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3장—미국에서 이루어진 제칠일안식일 신앙의 역사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은 1848년 4월 20일과 11월 18-19일 사이에 콘넥티커트, 뉴욕, 메인, 마사추세츠 등지로 초청되어 여섯 차례에 걸친 중요한 “총회”에 참석하였다. 총회(Conference) 라는 명칭은 모임이 개최된 해당 지역에서 재림신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참석하도록 초청되었기 때문에 참석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이었다. 따라서 이 회합은 일반적인 의미의 총회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참석자들끼리 그들이 이미 받아들인 교리의 중요 사항들에 대해서 서로 권면을 나누어 합의에 이르려는 것이었으나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진리에”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일치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잘못된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서로가 각각, 자기 주장만 내세웠다.21 (230.1)
 이 총회들의 주요 강사들은 제임스 화잇과 엘렌 지. 화잇 그리고 조셉 베이츠였다. 그리고 그들이 강조하여 가르친 주요 주제들은 안식일, 안식일과 관련되는 셋째 천사의 기별(계 14:9-12), 그리고 예언에 나타난 마지막 사건들이었다. 결국 이 진리들이 이 모임에서 서로 흩어져 있는 재림 신자들을 하나로 통합시킨 “현대 진리”였다. 엘렌 화잇의 주장대로 “진리가 승리를 얻어낸 것이었다.” 많은 참석자들이 “자신들의 과오을 포기하고 셋째 천사의 기별로 단합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크게 축복하여 믿는 자가 크게 늘어났다”.22 이처럼 많은 재림 신자들에게 안식일이 대단히 의미 있는 교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이들을 안식일의 준수자들이라는 하나의 그룹 의식으로 결속시킬 수가 있었던 것은 모두 재림 신자들이 안식일을 세천사의 기별의 장치 안에서 이해하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230.2)
 총회의 모임이 거듭되면서 교우들을 괴롭혀왔던 의견의 불일치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뉴 잉글랜드와 뉴욕의 일대에 흩어져있던 신자들이 서로 동료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853년에 제임스 화잇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자들이 몇가지 주제들에 대해 가지 각색의 자기 주장들을 가지고 여러 교단들로부터 나왔으나 안식일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합될 수 있었다고 기록 하였다.23 아더 스팔딩(Arthur Spalding)은 그 당시에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자들이 약 일백 명에 이르렀는데 바로 이 사람들이 후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형성하는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말했다.24 (230.3)
「더 프레즌트 트루즈」(The Present Truth:현대 진리)와
「디 어드벤트 리뷰」(The Advent Review:재림 재 검토)
(230.4)
 1848년 11월에 엘렌 화잇은 그의 남편에게 “현대 진리”의 기별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작은 인쇄물을 하루 속히 출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제임스 화잇은 1849년 6월에「더 프레즌트 트루즈」(The Present Truth:현대 진리) 라는 이름의 선교 잡지 첫 판을 발행하였다. 후에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현대 진리」지를 2호나 3호 정도로 발행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결국 1850년 11월까지 11호를 발행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25 (230.5)
 11호까지 출판된「현대 진리」지는 매 호마다 안식일 기사로 지면의 3분지 2를 채웠는데 안식일의 역사를 창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불변성을 역설하였다. 안식일은 변경되지 않았으며 변경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아직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계명이라고 주장하였다.「현대 진리」의 제 1호와 제 2호는 안식일에 관한 기사로 지면의 대부분을 채웠다. 그 다음 호부터는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세째 천사의 기별, 그리고 “닫힌 문”등에 관한 기사들도 실었다. 그러나 성소에 관한 기사에서도 성소와 관련되는 안식일의 문제를 취급했으며 세째 천사의 기별에 관한 기사에서도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을 시험하는 특별한 진리로 안식일 기별을 다루었다.26 결국 성소와 세째 천사의 기별에 관한 기사들도 안식일에 관한 기사가 되고만 셈이었다.「현대 진리」지의 이 기사는 특별히 일요일을 지키는 재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준비된 것이었다. (231.1)
