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3장—미국에서 이루어진 제칠일안식일 신앙의 역사
 신대륙에 이주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안식일 준수자들
 북미 대륙에서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1664년경에 런던의 벨 레인(Bell Lane) 제칠일 침례교회의 스티븐 멈포드(Stephen Mumford)가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의 뉴 포트로 이주하면서이다. 뉴 포트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자들을 찾지 못한 스티픈 멈포드는 뉴 포트 침례교회에 합류했으며 곧 그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멈포트와 함께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다. 뉴 포트의 침례교회 지도자들은 토요일인 제칠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이단적이며 분파적”이라고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목사들의 이같은 비판으로 두 가정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신앙을 포기했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준수하기를 고집하는 다른 교인들은 교회의 공개 재판에 소환되어 비판을 받았다. 침례교회의 교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어렵다고 판단한 7명의 신자들이 며칠후인 16기년 12월 23일에 침례 교회를 탈퇴하고 7명의 신자들만으로 서로 거룩한 신앙의 언약을 맺고 뉴 포트의 제일 제칠일 침례교회(First Seventh Day Baptist Church of New Port)를 세웠다. 그리고 멈포드가 개종시킨 첫 사람인 윌리암 히스콕스(William Hiscox)가 그들의 첫 번째 목사로 선임되었다.1 (225.1)
 1684년에 또 한명의 영국의 이민인 아벨 노벨(Abel Nobel)이 필라델피아의 북쪽 25마일의 거리에 있는 펜실바니아의 벅스 가운티(Bucks County)에 정착하였다. 그는 콘넥티커트에서 넘어 온 한 제칠일 침례교회 신자와 접촉한 끝에 제칠일 안식일의 교리를 수용하고 곧 이웃에 사는 몇 사람을 권고하여 함께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702년에는 뉴저지의 피스카터웨이(Piscataway)의 침례교회의 집사이면서 자격증을 갖춘 설교자였던 에드먼드 던햄(Edmund Dunham)이 제칠일 안식일의 진리를 발견하고 여러 사람들을 안식일 신앙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그룹이 1705년에 신자 17명으로 피스카터웨이 제일 제칠일 침례교회(First Seventh Day Baptist Church of Piccataway)를 세우게 되었다. (225.2)
 거의 같은 시기에 펜실바니아의 필라델피아 근교에 또 하나의 제칠일 침례교회 그룹이 성장하였다. 1708년에 일단의 안식일 준수 그룹이 뉴 포트로부터 본토의 웨스터리(Westery 후에는 Hopkinton)로 이 주해와서 새로운 신앙 회중을 세웠다. 뉴욕 주의 첫 번째 제칠일 침례교회는 1780년에 로드아일랜드에서 이주해온 무리들에 의해 렌절라이어 카운티(Renselaer County)에 조직되었다. 그리고 1784년에는 콘넥티커트의 첫 제칠일 침례 교회가 뉴 런던에 설립되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기에 서부로 향하는 이민 대열에 동참한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자들은 거의 모두 로드 아일랜드와 펜실바니아와 뉴저지에 근거를 둔 초기 제칠일 침례 교회의 출신들이었다.2 (225.3)
 제칠일 침례교도들은 영국에서처럼 신대륙에서도 제칠일 안식일의 신앙 때문에 대다수의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벌금이나 금고의 형벌을 받는 경우들도 있었다.3 이러한 현실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배려로 명성이 높았던 로드 아일랜드에서도 어느 부분까지는 마찬가지였다.4 다른 한편 미국 독립 전쟁의 기간에는 뉴 포트의 제칠일 침례교도들이 안식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교회 건물을 영국 군대의 막사로 사용되는 위험으로부터 건져 낼 수가 있었다. 당시 영국 군대의 지휘관은 뉴 포트의 제칠일 침례 교회의 건물로 들어갈 때 이 교회를 숙박소로 사용할 의도를 가지고 부대를 이끌고 찾아갔었으나 교회 벽에 걸려 있는 십계명을 보고 병사들에게 교회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십계명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 걸려있는 거룩한 집을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신성 모독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5 (226.1)
 제칠일 침례교회의 대총회
 미국의 제칠일 침례 교회는 1696년에 최초로 뉴 포트에 연회를 개최하였으며 나중에는 연회 장소를 웨스털리(Westerly)로 옮겼다. 1801년 9월 11일에 로드아일랜드의 홉킨톤(Hopkinton. 이전의 Westerly)에 소집된 연회는 4개 주에 흩어진 7 교회와 12개의 집회소와 1,031명의 교인들의 총회였다. 이 연회는 연회의 공식 명칭을 대총회(General Confernce)로 결정하였다. 제칠일 침례 교회라는 교단 명칭이 채택된 것은 1818년의 일이었다.6 대총회(General Conference)를 구성하게 된 주요 동기는 선교 활동을 조직화하여 안식일의 기별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려는 것이었다.7 1818년에 이르러 이 교단은 14 교회에 교인 2,173명으로 성장하였다. 1821년에는 안식일 교리의 확산을 위해 선교잡지「제칠일 침례교회 선교 잡지」)(The Seventh-day Baptist Missionary Magazine)를, 그리고 1830년에는「프로테스탄트 파수꾼」(Protestant SentinelX 발행하기 시작했다. 1824년에는 대총회가 선교 소책자들을 시리즈로 발행할 것을 결의하였고 1828년에는 “미국 제칠일 침례교회 선교회”(America Seventh Day 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결성하였다. (226.2)
