯 가지의 중요한 논거를 제시하여 네째 계명의 참된 의미를 밝히는 유권 해석자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였다. 첫째로 주님은 모든 율법이 예외 조항을 가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윗의 일을 거론하였다(마 12:3; 막 2:25). 둘째로 안식일 계명은 사람들의 영적 필요에 대한 봉사를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함축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행하는 예외적인 활동들을 특별한 본보기로 거론하였다(마 12:5). (142.1)
 세째로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은 성전과 제사 제도의 원형으로서 핍절한 죄인들에게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행사했던 똑같은 안식일 특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마 12:6). 네째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고 한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안식일 준수의 우선 순위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봉사가 첫째이며 제의적(祭儀的)인 규칙들의 엄수는 그 다음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의 복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고 하는 근본적인 원칙을 재천명하여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됨 곧 안식일의 의미를 유권 해석할 수 있는 당신의 특권을 주장하셨다(막 2:28). 따라서 안식일 계명을 구실삼아 인간의 궁핍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안식일 계명의 기본 목적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142.2)
 6. 구세주의 안식
 주님의 쉼과 안식인. 안식일의 의미에 대한 이와 같은 권위있는 해석에 비추어볼 때에라야만 마태가 방금 우리가 살펴보았던 그 이야기에 앞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의 호소의 의미가 좀더 확연해질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하셨다. (142.3)
 이 초청 중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로 와서 당신에게 배우는 사람들에 대하여 두차례에 걸쳐 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가 제공하시는 은 안식일의 쉼과 관련되어 있는가? 여러 주석가들이 이 둘 사이의 연관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다.88 마태는 두개의 안식일 일화(마 12:1~14) 바로 앞에 쉼을 얻으라는 그리스도의 초청(마 11:28~30)을 소개함으로써 이러한 연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142.4)
 이같은 구조적인 연결말고도 마태는 “필시 에수님께서 당신의 쉼에 대하여 말씀하신지 얼마 안되는”89 “그 때에”(마 12:1) 일어난 두건의 안식일 충돌 사건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시간적인 연결성까지 추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쉼은 진정한 안식일의 쉼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장(章)의 앞 부분에서 우리는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의 쉼이 미래에 있을 메시야적 쉼의 예표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을 살핀 바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쉼을 제공함으로써 대망의 안식일의 쉼을 실현시켰다고 충분히 주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8~21절에서 기다려 왔던 안식년 해방의 메시야적 실현을 선포하고 있듯이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서는 그리스도가 대망(待 望)의 메시야적 안식일 쉼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90 (142.5)
 그리스도의 쉼의 본질.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안식일 쉼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와 같은 쉼은 어떻게 하면 경험할 수 있는가? 현대의 독자(讀者)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방식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9)고 하셨다. 자신에게 멍에를 메므로써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을까? 그같은 표현은 분명히 용어의 모순 같이 들린다. (143.1)
 그러나 이 모순은 “멍에”라는 표현의 의의가 이해될 때 해결된다. “멍에”라는 말은 유대인들이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91 이 사실을 뒷바침하기 위해서는 몇가지의 예를 드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만 ∙∙∙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렘 5:5). 에레미야는 다음장에서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을 새롭게 함으로써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민 25:3)고 한다. (143.2)
 율법의 멍에를 지라는 권고는 랍비 문헌들 속에서도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랍비 네훈야 b. 카나(Rabbi Nehunya b, Kanah: C. AD 100)는 “율법의 멍에를 진 사람으로부터는 왕국의 멍에와 세상 근심의 멍에가 벗기워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92 율법을 멍에로 표현하는 일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친숙한 현상이었다. 그 예로 서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들에게 할례의 법을 이행하도록 요구하며 그들 “목에 멍에를 두려는”(행 15:10) 주장을 분쇄했다고 했다.93 (143.3)
 이같은 표현 방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무거운 구속복(拘束服)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크게 다른 것이다. 독실한 신자에게 있어서 율법은 노예 신분의 강요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특별한 계약 관계의 기초를 의미했다. M. 메이어(Maher)가 적절히 설명했듯이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두며 하나님의 들어난 뜻을 실천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려는 소망”을 뜻한다.94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시 1:1, 2; 112:1; 119:18, 105)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