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언약
 제6일에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참 형상과 모양에는 완전히 이르렀다고 하기에 부족한 피조물이었다. 이 사람은 제7일 안식일에 이르고서야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렀다. 제6일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한 여러 피조물의 하나였다. 축생의 하나 같은 사람이요, 축생과 구별하여 인생이라 부를 수 있는 피조물이었다. 이 사람이 제7일 안식일에 이르러 참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의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제7일에 이르러, 그리고 제7일과 더불어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됨으로써 인생은 인간으로 거듭났다. 하나님의 언약의 계명으로 거룩하게 됨으로써 인생은 인간으로 거듭났다. 제7일 안식일에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어 거듭난 인간이 하나님의 참 형상인 인간이다. (231.1)
 인생을 사람의 생물학적 호칭이라 한다면 인간은 사람의 사회학적 호칭이다. 인생은 제7일에 이르러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이라는 사회학적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과 특별한 사이가 됨으로써,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사이가 됨으로써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가 됨으로써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사람이 천륜과 인륜의 책임을 진 존재가 되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자기 사이에 이루어진 특정한 관계를 인식하는 사회학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존재가 영적인 존재이다. (231.2)
 안식일의 자녀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하여 하나님을 창조주로 찬양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사랑을 즐기는 사람이 안식일의 사람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부르는 사람이 안식일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생물학적 출생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지성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천륜의 도리로 반응하는 인간이 안식일의 자녀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혈연적인 관계와 천연적인 관계에서 피차 창조주와 피조물이 되는 그 사랑과 의를 밝히고 있는 가르침이 안식일 계명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날이 제6일이라면,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는 지식으로 태어나고 피조물의 영으로 태어난 날이 제7일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에게 대하여 아들의 도리로 반응하게 된 날이 제7일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의 천륜의 관계를 깨달은 날이 제7일이다. (232.1)
 그러나 제7일 안식일이 규정하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의 출생에 기초한 천륜적 관계뿐이 아니다. 안식일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낳으셔서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만이 아니다. “아모리 사람을 아비로 하고 헷 사람을 어미로 하여”(겔 16:3) 태어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던 날에 그 몸이 꺼린바 되어 들에 버리웠는데도”(겔 16:5)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생의 곁을 지나시다가 인생이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노니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시고(겔 16:6), 또 하나님이 당신의 “옷으로 인생을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인생에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인생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여자가 된 사람이 바로 안식일의 사람이다. 제7일 안식일의 사람은 안식일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자신에게 속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안식일의 자녀이다. 하나님에게 대하여 인륜의 도리로 반응하는 사람이 안식일의 사람이다. (232.2)
 사람의 관계에서도 부모와 자녀와 형제가 되는 천륜의 관계만이 지극한 것이 아니다. 부부가 되고 양자가 되는 인륜의 관계도 지극한 것이다. 실상 혈연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성스러운 관계가 언약의 관계이다. 어려운 가운데 제 부모와 제 자식과 제 형제에게 잘하는 사람이 존경스럽지만, 남이 낳은 자식을 잘 키우고 자기를 낳지 않은 부모를 잘 섬기며 피 섞이지 않은 이웃에게 잘하는 사람이 더 존경스러운 것이다. 이 사람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운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 더 영적인 사랑이다. (233.1)
 안식일의 언약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우리와 맺은 언약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로서 우리와 맺은 언약이다. 하나님이 “벌거벗어 적신으로 있는” 인생을 당신의 “옷으로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우리에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가 되리라고 맹세하여” 맺은 언약이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이름이다. 사람이 남편이라는 호칭으로 상대하는 사람은 아내 한 사람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창조주로서 영접되는 날이면서 동시에 사람에게 언약의 주님이신 여호와로 영접되는 날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영접하는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의 주체이신 여호와로서 언약의 파트너인 우리를 영접하시는 날이다. (233.2)
 사람은 제칠일 안식일 언약에 의하여 사회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이 되었다. 사람은 제칠일 안식일의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다. 자녀는 단순히 새끼의 높임말이 아니다. 새끼는 생물학적 차원의 존재이고 자녀는 사회적, 영적 차원의 존재이다. 암컷은 생물학적 차원의 존재이고 신부는 영적 차원의 존재이다. 사람은 안식일의 언약에 의하여 영적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이 “다 이룬” 사람이고 “된” 사람이고 “참 된” 사람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여호와라고 부를 수가 있어야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다. 흙의 사람인 제6일의 사람을 나물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언약의 사람인 제7일의 사람은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마 13:32) 사람이다. 제6일의 사람을 풀 같은 사람이라면 제7일의 사람은 나무 같은 사람이다. 제6일의 사람은 첫 사람이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며 흙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제7일의 사람은 둘째 사람이다. 둘째 사람은 언약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하늘에서 난 사람이다.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은 자이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자이다(고전 15:47-49). 흙에 속한 첫 번째 사람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둘째 사람, 언약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다. 이 사람만이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 (234.1)
 여섯 날은 창조의 날인데 제칠일은 언약의 날이다. 제칠일의 언약은 안식의 언약이다. 함께 잠을 자는 언약이다. 사람의 휴식은 두 가지이다. 생물학적 인생의 휴식이 있고 사회학적 인간이 언약의 파트너로서 취하는 휴식이 있다. 6일의 삶에서 취한 휴식과 잠은 생물로서 누린 휴식이고 잠이다. 그러나 제7일의 안식에는 생물로서의 안식 위에 언약의 안식이 추가되었다. 인간의 쉼이다. 사람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는 쉼이요 사람이 신부로서 신랑과 함께 자는 안식이다. 사람이 영적 존재가 되는 안식이요 사람이 영적 존재로서 누리는 안식이다. 사람이 제7일 안식으로 말미암아 생물학적 휴식으로서 잠을 자는 인생의 단계를 넘어 사랑의 언약으로서 잠을 자는 영적 인간이 되었다. 안식일의 쉼은 생물학적인 휴식을 넘어 영적인 언약의 쉼이다. (234.2)