 이러한 선교 노력의 결실로 1820 연대 말에 이르러 미국 제칠일 침례 교회는 27개의 교회와 3,400명의 신자로 성장하였다.8 1835년에는 “제칠일 침례교회 일반 책자 협회”(Seventh Day Baptist General Tract society)가 결성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안식일에 관한 선교 소책자들을 시리즈로 출판하기 위하여 집필위원 3인을 선임하였다. 그리하여 1838년에는 안식일에 관한 6개의 소책자들이 각각 2,000부씩 출판되었다. 1843년에는 명칭이 “안식일 소책자 협회”(General Sabbath Tract society)로 개명되었고 다시 1844년에는 “아메리카 안식일 소책자 협회”(America Sabbath Tract society)로 개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43년에는 특별히 전체 침례교도들에게 제칠일 안식일 신앙을 호소하는 소책자 2만 부를 발행했으며 이 소책자는 나중에 안식일 관련 소책자 시리즈에 포함되었다. 1850년까지 안식일 관계로 출판된 소책자들은 17개에 달했으며 책으로 출판된 것도 6권에 달했다.9 (226.3)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재림 신자
 1843년에 소집된 제칠일 침례교회 대총회는 그해 1월 1일을 제칠일 안식일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금식 기도의 날로 선정하였다. 다음 해 대총회 모임(9월 11-15)에서는 이러한 기도가 응답되어 미주 기독교 사회에 안식일 진리에 대한 “깊고 광범위한 관심”이 나타난 사실과 10여명의 목사를 포함한 개종자들이 발생했음을 축하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10 그런데 그 개종 목사들 가운데는 윌리엄 밀러의 재림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프레데릭 휠러(Frederick Wheeler)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윌리엄 밀러의 재림 운동 단체가 발간하고 있던 선교 출판물인「밤중 소리」(The Midnight Cry)는 두 차례의 사설을 통해(1844년 9월 5일, 12일) “많은 사람들이 제칠일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에 대하여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제칠일 침례교회가 안식일을 준수하는 문제로 여론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하였다.「밤중 소리」의 사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제칠일 침례 교회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무너진지 오래된 유대의 멍에를 다시 수선하여 자신들의 목에 걸려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11 예수님의 재림이 불과 몇 주일 안으로 다가와 있는 마당에 예수의 재림을 고대하는 마음을 방해하는 어떤 무엇도 허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227.1)
 뉴 햄프셔 주 워싱톤의 감리교회 목사로서 윌리암 밀러의 재림 운동에 전념하고 있던 후 레데릭 휠러(Fredrick Wheeler) 목사는 1844년 어느 일요일의 성만찬 예식에서 설교하던 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할 책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제칠일 침례 교인으로서 나중에 나단 프레스톤(Nathan Freston)과 혼인하게 되는 중년의 여인 레이첼 오우크스(Rachel Oakos)가 앉아 있었다. 오우크스는 예배가 끝난 후에 횔러 목사와 나누게 된 대화에서 제칠일이 성경의 안식일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였다. 그 결과로 휠러 목사는 몇 주 후인 3월 첫째 토요일부터 안식일을 지켰고 그 날의 설교 예배에서 안식일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리고 1845년 초에는 휠러 목사가 돌보던 워싱톤 교구의 여러 신자들이 그의 안식일 신앙에 합류하였는데 팬스워드(Fansworth) 가족도 그 일부였다. 그리고 이때쯤에 제칠일 침례교회 여신도이던 레이첼 프레스톤은 휠러 목사의 재림 신앙을 수용했다.12 이렇게 하여 프레데릭 휠러 목사는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재림교도가 되었고 레이첼 프레스톤은 재림 신앙을 수용한 최초의 안식일 준수자가 되었다. 그리고 워싱톤에서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한 이 재림 신자들이야말로 안식일을 준수한 최초의 재림 신도들이며 이들은 곧이어 교회 건물을 매입하여 별도의 신앙 그룹을 구성하였다.13 (227.2)
 예수의 신속한 재림이 고대되던 1844년까지의 짧은 기간에 상당수의 제칠일 침례교 신자들이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긴박한 재림의 기별을 들었으며 그들은 또 그들대로 재림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안식일 기별을 전하려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을 직접 겪은 제칠일 침례교도의 한 사람이 바로 후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로 개종하여 재림 교회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크게 활동하게 된 로스웰 에프. 코트렐(Roswell F. Cottrell)이다. 그는 1844년에 윌리엄 밀러의 재림 기별을 들었으나 1851년 10월까지도 그 기별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의 창설자의 한 사람인 제임스 화잇(James White)에게 보낸 서신에서 회고하기를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적 재림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늘 믿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칠일 안식일의 진리에 매우 깊이 헌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재림의 선포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무지한 사실과 교황의 제도(일요일)에 머리 숙이고 있는” 사실만을 안타까워 했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후에「더 세컨드 어드벤트 리뷰 엔드 사바드 헤랄드」(The Second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e:재림의 재검토와 안식일의 포고)의 초판본을 통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 신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결국 그들과 합류하였다.14 제칠일 침례교회의 신자들 중에는 코트렐의 선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했으며 그 중의 하나가 더불유. 에이. 스파이서(W. A. Spicer)이다. (228.1)
