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3장—미국에서 이루어진 제칠일안식일 신앙의 역사
 이처럼 엄격히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안식일과 재림의 신앙은 서로가 서로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집단이 발생한 1846년과 1849년 사이에 안식일과 긴급한 재림의 교리가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으며 또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기초 교리가 형성되었던 이 기간에 재림과 안식일이란 두 교리가 어떻게 상호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안식일의 역사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연구는 앞으로 안식일의 진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일에도 어떤 예시를 주는 것이다. (238.1)
 첫째로 재림 교도들은 안식일 신앙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초기 단계에서 제칠일 침례 교도들의 안식일 개념을 성경에 비추어 철저히 검토한 후에 자신의 것으로 채택하였다. 제칠일 침례 교회가 역사적으로 강조한 안식일 개념은 십계명의 넷째 계명인 안식일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기념한다는 것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우리들의 생존에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첫 눈에 이들의 안식일 계명은 우리들에게 독단적인 것으로 보인다. 안식일 계명은 이 계명을 준 분의 권위를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을 금지하는 계명들처럼 도덕적 본질이 자명하게 드러나는 계명이 아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며 다른 아홉 계명을 순종하는 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그의 창조주를 인정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시험하는 계명이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시험하는 계명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시대의 인류를 위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안식일의 계명을 바꾸지 않았으며 안식일 계명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을 변경시키려는 어떠한 의도나 행동도 창조주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인 것이다. 제칠일 침례교의 사상 속에서도 안식일은 미래의 종말론적 대위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안식일의 쉼”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늘에 예비된 “영원한 안식의 담보이며” 하늘의 “원형”을 나타내는 지상의 “모형”이다.46 (238.2)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그 형성기인 1846년부터 1849년까지 안식일 교리를 위해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제칠일 침례교의 문헌에 의지했는지는 앞에서 소개하였다. 재림 교회의 선구자들은 안식일에 대한 제칠일 침례 교회의 설명을 전체로 수용하였으며 크게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도들은 자신의 임박한 재림 신앙 때문에 제칠일 침례 교인들의 안식일 이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안식일에 대한 인식을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상 제칠일 침례 교도들의 안식일론은 역사의 백미러(뒷 거울)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방식이었던 반면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도들의 안식일론은 시선을 미래의 노정에 고정시키는 방식이었다. (238.3)
 재림교도들은 비록 실망으로 끝났지만 1844년 경험의 기본적인 타당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확신은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연구의 결과였고 따라서 재림 신도들의 이러한 신앙적 사고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안식일 신학을 재림 신앙과 긴밀히 연관된 형태로 발전시키게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신학적 자세는 이미 그들의 기관지의 명칭인「더 세컨드 아드벤트 리뷰 엔드 사바드 헤랄드」(The Second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에 당장 나타났으며 십년 후에는 그들의 교단 명칭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Seventh-day Adventist)에 나타났다. (239.1)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도들이 밀러파의 나머지 재림 신자 집단들과 분리되는 신학적 이탈의 첫 출발은 1844년 10월 22일의 쓰라린 실망을 겪은 다음날 아침에 이루어졌다. 10월 22일에 “정결하게 된다”고 예언된 “성소”는 밀러파 재림 신도들이 예상했던 이 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부터 지상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봉사해온 하늘의 성소라는 생각이 하이람 에드손(Hiram Edson)의 마음에 섬광처럼 스쳤다.47 그러나 다른 재림 교도들은 1844년 후 여러 해 동안 그들이 예수님이 글자 그대로 하늘로 부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기다린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으나 재림의 시간을 1844년 10월 22일로 한정한 예언 해석은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연구를 계속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를 계속해서 지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시기파 재림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크로지어(O.R.L. Crosier)의 하늘 성소론의 설명을 수용한 밀러파 재림 신도들은 다른 입장을 세웠다. 즉 1844년 10월 22일로 재림의 시기를 예언한 “시간”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옳았으나 그 사건의 “내용”에 있어서, 특별히 “정결해지리라”“성소”가 어떤 성소이냐 하는 해석에 있어서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경 어느 부분에서도 다니 엘 8:14의 성소가 이 지상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찾지 못했던 반면 오히려 신약 성경, 그 중에서도 특별히 히브리서 에서는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에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는 개념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844년 10월 22일은 지상의 성소와 관련된 예언의 시간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봉사하시는 예수님의 활동과 관련된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239.2)
 이와 같은 성소의 개념이 이 개념을 수용한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재림의 시기를 정하게 하는 시기파 재림 신앙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그들과 다른 재림 신도들 사이에 분계선을 그어주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성소의 개념이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율법과 안식일로 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간략히 언급 했듯이 엘렌 화잇은 1846년의 늦은 겨울이나 아니면 1847년의 이른 봄에 있었던 한 묵시에서 하늘 성소의 법궤 곁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은 그녀의 눈앞에서 십계명이 기록된 접힌 돌판을 폈으며 그때 엘렌 화잇은 빛의 후광이 넷째 계명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그녀는 넷째 계명에 대한 이 같은 강조가 제칠일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확인을 뜻한다고 이해하였다. 안식일은 이렇게 하늘의 성소와 연결되었다. (239.3)
