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39;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영광중에 볼 때에 구원을 받는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강조 첨가; 눅 13:35 비교).
(175.1)
 세대주의 저자들은 예수께서 반 바리새인 설교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마 23:39)을 유대 신정의 회복에 대한 종말론적 약속으로 사용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당대의 세대가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단지 민족적 이스라엘을 위하여 다윗 왕국의 성취를 연기하셨다.20 월부어드는 마태복음 23:39을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들의 묵시적 재회합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간주하였다. (175.2)
그의 세대에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사실상 마지막 분산과 그들의 궁극적 재회합을 예언하셨다. 그 때에 경건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회개하면서 “복 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할 것이다.21
(175.3)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의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다만 임시적인 징벌일 뿐이다. (175.4)
 세대주의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행 9:3-6)을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 생각한다.22 펜티코스트(J. D. Pentecost)는 마태복음 23:39로마서 11: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라는 바울의 진술과 병행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여기서 로마서 11:26의 남은 자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3 고 생각하였다. (175.5)
 본문은 그 문맥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마태복음 23:39 의 문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태복음 2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곱 화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상태라는 음조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신정 이스라엘에 대한 최후의 징벌이다. (176.1)
너희가 너희 조상의 [죄의] 양을 채우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 23:32, 35, 36).
(176.2)
 이러한 마지막 심판의 성격은 그리스도의 포도원지기의 비유(마 21:33-42)에서도 분명해진다. 이 비유는 주인의 아들을 잔인하게 거절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요약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편 118:22, 23에 묘사된 건축자의 버린 돌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이다. 마태는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지도자들에게는 최종적인 것이지만 유대 나라에는 단지 일시적인 것처럼 유대 지도자들을 유대 나라에서 구별하지 않는다. 마태는 명백한 설명을 덧붙인다. (176.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나라—ethnos]이 받으리라(마 21:43).
(176.4)
 예수의 불충한 포도원지기의 비유에 대한 이 영감된 해석은 민족적 신정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거절당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독점적인 나라로서의 이 특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은 마태복음 8:11, 12에 기록된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에서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죄악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징벌은 성소와 도성의 파괴나 열방 중에 유대 백성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임재의 철회, 곧 하나님께서 그 나라로부터 그의 왕국과 언약의 축복을 거두시는 것이다. 택한 백성에게는 어떤 중립적인 입장도 가능하지 않다. 유대 백성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든지 그를 거역하든지 할 수 있었다(마 12:30).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은 구주 혹은 심판자를 대면하였다. (176.5)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
(177.1)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8, 39).
(177.2)
 “너희 집”은 그 직전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는 말씀 중에 언급하신 성전을 직접적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좀 더 넓은 개념에서 전체 도성과 나라가 복잡하게 성전과 얽혀 있다. 전체 나라가 “황폐하여” 버린바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세대를 떠나시고 심판에 넘겨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렘 7:14, 15과 비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거절과 그 멸망의 이러한 인과관계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것처럼 너희가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예수의 말씀 중에 암시되어 있다. 한 학자는 이 말씀을 “메시아가 스스로 철회하셨기에 너희 집이 버림을 받으리라”24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177.3)
 그러나 세대주의는 “너희가 ‘복 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할 때까지” 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남은 자가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실 때에 그를 인정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복 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유대인들이 그를 억지로 받아들일 것을 예언하셨는가? 그와 같은 새로운 구원의 길—“믿음으로”가 아니라 “봄으로”—은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의 핵심(롬 10:17)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그를 받아들이도록 사람의 의지나 마음을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런 것은 이미 초림 때에 하실 수 있으셨다. 재림 때에 그렇게 강제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부당한 공론에 불과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다. (177.4)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의 의지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는 자발적이고 지성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경의를 받으실 수 없다. 조금이라도 강제된 굴복은 모든 진실한 마음과 품성의 발달을 방해한다. 그것은 사람을 단지 자동 인형처럼 만든다.25
(178.1)
 유대인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에 관한 복음 기별을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을 받을 다른 길이 없다(제8장 참조). (178.2)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다소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를 보았기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닌가? 바울의 다메섹 경험은 사울을 그의 택한 도구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구주께서 나타나신 다른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갖고 모든 사람 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갈 1:12, 15, 16).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위임하셨다. (178.3)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올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7, 18).
(178.4)
 바울은 이 높은 부르심을 “성경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여”(행 9:22; 17:3; 18:5, 28) 이루었다. 그리스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있을 것과 같은 형태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울은 그 혼자만 그의 주위에서 번쩍이는 “하늘로서 오는 빛”을 보았고, 그 혼자만 그에게 말씀하시는 특별한 음성을 들었다. 반면에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행 9:7; 22:9과 비교)였다. 더 나아가 심지어 사울은 그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이까”(행 9:5; 22:8; 26:15) 라고 물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중에 이 땅으로 돌아오실 때에는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계 1:7; 마 24:30과 비교) 할 것이다. 어린 양 예수를 거절한 이들을 위하여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대신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6, 17; 히 10:29-31 비교) 라고 외치는 것을 듣는다. (1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