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예루살렘 총회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모세의 법을 지켜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논의되었다(행 15:1, 5, 6). 그 때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집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행 15:9)음을 그에게 보여주셨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11절) 고 결론을 내렸다. (160.1)
 바나바와 바울이 그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 결론을 확인한 이후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14절)을 취하셨다고 동의하였다. 야고보는 여호와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가치가 있는 구절을 사용하였다(신 7:6; 14:2; 28:9, 10; 사 43:7).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 포함된다. 야고보는 그가 이방인들을 위한 새로운 구원의 장치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선지자들[복수]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칠십인 역에서 아모스 9:11, 12을 인용하였다].” 야고보의 아모스 해석은 베드로가 요엘 2:28-32을 교회에 적용한 것을 확인해 준다(행 2:16-21). 사도 교회의 이방인 선교는 하나님이 예언하신 목적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아모스의 예언에 교회론적 적용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남은 자들인 교회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롬 11:5). 하나님은 심지어 가이사랴 사람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그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주셨다(행 10:44-47). 아모스는 에돔과 다른 나라들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회복된 이스라엘과 함께 축복을 받으리라고 명쾌하게 예언하였다. (160.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161.1)
 사도들의 총회의 결론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야고보의 관점은 아모스의 예언이 오순절 이후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아모스 예언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의 본문을 변경한 사실에 근거하여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은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의 서론적 진술에 세대주의적 사건 프로그램을 무리하게 얻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었다. (161.2)
그것은 현재의 전 세계적 증거(행 1:8) 이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를 의미한다. 야고보는 그 당시 유대인 신자들뿐만 아니하 이방인 신자들도 있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이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유대교 개종자가 될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1
(161.3)
 이러한 견해를 통해 그들은 아모스 9:11에서 연속되는 세 세대 즉

   (1) 현재의 교회 시대동안 이방인 중에서 한 백성을 불러냄,

   (2) 이 교회 시대 이후를 의미하는 “이후”의 천년기 동안 지상에 민족적 이스라엘이 다시 모여 다윗의 보좌가 회복되는 것, 그리고

   (3) 이스라엘 남은 자들과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이후2를 상상해 내었다. (161.4)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체계는 성서 주석상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 구절을 아모스서 원래의 문맥과 사도행전 15:13-15의 가장 가까운 인접 문맥과 연관시켜 살피는 책임 있는 성경 주석은 그런 세대주의적 해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162.1)
 아모스서의 배경에서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 리라는 구절은 명백하게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를 지칭한다. 그러나 월부어드(J. F. Walvoord)는 아모스 인용에 나타난 단어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행 15:16)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 후—그들의 분산과 연단—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것을 의미한다3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이스라엘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포로잡혀 간 것(암 5:27)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아모스 9장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주석을 범한 것이다. 이 심판은 아모스 자신의 시대인 BC 722년에 시작되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돌아왔고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그의 신정을 회복하셨다(슥 9:9, 10).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메시아의 대속적 희생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달려 있다(단 9:26, 27; 11장 참조). 아모스의 예언은 메시아의 초림 이후 사도 교회의 사명에서 그 계속되는 성취를 찾고 있다는 것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나타난 야고보의 논지이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돌아오셨다. 페인(J. Barton Payne)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62.2)
 이 언급[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재건함]은 그의 초림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5:16은 사도 시대 이래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것이 이 사건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도행전 15장이 구약에 적용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접붙임 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직 이르지 않은 미래를 언급하는 것일 수 없다.4 (162.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와 구주로 취임한 것에서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셨다(행 2:36; 5:31). 그리스도는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진(마 28:18) 하나님의 우편에서 계신 제사장—왕이시다(행 2:33-36; 히 1:3, 13). 다윗의 왕들이 “여호와의 보좌에”(대상 28:5; 29:23) 앉아 있는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계 3:21). 다윗의 보좌는 더 이상 비어 있거나 무효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하늘의 보좌실로 옮기셨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다윗가의 왕이시다(행 2:34-36; 고전 15:25; 엡 1:20-22). 다윗의 보좌와 여호와의 보좌는 세대주의가 추정하는 것처럼 분리될 수가 없다. 다윗의 보좌 회복에 대한 아모스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취임하심으로써 성취되었다. 이것이 사도의 기별이다. 래드(G. E. Ladd) 가 이러한 결론을 확인한다. (163.1)
야고보는 고넬료에 대한 베드로의 경험이 이방인을 방문하여 그들로부터 그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불러내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모스 9:11-12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방인 선교로 귀결된 “다윗의 거처를 다시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하늘) 보좌에 오르시어 좌정하신 것과 참 하나님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의 설립을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율법 없이 믿음으로 이끄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5
(163.2)
 아모스 9:11-12에 대한 신약의 적용은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에 대한 기독론적 교회론적 해석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흥미있는 특징이 드러난다. 아모스는 다윗 가문의 통치권이 에돔의 남은 자에 대해 실제적으로 정복하리라고 예언하였지만 야고보는 이 정치적 군사적 왕권을 이방인 사자들의 마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더 높은 영적인 정복과 통치로 바꾸어 해석하였다. 아모스의 구절 “에돔의 남은 자를∙∙∙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사도행전 15:17에서 “그 남은 사람들이∙∙∙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가 되었다. 윈가든(Martin J. Wyngaarden)은 사도행전 15:16-18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63.3)
여기서 하늘로부터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통치는 왕실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나타낸다. 에돔의 남은 자는 남은 사람들이 되었다. 에돔에 대한 군사적 소유가 아모스의 설명이 제시하는 물리적 군사행동이 없어지고 이방인들이 자원하여 주를 찾는 것으로 바뀌었다.6
(164.1)
 그는 이러한 전환을 성령께서 권위를 부여하는 신약의 영적 해석이라고 간주하였다. 우주적 사도 교회가 곧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164.2)
 이사야 11:10-12: 이스라엘의 “두 번째” 모임의 성취는 무엇인가?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국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사 11:10-12).
(164.3)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은 이것을 재림 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신정을 재건할 예언으로 해석하였다(723쪽). 월부어드는 이 이사야의 본문이 첫째는 메시아 왕국을(6-9절)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모임(10-15절)을 순서대로 묘사한다7고 하면서 미래주의를 지지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연속성에 기초하여, 월부어드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모임은 오직 메시아가 영광중에 나타나는 천년기 시작의 때에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주의적 해석은 이사야 11장에 대한 문법적—역사적 주석도, 신약의 신학적 해석도 제대로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 메시아적 예언에 대한 정연한 토의를 위해 우리는 이사야 11장

   (1) 그 자체 세대의 때,

   (2) 그리스도의 초림,

   (3) 그리스도의 재림에 연관시켜야 한다. (164.4)
 1. 이사야 11장의 최초의 성취
 이사야는 앗수르가 이미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을 유프라테스 강 저편으로 강제 이주시켰을 때(BC 721),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두 번째” 모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BC 701). 이사야는 주로 앗수르와 바벨론(그 당시는 앗수르의 한 도였음)에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중동의 나라들 가운데 “그의 백성 중에 남은 자들”을 다시 모으실 것의라는 좋은 소식을 예언하였다. 이사야는 이 미래의 모임을 이전의 모임과 명백하게 연결시켰다. 즉 모세가 기적적으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자 이스라엘은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운 통로를 갖게 되었다. (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