 우라이야 스미스는 1854년 7월 25일자「리뷰」지의 “안식일이 현대진리의 다른 강조들을 지원하는 관계”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성소와 안식일은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성소의 진리를 수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안식일의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성소는 법궤를 간직하고 있고 법궤는 율법을 간직하고 있으며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변경되지도 않은 넷째 계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 때 제정되어 사람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안식일이 아직도 전체 인류 가족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 이상으로 더 명확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는 진리는 없다. 아마도 어떤 진리도 이 보다 더 명확하게 제시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무엇보다도 바로 이 점에 대하여 특별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48 (240.1)
 임박한 재림은 안식일의 기별에 “현대 진리”로서의 요점과 절박성을 제공했다. 제칠일 침례 교회의 안식일 신학에는 바로 이러한 요소가 빠져있다. 1850년에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에 계시는 시간이 거의 마쳐지고 있으며 매우 적은 시간만이 남아 있음을 보았다∙∙∙ 인치는 시간은 매우 짧으며 곧 끝날 것이다.” “시간은 거의 끝났다∙∙∙ 천사가 말하기를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하였다.”49 안식일에 특별한 요점과 긴박성을 제공한 것은 바로 대단히 절박한 재림의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후에 요한계시록 14장 9-12절과 안식일의 관계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240.2)
 재림 교도들은 1844년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재림의 선포에 의해서 계시록 14장 6, 7절의 첫째 천사의 기별이 성취되었으며 1844년 여름에 있었던 “밤중 소리”운동으로 계시록 14장 8절의 둘째 천사의 기별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계시록 14장 6-11절에서 첫째 천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안식일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천사는 백성들이 첫째 천사의 기별을 거절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런데 또 셋째 천사가 뒤이어 나타나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재림 교도들은 짐승의 표를 하나님의 인과 대립되는 사탄의 표로 이해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인으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짐승의 표는 마땅히 사단의 가짜 안식일이라고 결론 지었다. 뿐만 아니라 첫째 천사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각을 선포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셋째 천사의 기별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요한 계시록에서 서술되어 있으므로 재림 교도들은 안식일이야말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잣대가 된다고 이해하였다.50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 기별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구주로 믿는다고 하였다. (240.3)
 이처럼 안식일은 첫째 천사와 셋째 천사의 기별 속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몇 년 후에 엘렌 화잇은 이렇게 썼다. “안식일을 세천사의 기별로부터 분리시키게 된다면 안식일은 그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세천사의 기별과 연결시키게 되면 안식일에 힘을 실어주어 안식일로 하여금 불신자와 이교도들에게 과오를 깨닫게 하여 그들을 과오로부터 불러내어 주안에서 서고 살며 자라며 번영하도록 힘을 돋구어주게 된다.” 그리고 또 그녀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법으로 대체시키는 일은 선과 악의 대쟁투라는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최후의 비극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51 문제가 이처럼 명백하게 부각되었으므로 충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승인의 도장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는 인간의 명령에 굴복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3장14장에 예언된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주간의 첫째 날을 존중하는 대신에 성경의 안식일을 준수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법령이 온 세계에 포고 될 것이라 하였다.52 (240.4)
 앞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신학에서 불가분리의 관계로 묶여 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는 공생의 합일 관계에 있다. 영원한 복음(계 14:6)과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계 14:7)의 구도 안에서 형성된 재림과 안식일의 합일 관계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신학의 구조적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도들은 흔히 이 교회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그들이 “셋째 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였다”든가 또는 “안식일을 받아 들였다”고 표현한다. 이 두 표현은 모두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성경을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1846년부터 1849년까지의 기간에 안식일을 “현대 진리”로 내세우게 되었으며 제칠일 침례교인들은 한번도 주장해 본 일이 없는 궁극적인 중요성을 안식일에 부여하게 되었다. 또 이것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높은 헌신과 경이적인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41.1)
 제칠일 안식일의 종말적인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재림 교회 신학에 있어서 안식일의 중요한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안식일은 재림 교회의 개척기에 여러 곳에 또 여러 가지의 의견으로 갈라지고 흩어져있던 재림 신자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오늘까지도 세계 전역에 산재해 있는 재림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국가적인 모든 장애를 넘어 하나로 단결하여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게 하는 촉매로 기능하고 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이라는 이름은 이 교회의 존재 이유와 또 이 교회의 교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나타내고 있다. (241.2)
 안식일의 적절성: 하나의 적극적 관점
