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2장—청교도 시대의 안식일과 일요일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교회사에 있어서 안식일의 날짜와 준수방식의 문제는 신학적, 철학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교리적, 실천적인 관심사였다. 17세기 영국에서 “안식일”, 또는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라는 용어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신앙과 관련된 말이 아니라 일요일을 안식일로 철저하게 지키려는 태도를 일컬어 하는 말이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일요일을 안식일로 호칭하였다. 이 시대에 “안식일”로 호칭된 날은 거의 일요일이다. 그런데 소수의 청교도들은 이들과 달리 성경에 기초하여 넷째 계명의 제칠일인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제3의 집단이 있었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앞의 두 청교도 집단의 일요일과 제칠일의 입장을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겠다는 주장을 반대하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주장에 동조했으나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으로 일요일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요일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 일요일 엄수주의자들 보다 훨씬 너그러웠다. (215.1)
 16세기 영국의 안식일과 일요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일요일을 안식일로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문제는 16세기의 엘리자베스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자베스의 행정부가 대륙의 종교개혁 방식을 교회 개혁의 모델로 삼기를 거부한 이후로 영국 교회는 카톨릭과 대륙의 개혁노선의 중간 입장을 취하는 국교회 노선과 대륙의 개혁 모델에 따른 철저한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청교도들의 노선으로 분열되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에 일요일을 넷째 계명대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교도들은 사회 개혁과 교회개혁의 차원에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를 강화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의 청교적 영향이 높아질수록 그들의 일요일 엄수주의도 함께 강화되었다. (215.2)
 엘리자베스 시대의 일반적인 일요일 신앙관과 청교도들의 일요일 엄수주의는 1580년에 영국정부가 발행하여 교회의 예배 행사 때마다 낭독하게한 한 예배 지침서에 잘 나타났다. 그 지침서의 한 부분에 의하면 “우리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 율법으로 제정된 안식일(일요일)들과 성일들이 철저히 이교도식으로 취급되고 있다. 예컨대 선술집 나들이, 술 마시기, 도박, 놀이, 곰 놀리기 등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경건을 훼손하고 인간의 본성을 불필요하게 소진시키는 일들이 이 날에 이루어지고 있다. 질서 정연한 기강의 결핍과 교리학습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젊은 교인들이나 나이든 교인들 중에 다시 교황교도로 되돌아가거나 신앙심 없는 이교도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1 (215.3)
 청교도들이 일요일 준수의 엄격성 못지 않게 지대하게 관심을 표명한 부분은 “영국민의 영적 안녕”이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이러한 관심은 영국민을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으로 생각하는 영적인 선민 의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영국은 하나님의 선택한 나라답게 거룩한 나라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585년에 영국의 국회는 일요일을 더 경건하게 지키기 위한 입법을 결의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와 교회 행정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회의 결의안에 비토권을 행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내에서 청교도들의 영향력은 계속하여 증대하여갔고 그들의 일요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도 갈수록 힘을 얻어갔다. (216.1)
 그리고 이들의 일요일 엄수주의에 가장 현저한 영향을 끼친 문서의 하나가 니콜라스 보운드(Nicholas, Bownd)의「안식일 교리」(The Doctrine of the Sabbath, plainely layed forth and soundly proved∙∙∙)였다. 그리고 보운드와 300명에 가까운 목사들은 일요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한 혐의로 성공회로부터 설교자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2 보운드에 따르면 영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고 영국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므로 이 나라가 거룩한 쉼의 날을 남용함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기강이 무너지는 형편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영국의 교회가 일요일을 지키는 방식이 철저히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안식일은 제칠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지만 그 날을 지키는 방식만은 아직도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안식일인 일요일에는 노동 뿐만 아니라 일체의 오락도 금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216.2)
 보운드는 자신의 일요일 준수 주장이 성경과 교부들과 종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기초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은 인간의 제도도 아니고 국가나 교회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제정한 제도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이므로 사람들이 양심으로 이 계명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바운드는 무엇보다도 안식일의 태고적 기원을 강조하였다. “창세기에 보면 안식일은 태초부터 있었다, 그리고 안식일은 제정되자 마자 곧 그 어떤 것들 보다도 먼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따라서 “최초의 안식일이 거룩하게 되었듯이 마지막 안식일도 거룩하게 되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 안식일을 축복하였으므로 우리도 다시 자신의 완전함을 회복하여 안식일로 하여금 자신의 마땅한 축복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야한다.”3 (216.3)
 그리고 그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인들과 이방인을 구별하기 위한 모세의 예식법 등은 복음에 의하여 폐했지만 안식일 계명은 아직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안식일의 규정에 내포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날에 하나님이 경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강론되고 성례가 옳게 이행되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공예배에 참석하여 시작부터 끝까지 남아 교육을 받아야 한다.4 (216.4)
 보운드의 문제의 책은 출판되기 바쁘게 굉장한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전역에 걸쳐 주일을 존중하고 좀더 엄숙하고 엄격하게 준수하는 영적 분위기가 형성되어갔다. 그리고 지식인들 사이에 안식일의 준수 방법을 둘러싼 논의와 토론이 가열되어갔다.5 (217.1)
