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의 결혼 언약 제 3 장 결혼과 성(性) 2. 성의 성서적 개념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는 성에 대한 성서적 견해에 대한 설명의 시발점이다. 인간의 성에 대한 첫 진술을 창세기 1:27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주목할 만한 것은 인간 창조 이전의 매일의 창조 행위에는 “좋았더라”(창 1:12, 18, 21, 25)고 했고, 남녀의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 씀하신 것이다. 태초에 인간의 성을 “심히 좋았다”고 한 거룩한 찬사는 성경이 남, 여의 성에 대한 구별을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완전함의 부분으로 생각하였음을 지적한다. (90.1)
 또한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두 성별,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한 이래로, 대개 신학자들은 인간 속의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이성적, 도덕적, 그리고 영적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자질들은 인간의 남자와 여자를 다른 하등 피조물로부터 구별하는 적절한 해석이 된다. (90.2)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가능한 다른 방법도 있는데 즉, 삼위 안에 하나됨이 비슷하게도 남자와 여자가 교제의 하나됨을 경험하는 데 있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고독 하게 초연해서 사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삼위는 그렇게 친밀하며 신비스럽게 연합되어 교제를 나누시는 하나님이다. 삼위의 관계에 있어서 신비스러운 하나됨이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반영되는데, 독신이 아닌 남, 여 두 성으로서의 “한 몸”이 결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스러운 연합이다. 사랑으로 연합된 부부는 마치 삼위의 세 분이 영원히 연합한 사랑을 나타내듯이, 그와 같은 의미로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게 된다. (90.3)
 ‘중성적’ 개념의 하나님?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교제에 있어서 하나 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삼위를 성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려 한다. 제 위트(Paul Jewett)는 이 견해를 밝히 말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성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전 인격을 말하기 위한 상징으로 하나님을 남, 여 두 가지 성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격의 속성은 왜곡되며 균형을 잃을 것이다. 단지 남성의 하나님은 그저 남성같이 참을 수 없고, 그리고 역시 여성에 대해서도 단순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4 (91.1)
 하나님을 남, 여 둘의 특성을 가진 통성적 존재로 여기는 시도는, 적절히 고려하지 않는 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크게 잘못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성적 특성뿐만 아니라 여성적 특성도 소유하고 계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젖먹이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사 49:15)에 비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니신 여성적 자질이 하나님을 남자/여자 양성동체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각 개인마다 남성과 여성적 자질의 정도가 다양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나 그렇다고 우리가 특이할 정도로 여성적 온유함을 가진 남자를 여자라고 간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91.2)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을 긍휼이 여기는 어머니(사 42:14, 49:15)로 비교하는 반면, 종종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렘 31:9; 마 23:9)로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의 인격(person: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다)을 나타내는 표현들과 하나님의 자질 혹은 특성(quali ties: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어머니 같은 분이다)을 말하는 표현 들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전자는 하나님의 인격을 말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어머니의 동정에 비교한 것이다. (91.3)
 오늘날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여성주의자들은 신성(Godhead)이 비인격이나 양성의 범주에 기초되어 재상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가정이나 교회에서 성적, 기능적 역할의 구분을 명쾌하게 할 수 있는 필수적인 첫 단계로 보여진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남성적 특성을 가진 하나님의 호칭들을 빼 버릴 것을 주장하고, 대신에 비인칭의 이름인 “부모, 은인, 만능자” 혹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어머니,”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들—딸”과 같은 양성동체의 이름을 채택하기를 주장한다. 그와 같은 노력의 궁극적인 결과는 같은 제품 위에 단지 상품 이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제품에 새 상품명을 도입하게 된다. 성서는 얼마는 남성이고 얼마는 여성인 양성동체의 신성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격을 여성에 비교하여 소개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성서가 계시하는 하나님을 거절하게 하고, 대신에 여성 주의자의 궤변을 받아들이게 된다. (92.1)
