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0장—서양 중세 교회의 안식일과 주의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예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계명이 십계명에 포함되었느냐 하는 문제와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십계명에 포함시키면서도 기도와 명상 같은, 예배 형식에 관한 명령들은 십계명에 포함하지 않으셨느냐 하는 문제로 고심하였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문자적인 의미로만 볼 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부분적으로는 도덕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예식적이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에서 얼마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안식일 계명은 도덕적이다.∙∙∙ 육체적으로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시간의 일부를 떼어 내는 일이나 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모두 자연적인 이성의 명령에 일치한다. 그러나 창조를 기념하기 위해 제칠일 같은 어떤 특정한 시간만이 한정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안식일 계명이 예식적인 계명이다. 또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제칠일에 무덤에서 쉬실 것을 상징하고 있는 점에서는 예식적이지만 모든 죄된 행동을 멀리 하여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점에서는 일반적이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안식일이 하나님이 하늘에서 누리는 쉼을 예표한다는 신비적인 뜻에서는 역시 예식적이다.”81 (199.2)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요일 사상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당시의 일요일 준수 관습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안식일의 영적인 가치와 예배를 위하여 인간에게 안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요일 사상에 함께 결합되었다. 토마스는 중세기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네 가지 의미를 안식일 계명에도 적용함으로써 넷째 계명의 문자적, 역사적 의미는 넷째 계명의 은유적, 도덕적, 신비적 의미들로 대체 되었다.82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쉬신 사실과 죄를 멀리해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와 하늘에서 누릴 미래의 축복 등을 일깨워 주는 날이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세의 사법적인 명령들과 예식적인 명령들을 구분하고 또 그 기능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안식일의 문자적인 준수를 중대한 죄로 만들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세의 사법적인 규정들이 사문화 되었으나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 이 법률들이 필요하게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라도 그 법들을 적절히 소생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예식적인 규정들은 모세의 사법적인 규정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폐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이 예식법들을 계속해서 지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배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였다.83 (199.3)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같은 서론은 일요일 신학이 곧 안식일 계명을 둘러싼 유대교와 기독교의 논쟁에 반영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유대교의 랍비출신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부르고스의 바울(Paul of Borgos, 1350-1435)은 유대교를 공격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지적인 기독교 변증교본의 하나인 그의「성서적 심의」(Scrutinium Scripturarum)에서 기독교가 안식일을 폐기한 것을 정당화 할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이용하였다. 즉 안식일 계명은 도덕적인 계명이기 때문에 주간의 특정한 날에 묶이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84 그러나 원래의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일 뿐만 아니라 구속과 자유의 표징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에수안에서 찾는 큰 구원을 기념하기에 완전히 적합한 날이다. (200.1)
 일요일이 교회의 정당한 제도로 정착됨에 따라 일요일을 적절히 지키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도 교회의 책임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 교회의 일요일 신학의 발달의 마지막 단계는 레이몬드 페네포르트(Raymond de pennefbrt. ⓓ 1275), 길라움 드 르네스(Guillaume de Rennes, 13세기) 같은 결의론자들(Casuists)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요일법을 어기는 경우에 어떤 것이 용서될 수 없는 치명적인 죄이며 어떤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가벼운 죄인지를 정의하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일요일에 시장에 갔을 경우에 그가 상습적으로 간 것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필요 때문에 갔었다면 치명적인 죄가 되지않는다. 그러나 주교가 일요일에 시장가는 일을 계속적으로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탐심 때문에 시장에 갔다면 치명적인 죄가 되었다. 또 학생들이 다른 방식으로 배울 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공부하는 것도 큰 잘못이었다.85 (200.2)
