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2장—청교도 시대의 안식일과 일요일
 물론 이 십계명의 교독문에 안식일의 명령을 그대로 포함시킨 것은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게 하는 정신을 고취시킬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교독문을 낭독할 때마다 자신들의 일요일 준수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인지 아니면 로마 가톨릭의 권위에 대한 순종인지에 대해 자문하게 될 여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지로 교회 안에 제칠일 안식일의 진리를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발생하고 있었다.13 이러한 와중에서 가톨릭 측은 로마 교회가 안식일을 확실하게 변경했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도 교회에 의하여 고쳐져야 한다고 도전하고 나섰다.14 크랜머는 이러한 혼란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안식일 계명은 육체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의 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체적인 부분은 변경되었으나 영적인 부분은 변경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15 크랜머의 이러한 답변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변경 이론”(Transfer Theory) 이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신성한 제도로서의 안식일은 특정한 날과 연관되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16 (219.2)
 그러나 청교도들이 일요일을 안식일로 주장하게 된 것은 크랜머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의 일요일 엄수주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콜라스 보운드(Nicholas Bownd)에서 비롯되었다. 1630년대와 1640년대에 이루어진 안식일 논쟁의 결정적인 요소는 보운드의 “변경이론”이었다. 보운드는 “안식일이 첫 사람 아담에게 부여되었듯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부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 주님과 사도들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하였다.17 그리고 만약 아담이 타락 전에도 안식일을 필요로 했다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림을 당한 이 세계는 더욱 더 안식일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18 그는 성경의 안식일을 위하여 강력한 이론적 기초를 수립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안식일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안식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느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어야 하는 데에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문의 여지없이 안식일로 지켜야 할 한날을 제정하셨으며 그 날은 바로 창세기 2:3절과 출애굽기 20:10절에 밝혀져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제칠일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하였고 “제칠일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라”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 날을 지명하셨으므로 다른 어떤 날이 아니고 바로 그 날이 필요한 것이라” 하였다.19 (220.1)
 보운드는 성경의 이같이 명백한 가르침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제칠일 이외의 날을 지키면서 안식일 계명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하였다. 보운드에 의하면 만약 사람들이 안식일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내세우게 된다면 사람의 생각대로 날을 정하는 일을 끝도 없이 계속하게 될 것이며 각 사람들이 제 임의대로 자기에게 좋은 대로 아무 날이나 안식일로 지키게 될 것이다.20 (220.2)
 보운드에게 안식일을 지정하거나 변경하는 최후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그 날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옳고 안전한 길이다. “안식일은 언제나 제칠일 안식일이어야 하는 것이다.”21 그런데 보운드가 이처럼 주장하는 안식일은 제칠일 곧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다. 하나님은 태초에 제칠일을 안식일로 제정하셨지만 사도들의 시대에 사도들에 의해서 안식일이 주일의 첫째날로 바뀌었고 이름도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22 보운드는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그처럼 내세웠던 원칙 곧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다는 원칙으로부터 너무 벗어났다. 그는 안식일의 변경을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보다는 교회사에 더 많이 의존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요일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단지 두 개의 성경절을 인용한 반면 초대 교회의 사료들과 초대교회의 교부들을 수없이 인용하였다. (220.3)
 보운드의 안식일론 곧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처럼 준수해야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안식일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양상이었으며 그 후 300년 동안 보운드의 이 안식일론이 영국의 일요일 개혁 운동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였다. 보운드의 안식론 저서는 대다수의 청교도들에게 수용되었으며 제칠일 안식일의 주장을 반대하는 논리의 자료로 이용되었다. (220.4)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에서 일요일 엄수주의(Sunday Sabbatariansm)를 옹호한 유력한 성직자로는 이외에도 리차드 그린혼(Richard Green-horn),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리차드 버나드(Richard Bernard), 그리고 존 왈리스(John Wallis)가 있다. 이들은 보운드의 “변경 이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보운드 처럼 “변경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보다는 교회의 역사에 더 많이 의존하였다. (221.1)