 전통적으로, 그리고 최근까지 재림교회가 거의 독점적으로 안식일의 준수에 대해서 강조해 온 것은 안식일의 준수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정당한 도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당연한 의무로 안식일 준수가 강조되어왔다.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니까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서는 안식일 계명의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는 글들이 많아졌다. 안식일은 지혜로우신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의 생태적인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하신 은혜로운 규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던지 인간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보던지 안식일의 명령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사람에게 안식일 준수의 의무만 강조하는 대신에 사람에게 안식일을 마련하신 창조주의 자비로우신 목적을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에 본래적으로 내재해있는 치료적 가치를 강조한다.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맹목적으로나 강압적으로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명령을 지성적으로 감상하며 지킬 것을 강조한다. 아바. 제이. 씨. 본드(Ahva J. C. Bond)는 이 같은 새로운 관점에 나타난 안식일 인식의 균형성을 다음같이 간결하고도 요령 있게 표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만드셨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안식일이다. 사람이 이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53 (241.3)
 안식일의 전통적인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안식일의 하나님을 왜곡시킬 위험이 따른다. 마치 안식일의 하나님은 자기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 피조물들에게 행동과 마음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규정들을 부과시키시는 독재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개념을 왜곡시킬 위험이 많다. 이렇게 되면 안식일의 준수는 인간이 자신의 힘겨운 순종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상을 얻어내려는 신앙의 방식으로 곡해되기 쉽다. 안식일의 신앙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는 신앙으로 전락되기 쉽다. 안식일의 이러한 준수는 안식일을 제정한 근본 목적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안식일의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들의 행복과 안녕을 무한히 걱정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으로 생각하는 관점이다. 안식일을 성숙한 자세로 준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식일을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해야한다. 인간이 단순히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어쩔 수 없는 의무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생존과 참 존재의 길을 허락하신 창조주의 은혜로운 목적에 자기가 충만히 부응하려 하는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안식일을 지키려고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은 오늘날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안식일 신앙은 물질 중심의 현대 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상적인 치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42.1)
 현대인들에게 안식일의 이 같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일에 특별히 기여한 몇몇 저술가들이 있다. 유대인 랍비 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자신의 저서인「안식일: 현대인을 위한 그 의미」(The Sabbath: It Meaning for Modern Man).54를 통하여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안식일을 “시간 안에 있는 거룩”으로 강조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 안에 건축한 성소”로 안식일을 강조하였다.55 (242.2)
 두 번째로 언급해야 할 저자는 제칠일 침례교회의 허버트 이. 사운더스(Herbert E. Saunders)이다. 그는 그의 책「안식일: 창조와 재창조의 상징」(The Sabbath:Symbol of Creation and Re-Creation)에서 안식일을 일컬어 “하나님과 인류의 완전한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안식일은 우리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가 피조물로써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날이라고 말했다.56 사운더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의 극치로 그리고 그의 구원의 능력의 극치로 서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구원의 능력의 상징으로 서 있다.57 뿐만 아니라 진실로 안식일은 인간의 인격적인 주체성과 가치를 드높여 주고 있는 날이며 이 세계의 폭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케 하고 있는 날이다.58 (242.3)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안식일 신학과 재림 신학에 관련하여 그 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으나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사카이 쿠보(Sakae Kubo)이다. 그는「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다: 안식일과 재림의 신학」(God Meets Man:A Theology of the Sabbath and Second Advent)에서 “안식일과 창조”, “구속으로서의 안식일”, “미래의 안식일로서의 안식일” 같은 세 개의 장에서 안식일의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아브라함 헤셀이 그랬듯이 시간 안에 있는 거룩의 개념을 높이 강조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점은 그가 안식일을 구원에 관련시켜 강조한 사실이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은 안식일이 되어 자신이 그 순간까지 해오던 일을 중지할 때 자신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일을 중지해도 세상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하나님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우리로부터 우리들의 일을 박탈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율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해된 안식일은 우리에게 자기를 의롭게 할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자기의 의로 구원을 이루려는 의도를 물리치게 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그 반대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진실로 하나님의 은총과 주권의 표징이며 인간의 수용과 의존의 표징”이라 하였다.59 (243.1)
 쿠보는 또 안식일을 “구원의 표징”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의 결과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안식일은 전혀 의미가 없는 날이 된다”고 하였다. 항상 존재의 거룩이 시간의 거룩과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식일을 성화와 관련시켜 말하면서 “우리의 현 세계에서 안식일은 우리를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재촉하는 하나님의 도전으로 우리 앞에 맞서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세상의 대부분의 지역들은 일요일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하도록 구조화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든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기자신의 단호한 결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60 (243.2)
 쿠보는 안식일 준수에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일차적이란 사실을 강조하였다. 안식일 준수자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그 어떤 선행으로도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기본적이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응답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믿음의 응답에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2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