 제임스 화잇은「현대 진리」첫 판의 권두언에서 “자신은 수개월 동안 재림 신도들의 흩어진 무리들을 위하여 ‘현대 진리’를 쓰고 출판해야 할 책임감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넷째 계명의 준수를 “현대 진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같은 문장에서 서둘러 추가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이 진리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27 「프레즌트 투르즈. The Present Truth:현대 진리」라는 이 선교 잡지의 표제가 안식일을 의미했으며 또 이 잡지의 거의 모든 기사들이 안식일에 관련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이 안식일을 “현대 진리”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암묵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조셉 베이츠가 3년전에 그렇게 묘사했듯이 안식일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뉴스”였다. (231.2)
 안식일 총회들과「더 프레즌트 투르즈」의 발간이 재림신자들을 하나로 규합시키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독자들의 편지들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서신들의 일부는 “해외에서 흩어진 무리들”을 돌보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올라온 것이었고 나머지 일부는 최근에 안식일과 셋째 천사의 기별을 현대진리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보낸 것이었다.「더 프레즌트 투르즈」에는 1849년과 1850년에 뉴잉글랜드와 뉴욕의 여러 곳에서 개최될 안식일 총회들에 대한 광고들도 개재되었다. (231.3)
 1849년 10월 16일에 매인 주(州) 노즈 파리스(North paris)에서 제이. 엔. 엔드루스(J. N. Andrews)가 보낸 편지가 같은 해 12월에 간행된「더 프레즌트 투르즈」에 개제되었는데 그 편지에서 엔드루스는 최근에 그곳에서 개최된 안식일 총회의 결과가 대단히 훌륭했다고 보고하였다. “잘못되고 고통스러운 주장들 때문에 근처에 사는 형제들이 오랫동안 분열되어 지내 왔으나 총회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의 크고 중요한 진리를 중심으로 하나로 규합되었다”고 했다. 용과 더불어 마지막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랑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 안에서 단결하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고 말했다. (231.4)
 위 출판물의 같은 호의 같은 쪽에는 버몬트에 거주하는 다른 통신원으로부터 그가 “최근에 발행된 출판물(더 프레즌트 트루즈)의 주장들로 말미암아 대단히 크게 격려를 받았다”는 보고가 게제되어있다. 자신의 이웃들이 “이 작은 출판물을 읽고”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28 또 다른 독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지역의 사업전망은 고무적이다. 4월 20일과 21일에 개최된 지난 총회는 본인이 일찍이 참석했던 어떤 총회 보다도 가장 훌륭했다. 모든 형제들이 진리에 대하여 확신에 찬 표정들이었다.” 메인 주(州) 캄덴(Camden)의 또 한 그룹도 “최근에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들은 전에 “여러가지 과오들로 말미 암아 사분오열의 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최근에 서로 노력한 결과 “강력한 단합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29 (232.1)
 안식일 교리는 흩어진 재림신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결집력있는 집단으로 만드는 촉매로 작용하였다. 1848년 전까지는 안식일의 준수가 그들 사이에 개인적인 신앙으로 간주되었으나 1849년 말에 이르러서는 나중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라는 교단 명칭을 채택하게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공적으로 인정된 중심교리의 하나로 취급되었다.30 1851년에 엘렌 화잇은 쓰기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의 통일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성경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로 단결되고 있다. 재림신도들 가운데 안식일을 반대하는 사람만이 이상스럽게 단합을 하지 않고 분열되고 있다”고 하였다.31 재림신도들의 대동단결은 주로 1848년부터 1850년까지 개최된 안식일 총회들과「더 프레즌트 투르즈」의 출판을 통해 이루어졌다. (232.2)
 이처럼 안식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출현시키고 세계 전역에 흩어진 재림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국적과 종족과 언어와 정치이념과 경제적 지위를 초월하여 하나로 단결하게 한 통일의 요소였다. 안식일은 모든 장애물들을 허물어뜨리고 이 세상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으리만큼 대단히 다양한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고 있다. (232.3)