 제칠일 침례교도들은 대체적으로 일요일 준수자들과 마음으로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았으며 밀러파 재림 신자들(Millerites:Adventists의 다른 말이다)은 또 그들대로 그들이 주변적인 주제로 생각하는 안식일 문제로 제칠일 침례교도들이 예수 재림의 긴박한 기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상대적으로 소수의 제칠일 침례교도들만이 밀러의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으며 또 역시 안식일을 받아들이는 밀러파 재림신자들도 많지 않았다.15 (228.2)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앙의 출현
 1844-1845년에 뉴햄프셔의 워싱톤에서 프레데릭 휠러 목사와 그의 교인들이 제칠일 안식일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지방의 한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더 이상의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미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고 서로간에 연락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안식일 준수의 재림 신자 그룹이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은 1849년 부터서야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6 (228.3)
 제칠일 안식일의 기별을 받아들인 두 번째의 밀러파 목사는 토마스 엠. 프레블(Thomas M. Preble)이었다. 1844년 여름에 안식일의 신앙을 결심한 그는 1845년 3월에 출판된 「이스라엘의 회망」(The Hope of Israel)이라는 한 선교 책자에 직접 안식일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이 글이 얼마 후에「제칠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책자」(A Tract Showing that Wie Seventh Day Should Be Observed as the Sabbath)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글과 이 책자는 밀러파 재림 신자들 전체에게 안식일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운 중요한 출판물이었다.17 (228.4)
 몇 주 후에 조셉 베이츠(Goseph Bates)는 프레볼 목사의 기사와 소책자들을 모두 읽고 혼자서 안식일 문제를 주의 깊게 연구한 다음에 안식일에 대하여 좀더 알고자 하여 뉴 햄프셔 위싱톤으로 프레데릭 휠러 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조셉 베이츠를 통해 그의 여러 재림 신앙 형제들이 안식일 교리를 수용하게 되었다. 베이츠의 한 친구는 베이츠가 휠러 목사를 방문했던 다음 날에 베이츠를 찾아와서 “뭐 별다른 소식이라도 있소?”하고 질문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이츠는 “새 소식이랄 것은 제칠일이 우리 주 하나님의 안식일이란 사실이오” 라고 대답하였다. 베이츠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이 소식의 선포에 헌신하였다. 일년 후인 1846년 8월에 그는「제칠일 안식일 영원한 표징」(The Seventh-Day Sabbath a Perpetual Sign)이란 소책자를 자신이 직접 저술하여 출판하였다.18 그리고 같은 해에 그는 안식일의 기별을 하이람 에드손(Hiram Edson)과 제임스 화잇(James White)과 엘렌 하몬(Ellen Harmon. 얼마 후에 Ellen White이 된다)에게 전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앙”(Sabbatarian Adventism)의 길을 예비하였다. (229.1)
 엘렌 하몬이 제칠일 안식일의 기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그가 재림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1846년 여름에 마사추세츠의 뉴 베드포드(New Bedford)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베이츠는 엘렌 하몬에게 안식일을 소개하였으나 엘렌 하몬은 그 당시에 안식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베이츠가 다른 것들보다 넷째 계명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일 후인 8월 30일에 그녀는 제임스 화잇과 결혼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이 신혼 부부는 베이츠의 팜플렛을 같이 연구하였고 결국 그해 가을부터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다.19 (229.2)
 엘렌 화잇은 결혼한지 몇 달되지 않은 그해 늦은 겨울의 한 계시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소 안에서 법궤의 뚜껑을 여시는 광경을 보았고 그 법궤 안에서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보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빛의 후광이 넷째 계명을 둘러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 “만약 참된 안식일이 준수되었던들 이교도나 무신론자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그녀는 이 계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14장에 있는 셋째 천사의 기별의 선포를 듣고 주 하나님의 안식일을 수용하게 될 것”을 보았다. 그녀가 안식일을 포함하는 십계명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이 계시를 본 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 제임스 화잇은 안식일 준수에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20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라는 계시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229.3)
 안식일 총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