 인생으로서의 사람은 어디서나 잠을 잘 수 있다. 어디서나 쉴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어디서만 자고 누구와만 자야 한다.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은 인생의 잠자는 형태이지 언약의 존재인 인간의 잠자는 도리가 아니다. 어디서나 자고 누구와만 자지 않을 때 인간의 도리는 파괴된다. 더 이상 언약의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235.1)
 이 언약에 의해 태어난 안식일의 사람은 본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이며 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이다(롬 8:29).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창 1:26) 하신 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일 언약의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기로 미리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부르신” 사람이다(롬 8:28). 하나님의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다(롬 8:28). 하나님의 소명을 입은 자이다. 아들로, 신부로, 종으로 소명을 입은 자이다. 이 사람의 전형이 안식일의 사람이다. (235.2)
 아버지가 한 아들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로” 부르듯이(롬 8:29) 하나님이 사람을 안식일의 언약을 통하여 당신의 “맏아들로” 부르시고 당신의 “신부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 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의 언약을 통하여 당신의 “맏아들”“신부”로 부른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던 것이다”(롬 8:30). 하나님이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사람이 안식일 언약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무로 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나물 같고 풀 같은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 명분 없는 인생, 책임 없는 인생이라 할 수 있다. (235.3)
 언약의 사람의 탄생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사랑의 반려로 목적한 언약의 사람은 하나님의 “가라사대” 한 마디로 쉽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여야”(롬 8:30) 하나님의 맏아들 됨이 다 이루어지고 다 마쳐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부 됨이” 다 이루어지고 다 마쳐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부르신 자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야”(엡 5:26-27) 안식일의 사람이 그 완전한 데에 온전히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235.4)
 언약의 존재는 이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제7일에 하나님의 언약한 신부와 자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희생이 필요했다. 제7일 안식일의 언약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안식일 언약의 사람은 하나님이 친히 진흙으로 내려오셔서 진흙 투성이가 되시면서 흙으로 빚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창 2:7) 비로소 눈뜨고 살아난 사람이다. 하나님이 흙사람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려”(왕하 4:34)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 사람”(창 2:7)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를 주심같이”(엡 5:25)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내주심으로써 거듭난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넣은 생명의 호흡으로”(창 2:7) 말미암아 눈뜨고 살아난 사람이다. (235.5)
 그리고 이 태초의 안식일에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듯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을 다 씻어내 듯이”(계 21:9) 자신이 진흙으로 빚은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처음 것들 곧 흙투성이의 것들을 닦아내셨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엡 5:26,27). “예수께서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듯이”(요 13:4)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사람을 씻었다.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기시듯이”(요 12:3) 하나님이 제칠일에 죽은 자나 진배 없는 흙의 사람을 거룩하게 씻으셨다. (236.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아”(요 19:34) “피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듯”(엡 5:27) 하나님이 제칠일 안식일에 죄로 죽을 흙 사람을 씻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요 9:6) 만든 이 사람을 제7일에 언약의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요 9:7) 일어나게 하셨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요 9:1)인 흙사람 아담을 “보냄을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샘물인 실로암에서 씻겨 눈뜨게 하였다. 제7일 안식일의 샘은 실로암의 샘이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피가 넘치는 실로암의 샘이 제7일 안식일 언약의 샘이었던 것이다. 제칠일의 언약은 곧 십자가의 언약이있던 것이다. (236.2)
 언약은 언제나 희생 위에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도 희생의 창조이고 하나님의 언약도 희생의 언약이다. 제칠일 안식일의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내려와 흙투성이가 되시는 희생으로 창조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같은 하나님의 희생의 샘물인 “실로암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세우신 신부이다. (237.1)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한”(엡 5:28) 날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인생을 사랑하사 위하여 자신을 내주신 날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에게 속하게 하기 위하여 희생을 무릅쓰신 날이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사람을 빚고, 그 사람의 위에 올라 그 코에 숨을 불어 넣고 실로암에서 씻어 눈뜨게 하며, 물과 피로 씻어 티나 주름잡힌 것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자기 앞에 세우신 날이다. (237.2)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행위는 신랑이 신부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태초의 안식일은 하나님이 부모나 신랑으로서 우리에게 임하신 날이며 사람이 하나님에게 자녀와 신부로 일어나 하나님을 맞이한 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신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여호와가 되는” 관계가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관계”이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사랑하는”(엡 5:28) 관계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 5:25), 하나님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사람에게 주셨던”(겔 20:12)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을 주심 같이 하나님이 자신의 안식일을 사람에게 주시는 관계이다. 지존자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시 90:1)을 사람에게 내주시는 관계이다. 부모의 은밀한 품에 안기는 사람이 자녀이고 남편의 은밀한 품에 안기는 사람이 아내이듯 하나님의 은밀한 품, 하나님의 은밀한 안식의 침소에 초대된 사람이 제칠일 안식일에 초대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안식의 처소에 초대된 사람이 안식일 언약의 사람이다. (2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