 앞부분에서 본 바대로, 남성과 여성의 두 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하기 위하여, 신성의 개체 안에서 성적 구별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비성서적이므로 거절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성적 구분을 초월하시나,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어떤 남성적 용어와 상징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의 남성의 역할이 당신께서 인류 가족을 부양하시는 역할을 최선으로 계시할 수 있으셨기 때문이다. 이미 연구한 바대로 인간 속의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남, 여에게 품부하신 이성적, 도덕적, 그리고 영적 능력에서 보여지고, 동시에 삼위 안의 하나됨과 비슷하게 남녀가 나누는 교제 안에서 하나됨이 나타나야 한다. (92.2)
 한 몸이 됨 (93.1)
 창세기 2:24은 남녀 사이에 친밀한 교제의 하나됨을 “한 몸”으로 표현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1장에서 이미 본대로 “한 몸”이란 구절은 결혼한 부부 사이에 몸과 정신과 영적인 면의 전적인 연합을 말한다. 이 온전한 연합은 특별히 진정한 사랑, 존경, 그리고 헌신을 표현한 행동으로서 성교를 통하여 경험될 수 있다. “한 몸”에 대한 육체적 혹은 성적 의미가, 바울이 그것을 사람과 음녀에 대한 성관계에 적용한 고린도전서 6:16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93.2)
 “한 몸을 이룸”이란 구절은 결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성을 고결하게 생각하심에 대한 중요한 빛을 비추어 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을 부부로 하여금 새로운 연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보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한 몸”의 상징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자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하여 결코 사용되지 않 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남자는 아내와 “한 몸이 되기 위하여 그의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관계는 부모에 대한 관계를 능가하는데 그것은 성적 연합으로 새롭게 하나 되는 완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93.3)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또한 성행위의 목적이 출산 곧 자녀를 낳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됨의 관계를 완성하기 위해 감정을 필요로 하는 심리학적 요소도 포함한다. 하나됨은 배우자에게 최대의 친밀한 육체적, 감성적, 그리고 지적인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서로를 앞으로 부부는 한 몸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성교가 하나됨의 친밀함을 자동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계발된 완전하고 두터운 친교의 완성이다. (93.4)
 “앎”으로서의 성
 결혼한 사람들의 성교는 부부가 다른 면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서로를 알 수 있도록 한다. 성관계에 동참한다는 것은 육체뿐만 아니라 내심의 속사람을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 관계를 “앎”으로 묘사한 이유인데,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창세기 4:1은 말한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앎)매.”5 (94.1)
 분명히 아담은 성교 이전에 이브를 알아야만 했으며, 그러나 후에 그는 전보다 더 친분이 두텁게 그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스몰(Dwigh H. Small)은 적절히 설명한다. “성교를 통한 자기의 노출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이다. 이것은 오직 배우자에게만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독점적인 표시이다. 그들은 마치 다른 사람을 모르는 것처럼 서로를 안다. 이 독특한 얇은 진정 부부 서로에게만 숨김없이 간직되어야 한다 ∙∙∙ . 벌거벗음은 육체의 한 쌍이 그들 사이에 숨겨 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의 상징이다.”6 (94.2)
 성관계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성장하는 앎이다. 처음에 친교를 이루기 위한 데이트, 청혼, 결혼, 그리고 성교, 부부가 서로를 아는 지식 가운데 이름으로 더욱 두터운 교제를 갖는다. 성관계는 서로를 앎과 교제에 있어서 성장의 완성임을 나타낸다. 아크테마 이어(Elizabeth Achtemeier)는 말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 존재의 가장 내면 깊숙이 감추어졌던 것이 겉 표면으로 나타나고 우리의 사랑의 가장 두터운 친분에 대한 표현으로 서로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임을 느낍니다.”7 (94.3)
 쾌락으로서의 성
 지난 수십 년간 성교에 관한 기독교의 생각에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현 세기의 시초까지도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성교에 대한 기본적 기능이 출산 곧 자녀를 낳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개념들로서 성교 곧, 관계적인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면으로 보는 것은 이차적이었고 추악한 죄로 여겼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순서는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은 성교의 관계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출산을 다음으로 여겼다. (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