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때는 참된 회개를 위해서는 너무 늦다. 그러므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 6:2)이라고 강권한다. 이스라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에게 준 그리스도의 말은 마태복음 23:39의 말씀과 비슷하다. (179.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179.2)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될 다른 기회를 약속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 들이 주께서 메시아—왕으로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에 그들이 멸시한 이 예수가 이스라엘의 참된 메시아적 왕이신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오직 그 때에 그들은 다시 그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복된 이”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그를 심판자로 맞게 될 것이다(마 7:21-23을 보라). 그와 같은 클라이맥스는 마태복음 23장의 여러 “화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마태복음 23:39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엄숙한 예언에는 그 직접적인 문맥이나 복음서의 더 넓은 문맥에서도 갑작스런 회심에 대한 전망이 전혀 없다. (179.3)
 덧붙여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장래에 대해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26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문맥에서 언급된 것이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폐기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복된 이”(시 118:26; 눅 19:4144 비교)로서 기쁨으로 환영받기 전에 먼저 고난 받는 종—메시아로서, 시편 118:22의 버림받은 돌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는 단지 영광스럽게 출현하는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한 기적에 기초하여 그를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이 없으시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신명기 18:15의 놀라운 메시아적 선지자라는 이유로(요 6:14) 그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요 6:15) 했을 때, 그는 그런 대관식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신다. (179.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 33).
(180.1)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을 고집하고 그리스도를 고난 받고 부활하신 메시아로 거절한다면 그들은 필연코 그를 심판자로서 만나게 될 것이다(마 8:11-12). 오직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 온 유대인들만이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에 마침내 기뻐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11:25-27에서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180.2)
 누가복음 21:24: 예루살렘은 1967년 이래로 더 이상 이방인들에게 짓밟히지 않는가?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 방인의 때가 차기가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180.3)
 세대주의 작가 펜티코스트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주석을 하였다. (181.1)
주께서는 “이방인의 때”는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권세(눅 21:24) 아래 지배당하는 시기로 정의하셨다. 이 시기는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손에 떨어진 바벨론 유수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이방의 권세가 심판을 받는 환란의 시기를 통과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방의 지배는 메시아가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끝난다.27
(181.2)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때”가 마치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 돌’(단 2:34.35, 44)에 의해, 즉 주께서 영광중에 오심으로써 이방 세계의 권세가 멸하는 것”28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방인의 때”의 종말을 1967년 6일 전쟁 당시 유대 군대가 아랍으로부터 예루살렘 도성을 재탈환 한 순간에 적용시킨다. 옥켄가. Ockenga)는 심지어 1967년 6월 6일을 레위기 26:18, 24, 28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성취에 대한 현저한 표시”29로 보았다. 거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배도한 이스라엘을 “칠배나” 더 징치하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하나의 숙어적 표현인 “일곱번”을 칠년의 상징적 해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 일을 일 년으로 보는 연일원칙을 적용하여 2556년이라는 실제적인 기간을 산출하였다. BC 588년 3월 7일에 있었던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포위를 기산점으로 하여 그 해는 정확히 1967년 6월 6일에 마친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사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181.3)
이방인의 때가 마치는 것은 당시에 살아있는 세대가 죽어 주의 재림에 관한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눅 21:23) 때이다.30
(181.4)
 다시 말해, 옥켄가는 1967년에 살아있는 세대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돌아오시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82.1)
 예언적 말씀을 연구하는 다른 학도들은 “이방인의 때”라는 예수님의 구절을 오직 AD 70년에 있었던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에만 적용하던지31 혹은 재림의 때까지 확대한다. 예를 들어, 페인(J. B. Payne)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이스라엘 군대가 1967년 구 예루살렘 도성을 함락하였지만 현재의 정책은 전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신약적 개념으로 보면 이전의 아랍 통치와 마찬가지로 ‘이교도적 이기’ 때문이다(롬 2:28; 빌 3:2).”32 (182.2)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방인의 때”—헬라어 구절에는 정관사가 없다—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올 기회의 기간으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롬 11:26)게 되리라는 바울의 말과 연결시킨다.33 그러므로 “이방인의 때”가 차면 모든 이스라엘 민족(예루살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182.3)
 누가복음 21:24로마서 11장으로 이해하는 그런 해석이 기대하는 바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정치적 부활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21:20-24의 문맥은 완전히 정치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 21:24은 이스라엘의 성소가 짓밟히리라는 것(단 8:13)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단 9:26, 27)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때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핍박과 동요의 기간이다. (182.4)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눅 21:24)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유대 백성에게 다시 AD 70년 이전처럼 회복될 것을 의미하는가? 베이커(C. F. Baker)는 “만일 이 도성이 어느 때까지 짓밟힌다면, 언젠가는 짓밟히지 않는 때가 뒤따라 올 필요가 있다∙∙∙. 만일 성경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것을 가르 친다.”34 (182.5)
 그와 같은 추론은 처음에는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성서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주석이 요구하는 바대로 성경을 성경으로 연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접속사 “까지”가 항상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까지”의 명확한 의미는 그것이 사용된 문맥에 달려 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의 말은 좀 더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183.1)
여기 누가복음 21:24에서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예루살렘을 위해 밟힐 것이라는 조건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 10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심지어 10 년 전에도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11:25; 고린도전서 11:26; 15:25; 그리고 요한계시록 2:25에 나타난 이 단어의 의미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까지라는 단어도 이 구절의 어떤 다른 단어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이든 언제든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회복에 대한 예언이 아니며 또 그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35
(183.2)
 접속사 “까지”(achri)는 본래 이전 상태를 바꾼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 사용된 용례에서 볼 수 있다.36 (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