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이스라엘에 대한 칵의 민족적 정치적 적용은 “남은 자”로 부터 그 심원한 종교적-신학적 요점을 박탈하였고, 오직 회복된 세속 국가인 현대 이스라엘만을 남겨 놓았다. 그는 현재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최후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예비 단계”일 수 있으며, 어떻게 이 나라가 “이 땅의 나라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꾸는 일에 나설 수 있는가”13에 관한 문제는 그냥 공개된 질문으로만 두고 있다. 그는 설명하지도 않은 신비한 방식으로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하고 있다.” (170.2)
 이사야 11장에 대한 공식적인 세대주의 입장은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에 나타나 있다. “이 장은 미래 왕국의 영광에 대한 예언적 묘사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윗의 아들이 영광중에 돌아올 때 세워질 것이다(723쪽).” 월부어드도 이사야 진술의 순서에 근거하여14 이스라엘의 모임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70.3)
현재 성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첫 단계이다. 이스라엘의 최후의 재회합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권능과 영광중에 통치하시기 위해 지구로 돌아오실 때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15
(171.1)
 칵과 마찬가지로 월부어드도 이사야의 “두 번째” 모임을 1948년 이후의 세속적 이스라엘에 적용시켰다. 이사야가 말한 순서(메시아의 의의 왕국이 처음이고 그 다음이 이스라엘의 모임이다)는 분명히 더 이상 문자적으로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이스라엘에게는 근본적으로 신학적 본질이 없다. (171.2)
 구약학자인 고(故) 바톤 페인(J. Barton Payne)은 근본적으로 세대주의 해석학에 속하는 이사야 예언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의 저서 성서 예언 백과사전(1973년)에서 페인은 이사야 11:11에서 약속하고 있는 첫 이스라엘의 모임은 “출애굽 때에 있었음”(299쪽)을 전제하고 있다고 간단히 인정하였다.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 민족이 “두 번째” 모인다는 예언이 과연 어느 때에 성취되는가에 있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미래의 왕국을 세우신 이후에 있을 회개한 유대인들의 재회합” 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천년 만에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심”(300쪽), “천년 만에 맞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귀환”(398쪽) 등으로 불렀다. 페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이사야 11장이 역사적으로 성취 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중동에서 있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미래의 묵시적 성취만을 지적하였다. 이사야 11:11에 대한 그의 개요는 다음의 도표와 같다. (171.3)
애굽에서 나와 첫 번째 모인 이스라엘 이사야가 예언함 → 회개한 국가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오는 “두 번째” 혹은 천년기의 모임
모세의 지도 아래 BC 700년 천년기
(171.4)
 세대주의적 문자주의의 혼란은 이사야 11장에 대한 칵의 주석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모임은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을 주목할 때 좀 더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두 번째 모임은 AD 1948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페인은 첫 번째 모임은 애굽에서 나온 것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남은 자의 성질에 대해서도 혼란이 있다. (172.1)
 칵은 오직 세속적 민족적 이스라엘만으로 움직인다. 반면에 페인은 예루살렘 도성 위에 “구름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회개할 “회개한 유대인”에 대해 말한다(140쪽). 그러나 모든 세대주의자들은 종말론적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돌아올 유대 사람들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이전의 예루살렘에 다윗 왕국을 재건하시게 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172.2)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페인이 그의 종말론적 성취에 있어서 민족적 지리적 제한을 붙들고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페인의 근본적인 주장은 교회는 지상에서 하늘로 휴거될 것이며 그 결과 메시아는 이상에서 오직 이스라엘만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페인의 전제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신약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교회가 영원히 분리된 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좀 더 주장한다. (172.3)
휴거하는 교회와 다시 모이는 유대인을 구분하는 기초는 성경의 교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다른 백성들에 의해(사 14:2; 49.22) 표준적인 수단인 대로를 이용하여 본토로 돌아온다(11:16; 35:8). 반면에 교회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행동으로 휴거를 경험한다. 그것은 큰 나팔 소리와 같은 초자연적인 요소로 알려진다(사 27:12-13; 마 24:31; 살전 4:16; “마지막 나팔” 고전 15:5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정한 지역에만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지리적인 암시가 천년기 예언을 식별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된다.16
(172.4)
 페인의 예언 해석에 대한 근본적인 비평은 그가 선입견을 문자주의 해석학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적 지리적 언급들을 변화시키고 초월하는(7장과 9장을 참조하라) 더 뛰어난 기준으로 제시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와 신약의 종말론을 옛 언약의 민족적 지리적 국면에 종속시켰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다음과 같은 페인의 진술에서 볼 수 있다. (172.5)
예를 들어, 스가랴 8:22이 많은 나라들이 주를 찾을 것이라고 언급할 때, 우리들은 그들을 스가랴 2:11에서처럼 교회 시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8 장의 나라들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를 찾고자 온다.”17
(173.1)
 그러나 스가랴 2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페인의 말과는 달리 스가랴 2:11스가랴 8:22과 다른 점이 없다. 스가랴 8장에서처럼 스가랴 2장“시온의 딸”(2:10)에 대해서 말하고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2:12)라고 언급한다. (173.2)
 더 나아가 “예루살렘” 혹은 “시온 산” 등의 지리적 명칭은 구약의 예언에서는 언제나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종교적 본질 즉 그 신학적 자격인 “거룩한” 산, “거룩한” 도성, 그리고 “거룩한” 땅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영광의 셰키나의 임재가 예루살렘이든 어느 장소이든 언약의 축복아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173.3)
 시편 46편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노래한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46:5, 7). 만일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성전을 떠나시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가 축복된 보호를 대신하게 되고, ‘거룩하지 못한’ 장소는 파괴될 것이다(레 26:31-33; 겔 89장 참조). (173.4)
 이것이 에스겔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하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동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이후에(겔 11:22, 23), BC 586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메시아 그분에게로 모이기를 거절하였을 때 다시 발생하였다(마 23:37). 그 때에 그리스도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8)고 하셨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철수하심으로써 초래된 이 형벌적 저주는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 의해 AD 70년에 이 운명의 도시에 임하였다. 메시아를 거절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되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다니엘 9:26, 27 의 예언은 극적으로 성취되었다. (173.5)
 신약은 옛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예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속죄를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자들이 “참 장막”(히 8:1, 2)과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히 12:22, 23, 24)께 나아오리라는 복음을 이스라엘과 이방인 들에게 선포하고 있다. (174.1)
 바울은 현재의 예루살렘 도성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갈 4:25) 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예루살렘은 “위에 있으며” “곧 우리 어머니”다(갈 4:26). (174.2)
 만일 세대주의가 지리적 문자주의 대신에 그리스도를 예언 해석의 안내 기준으로 취하면 더 이상 옛 시온 산을 예언의 거룩한 중심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마 12:6; 요 4:21).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셰키나의 점진적 계시가 기독교 종말론의 결정적인 원칙이다. 기독론적—교회론적 해석의 사도적 원칙은 “땅과 관련된 모든 조건들과 약속들에 대한 무분별한 영적화”18라고 불릴 수 없다. (174.3)
 단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지리적 약속이 “여러 번 반복하여 언급되 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빈도수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액면 가치를 취하고자 의도하셨다”19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문자주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예언 성취를 이해하기 위한 거룩한 기준인가? 아니면 신약에 나타난 성령의 지도 아래서 그리스도가 구약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한 기준이어야 하는가?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