 제칠일 안식일을 옹호한 청교도들
 청교도들 중에는 제칠일 안식일 곧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그룹들도 있었다. 그들은 비록 청교도 가운데 소수 그룹에 속했으나 십계명이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가진 도덕적인 계명이라는 사실과 신약 시대에 와서도 제칠일 안식일은 변경되지 않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토요일 안식일 신앙 운동을 지도한 초기 지도자의 한사람은 존 트라스크(John Trask 1583-1636)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을 신청했으나 그의 진보적인 복음신앙 때문에 거부당했다. 그리하여 국교회를 떠나 청교도 목사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므렛 잭슨(Hamlet Jackson)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다가 넷째 계명의 제칠일 안식일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소수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안식일 신앙과 선교로 말미암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신앙의 탄압으로 한때 짧은 기간 제칠일 안식일 신앙을 포기한 일도 있었으나 그의 신앙 동지들은 그의 굴복에 상관없이 굳굳하게 제칠일 안식일의 신앙을 계속했다.23 (221.2)
 1628년에 청교도들이 대주교 로드(Laud)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국교회로부터 축출을 강요받게 되었을 때 제칠일 안식일 곧 토요일 안식일을 단호하게 옹호하는 글이 데오필러스 브라본(Theophilus Brabourne)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 글은 안식일에 대한 거의 평생에 걸친 그의 연구와 집필 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30여년에 걸처 넷째 계명의 안식일을 옹호하는 네 권의 저서들을 출판했으며 두 번째의 책「가장 오래되고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거룩한 제도인 안식일을 위한 변호」(A defenence of that most Ancient, and Sacred Ordinance of Gods, The Sabbath Day)는 국왕 찰스 1 세에게 헌정된 것이었다. (221.3)
 토마스 훌러(Thomas Fuller)는 그의「영국 교회사」((가lurch History of Britain)에서 안식일 논쟁의 재연된 해를 1632년으로 지정 했고 브라본을 “이 싸움을 위해 나팔을 분 첫사람”으로 지목했다.24 브라본은 넷째 계명이 단순하고 전적으로 도덕적인 계명이며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예식적인 내용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제칠일은 기독교에서 영원히 거룩한 날이 되어야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서 안식일에 묶여 있다고 말하였다. 이 진리에서 떠나느니 차라리 생명을 버리겠다고 하였다.25 브라본은 안식일에 대한 이같은 확신을 밝힌지 얼마 되지않아 고등 종교 법정(The Court of High Commission)소환되어 안식일 신앙의 철회를 요구받았다. 그리고 이 때에 그가 개인적으로 성공회 신앙으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221.4)
 제칠일 안식일을 위한 또 한 명의 저명한 대변인은 토마스 밤프필드(Thomas Bampfield)였다. 그는 넷째 계명에 대한 구약 성경의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마태복음 5:17. 마가복음 12:28-30같은 신약 성경의 성경절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일요일 주일의 근거로 인용되는 사도행전 20:7도 비판적으로 인용하였다. 바울이 토요일 저녁에 강론을 시작하여 일요일 새벽까지 진행했음을 입증했다. 바울이 사도행전 20:7에서 결코 일요일을 지키는 전례를 남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골로새서 2:14, 에베소서 2:15,16 같은 문제의 성경절에 언급된 안식일도 십계명의 안식일이 아니라 레위의 절기 안식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요한계시록 1:9, 10“주일”은 일년에 한 번씩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을 기리는 연례적인 기념일이거나 넷째 계명의 제칠일 안식일이라고 해석하였다.26 그리고 그는 초기 기독교회부터 일요일이 준수되어왔다고 하는 교회의 전통적 주장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초기 기독교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토요일을 지켰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암브로우스(Ambrose),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스키우스(Ischius, 예루살렘의 장로), 그리고 루키우스(Lucius)의 교회사(Ecelesiastical History) 등을 인용하였다.27 (222.1)
 밤푸필드가 특별히 청교도들에게 힘든 논쟁자가 된 것은 그가 청교도주의의 기본적인 두 개의 교리에 근거하여 제칠일 안식일의 교리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가 청교도주의의 첫번째 교리로 지적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뜻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는 신념이다. 따라서 어느 날이 진정한 안식일이냐 하는 문제는 교회 전통에 의해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밝히 나타나있는 성경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28 (222.2)