 흥미로운 사실은「더 프레즌트 투르즈」의 10호와 11호 사이에 제임스 화잇이 또 하나의 정기 간행물인「디 어드벤트 리뷰」(The Advent Review)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다섯 차례에 걸친 정기 간행과 두차례 걸친 특별호 간행를 결행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계속 간행되는「더 프레즌트 투르즈」에「디 아드벤트 리뷰j의 기사를 올리지 않고 재림관계 기사를 위해서「디 아드벤트 리뷰」를 별도로 발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제임스 화잇이 두 잡지에게 각각 다른 역할들 곧 하나에게는 안식일의 선구자의 역할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에게는 재림신앙의 재촉구라는 역할을 맡겼음을 나타낸 것이다. 안식일의 진리를 맹렬히 전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여전히 헌신적인 재림신자들이었던 것이다. (232.4)
 제임스 화잇은 이러한 배경 아래서「더 프레즌트 투르즈」와「디 어드벤트 리뷰」의 마지막 호가 간행된 1850년 11월에「세컨드 아드벤트 리뷰 엔드 세베드 헤랄드」(Second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재림의 재검토와 안식일의 선구자)의 제 1권 제1호를 발행하였다. 안식일과 재림이 하나의 정기 간행물로 통합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재림신앙(Seventh-day Adventism)이 종교계에 하나의 항구적인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 11년후에는 이 종교 단체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란 교단 명칭을 선택할 때도 이러한 신앙정신이 반영되었다. (232.5)
 1861년에 이들이 공식적으로 이 명칭을 선택할 때까지 이들은 자신들을 “the little flock”(작은 무리), “Second Advent Sabbath Keeper”(재림 안식일 준수자들), “Seventh-day Advent people”(제칠일 재림 백성), “Sabbath-Keeping Adventist”(안식일 준수하는 재림교도들)등으로 호칭하였다.32 (233.1)
 안식일에 대한 재림교도들의 수많은 출판물 중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그 첫 번째로 언급해야할 중요한 하나는 1861년에 첫판이 출판된 후에 수 차례에 걸쳐 개정판과 재판이 거듭된 제이. 엔. 엔드루스(J. N. Andrews)의 고전적인「안식일의 역사」(History of the Sabbath)이다. 이 책은 창조시대로 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재림 교회의 안식일 신학의 요체를 설명한 고전적 저술이었다. 이 책의 제4판은 엘. 알. 콘라디(L. R. Conradi)와 공동으로 다듬은 개정판이었다 (233.2)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안식일로 지킬 것인가에 대한 결정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신도들은 안식일 계명을 준수해야 할 신앙적인 의무와 안식일을 지키는 바른 방식에 대해서는 일찍 부터 의견이 일치되고 있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성경을 연구한 결과 안식일에 대한 제칠일 침례교도들의 주장이 전반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어느 시각부터 안식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제칠일 침례교도들은 저녁부터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지키고 있었다. 죠셉 베이츠는 금요일 여섯시부터 안식일을 지켰으나 그밖에도 일몰부터 지키는 사람들과 밤 자정부터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토요일 일출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로 나뉘어지고 있었다.33 (233.3)
 안식일처럼 중요한 사항에 있어서 교인들의 신앙 관습이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는 사실을 크게 우려한 제임스 화잇은 1855년 8월에 제이. 엔. 엔드루스에게 이 문제를 철저히 조사하여 원고를 마련해주면「리뷰」지에 게제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드디어 엔드루스의 긴 논문이 1855년 12월 4일자의「리뷰」에 게제되었다. 그는 1851년 6월2일자의「리뷰」에서는 “from even unto even, shall we celebrate your sabbath”라는 영어 성경의 표현 때문에 토요일 아침 6시부터 안식일이 시작한다고 주장했었다. “even”을 아침 여섯시로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경의 자세한 자료를 검증한 후에 일몰부터 일몰까지로 안식일을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 상 아침 여섯시를 “even”으로 이해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계는 1658년에 발명된 것인데 시계가 발명되기 전에는 어떻게 사람들이 아침 6시를 분간하여 안식일의 시작을 알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성경에는 일몰로 모든 날의 시작과 끝을 정했으며 이 전에 있어서는 안식일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다. (233.4)
 제칠일 침례 교도들과 후속적인 접촉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