 보운드의 책의 출판과 보급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주로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나왔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바운드의 입장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 그들은 보운드를 위시한 청교도들의 일요일 엄수주의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유대의 멍에”라고 비난하였다. 성공회의 목사들은 청교도의 일요일 엄수교리가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이 책에 대한 탄압을 획책하였다. 그 결과 1599년에도 대주교 휘트기프트(Whitgift)가 그 책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책을 폐기하도록 명령했으며, 1600년에도 대심판관 포팜(Popham)이 이러한 명령을 재확인하는 재판선고를 발표하였다.6 그러나 1606년에 휘트기프트가 사망하자 보운드의 책은 다시 출판되었고 그 이후로 청교들의 일요일 엄수 신앙은 더욱 기승하였다. (217.2)
 제임스 1세와 청교도들
 1603년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계승함으로써 영국에 튜톨왕조가 끝나고 스튜와트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조의 출범 이후에 오히려 국교를 신봉하지 않은 군소 교파들의 소리는 더욱 높아갔다. 벌써 30년 이상 교회의 예배와 영적 기강의 쇄신을 위해 투쟁해온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의 즉위와 때를 같이하여 “일 천명의 청원”(Millenary Petition)을 제출하여 신속하고 철저한 교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들은 이 청원에서 무엇보다도 일요일 준수의 해이를 통탄하였다. (217.3)
 그러나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그곳의 장로교회와 여러 차례에 걸처 불편한 관계를 겪어야했던 국왕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의 청원에 호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특히 청교도들의 정치적 성향과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국왕은 청교도들만 경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왕의 환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는 영국의 로마 카톨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217.4)
 “일천명 청원”을 제출했던 청교도들의 대표들은 1604년 햄톤 궁성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에서 일요일 준수의 개혁을 다시 청원하였다. 그러나 국왕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의 이렇듯 강력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반대하는 그 유명한「스포츠의 책」(Book of Sports)을 1618년에 출판하였다.「스포츠의 책」은 사실상 일요일의 엄수주의(Sabbatarianism)를 정죄하고 영국에서 대륙식의 일요일 준수를 법적으로 금지시키는 문서였다.7 (217.5)
 일요일에 모든 육체 노동과 오락활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청교도들의 주장은 세월이 갈수록 종교적인 중요성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성까지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왕실은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청교도들도 종교와 정치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왕실은 왕실의 정치적 입지를 종교에 반영시키려하였고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정치에 반영하려 하였다. 청교도들의 이같은 종교·정치적 신념 때문에 그들의 일요일 엄수주의는 로드 감독의 극심한 탄압을 불러오게 되었다. 성공회의 대감독 로드(Laud)는 제임스 1세를 계승한 찰스 1세로 하여금「스포츠의 책」의 선언을 재확인하게 하고 청교도들의 일요일 엄수 신앙을 계속하여 억누르려 하였다. 그러나 로드 감독의 통치 5년간 청교도들의 인구와 영향력은 오히려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결국 청교도들은 찰스 1세(1625-1649)와 그의 아들 찰스 2세(1660-1685)의 통치기간에 영국 국교인 성공회로 부터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218.1)
 청교도들의 계약 개념과 안식일 논쟁
 청교도 집단을 강력한 투쟁 집단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그들이 신봉한 계약의 개념이다. 이 계약의 개념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계약 개념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의 계약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계명 즉 십계명에 기초하여 하나님은 백성들의 “주 하나님이 되시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청교도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한 사람인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에 의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뜻으로서 이 율법에 의해 그 백성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하는 그 백성들의 중요한 의무이다.8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은 청교도들에게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그들에 따르면 율법은 갈바리 이후에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계속적으로 구속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청교도들은 안식일을 그같은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이며 계약의 기초로 인식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계약이 안식일 위에 세워졌다고 인식했다.9 (218.2)
 청교도들에게 하나님의 계약의 법은 “엿새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고 그 날을 거룩하게”(출 20:11)하셨을 뿐만 아니라 “너를 애굽 땅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출 20:1)의 주도적 행위의 결과이다. 즉 이 계약은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의 주도적 행위의 결과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같은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대응은 계약의 율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다.10 그리고 안식일의 준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의 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율법의 존중은 율법에 대한 노예적 일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깊히 이해하고 있었고 죄된 심령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사람의 심령이 새롭게 갱생될 때 비로소 율법의 의가 사람의 완전한 자유 안에서 성취된다고 이해했다.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창조적 권위의 표징인 안식일에 대해, 순종을 나타낸다고 하였다.12 (218.3)
 안식일의 변경에 관한 논쟁
 지금까지 우리는 일요일 준수의 방식을 둘러싸고 17세기의 영국에서 어떠한 논쟁들이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안식일의 변경을 둘러싸고 17세기의 영국에서 어떤 논쟁들이 이루어졌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에서 안식일의 변경에 관한 최초의 논쟁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5-1556)로 비롯되었다고 볼수 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게 된 영국 교회는 자신의 교리와 신앙에 일치하는 교회 예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당시 켄터베리의 대감독인 토마스 크랜머는 1549년과 1552년에 교회의 공식 예식서를 출판하였으며 이 예식서 안에 십계명의 교독문을 포함시켰다. 그런데 십계명 교독문의 넷째 계명이 특별한 문제로 등장했다. 왜냐하면 목사가 넷째 계명을 낭독할 때도 백성들은 “마음을 기울여 이 법을 지키겠나이다”라고 화답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제칠일 안식일은 일요일로 변경되었는데 교독문에는 안식일 계명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으니 그 의도는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요일을 제칠일의 준수 방식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발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