 그러나 17세기의 영국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신앙은 국교의 인정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고 다수의 추종자들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박해자들 까지도 “율법의 말씀들은 그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였지만29,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자들은 급진주의자들이나 반동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낙인찍히기 일수였고 많은 경우에 이단으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222.3)
 근래에 브라이언 떠불유. 볼(Bryan W. Ball)의 연구에 의하면 17세기에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온 것보다는 훨씬 더 많았으며 그 지역도 더 광범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0 (222.4)
 17세기의 미국에 있어서 일요일과 안식일
 17세기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환경에 절망한 청교도들의 일부가 신대륙에서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피난처를 찾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을 이민 길로 내몰은 요인의 하나가 영국 사회에 편만하고 있던 일요일 준수의 태만성이었다. 그래서 신세계로 도피해온 청교도 이민자들에게는 일요일의 성수야말로 새로이 건설하려는 청교도 사회의 모퉁이 돌의 하나였다.31 이들은 일요일의 엄수를 신세계 생활 경험의 핵심적 부분으로 만들려는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일의 성수는 타협할 수 없는 신앙적 중대 사안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일요일을 엄수하는 청교도들이 정착하는 곳에서는 일요일 엄수가 그 지역의 당연한 관행으로 정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신대륙 초기 이민 시대부터 일요일의 모독을 금지시키려는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32 뉴잉글랜드 지역의 교회 순회 교구는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채택하고 이 고백에 따라 일요일을 엄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사도인 존 엘리오트(John Eliot)도 그의 개종자들에게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일요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33 (222.5)
 또 일요일을 모욕하는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규정하는 일요일 법들을 제정하는 지역들이 늘어갔다. 1629년에는 마사추세츠 주(州)가 토요일 오후 3시부터 모든 노동을 중단하여 일요일의 성수를 위해 만전을 기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였고 1650년에는 코넥티커트가 일요일 준수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으며 1658년에는 풀리머드 의회가 일요일에 짐을 나르는 사람에게 20실링의 벌금형을 부과시키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리고 1665년에는 교회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반드시 훈계하도록 하고 훈계를 듣고도 교회에서 잠자는 잘못을 고집 하면 차꼬에 묶어 세워 놓게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34 (223.1)
 이처럼 뉴잉글랜드에서는 일요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논란이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이 진정한 안식일이냐 하는 문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비록 다수 청교도들로부터 급진적이거나 심지어 이단적인 그룹으로 지탄을 받고 있었지만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려는 일부 청교도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223.2)
 역사적으로는 제칠일 침례교도들(Seventh Day Baptists)이 아메리카에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 영국 청교도들의 첫번째 그룹이다. 그들의 일부는 메이플라워(The May Flower)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 그룹의 일원이다. 침례교도들은 영국과 아메리카에서 1세기 반이 넘도록 제칠일 안식일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에 공헌했다. 1664년에 스티픈 멈포드(Stephen Mumford)가 영국으로부터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로운 땅에 제칠일 안식일의 신앙이 이주되었다. 그의 확실한 신앙적 신념의 하나는 십계명은 변경할 수 없는 도덕적인 계명이며 적 그리스도의 세력이 안식일을 제칠일로부터 주간의 첫째 날로 변경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뉴 포트에 있는 침례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그의 안식일 신앙의 추종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의 침례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쫓아 침례교회를 벗어 나와 새로이 자신들의 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제칠일 침례교회(Seventh Day Baptists Church)이다.35 뉴포트의 제칠일 침례교회는 로드 아일랜드와 콘넥티커트 일대에 있는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들의 신앙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영국에서 건너오는 제칠일 침례교도들과 로드 아일랜드 일대에서 새로 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성장해갔다.36 그리고 이 신앙 집단을 대표했던 저명한 인사의 하나는 로드 아일랜드 주지사를 역임했던 리차드 와드(Richard Ward)이다. (223.3)
 제칠일 침례교도들은 초기 아메리카 이민 사회에서 토요일 안식일 신앙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1684년에는 런던에서 이주해온 제칠일 침례교회 목사 아벨 노불(Abel Noble) 필라델피아에 교회를 세워 펜실바니아 일대에 제칠일 안식일 신앙을 대표하게 되었다.37 (2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