 일요일이 교회의 합법적인 제도로 편제됨으로써 부활의 기념일로써의 일요일의 중요성은 퇴색되었다. 대신에 일요일은 개체화되었고 삼위일체와 더불어 공통성을 가장 많이 가진 어떤 특별한 축제에 봉헌된 날이 되었다.86 반면에 토요일은 성처녀 마리아의 날이 되었다.87 1905년에 클레드몬트 공회의(The Council of Clermont)는 “안식일마다 축복받은 성처녀의 임무를 낭송할”것을 명령하였다.88 구약 성경과의 연결이 끊어졌으므로 일몰부터 일몰까지 일요일을 준수하는 관행도 점차적으로 쇠퇴해졌다. 15세기에 니콜라스 시쿨루스(Nicholas Siculus.〈1445년 사망〉)는 주간의 모든 성일들은 일몰부터 일몰까지 지키되 이것과 연관하여 사람들이 유대의 관습을 따를 염려가 있으므로 일요일만은 일몰부터 일몰까지 지키는 일반적인 관행에서 예외로 취급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89 16세기에는 자정을 일요일의 기점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었다.90 (200.3)
 토요일 안식일
 중세기 말에 휴일로서의 안식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왈덴스(Waldenses)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주장들이 간혹 제기되었으나 왈덴스인들이 전체적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 같지는 않다. 베둔의 에브라르드(Ebrard of Bethune)는 그의「이단 비판서」(Liber Antiheresis)에서 왈덴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복음서를 읽는 것과 일요일을 존중하는 것과 금식기도 하는 것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와 일치한다고 하였다.91 그러나 흥미롭게도 왈덴스인들의 전도가 성공적인 지역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했다. (200.4)
 12세기와 13세기의 북부 이탈리아에는 파사기니(Passagini)라는 기독교 종파가 활약했으며 이들의 신앙이「이단 비판 총서j(Summa Contra Hae-reticos)에서 비판되었다. 왈덴스인들은 예수님의 권위만을 존중하고 특별히 산상수훈을 강조했는데 파사기니 파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존중하려 하였다. 그 때문에 파사기니파 신도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했으며 정결한 고기와 부정한 고기를 구별했다. 물론 안식일도 시내산에서 율법이 반포되기 오래 전에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날이기 때문에 마땅히 휴식과 예배의 날로 지켰다.92 (201.1)
 1420년에는 북부 프랑스에서 일단의 안식일 준수자들이 비밀 집회를 한다는 사실이 교회 당국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았다.93 두와이(Douai)에서는 16-18명이 발렌치엔나(Valenciennes)의 근처 마을에서 이들을 찾아 온 한 전도자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종교 재판관으로부터 재판을 받았다. 그들의 혐의 내용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이신 것을 믿지 않고 성례를 존중하지 않고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믿지 않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며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무가치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201.2)
 파사기니와 보헤미아의 “피카르드”인들(picards)은 중세 후기와 종교개혁시대의 여러 문서들에서 같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 상호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는가?「바리새적이고 불결한 종교의 사악함에 관한 개요」(summa-rium impiae et pharisaicae picardorum religionist] 의하면 피카르드인들 중 일부는 안식일 준수자들이었다. 그들은 왈덴스인들과 매우 가까웠다. 그들은 왈덴스인들 처럼 “복음적인 생활”(Conversation evangelica)을 갈망하였다. 그들의 원수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별로 존중하지 않았고 개인 집회에서 복음서를 해석했으며 카톨릭 교회의 방식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성만찬을 집행했다. 그들은 죽은자를 위한 기도와 연옥설을 정죄했으며 그 밖의 종교 의식들을 경멸하였다. 또 마리아와 성인들을 위한 축제등을 생략했으며 일요일만 지켰다. 그러나 일부는 유대인들과 함께 안식일을 지켰다. (201.3)
 존 위클립의 추종자들인 영국의 롤라드(Rollards)들은 안식일에 대해 큰 존경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룬델(Arundel)의 대주교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보통날과 안식일을 구별하지 않고 안식일에 일하고 먹었다.95 같은 시기의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안식일 준수자들이 보고되었다. 놀웨이에서는 1435년에 감독 아스라크 볼트(Aslak Bolt)가 “토요일 준수”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베르겐(Bergen)에 지방 공회의를 소집하였다.96 덴마크의 고위성직자인 방(Bang)주교는 안식일 준수의 재흥은 북유럽의 노르딕 국가들에서 저술된 두 개의 교리문답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 한 교리문답에는 “제칠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기억하라”고 기록되었고 다른 교리문답에는 “제칠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잊지말라”고되어있다.97 (201.4)
 러시아의 노브고로드(Novgorod)에서도 유대교 경향의 강력한 신앙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1470년과 1474년 사이에 리투아니아의 유대인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무스코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때문에 상당한 수준의 관용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와 성만찬 예식의 효력과 초기 교부들의 저술들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모세 율법의 우월성을 주장했고 하나님의 유일성과 안식일의 신성성을 옹호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 러시아 정교회의 탄압을 받았고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도 끝이 났다.98 (202.1)
 맺는말
 중세기의 안식일과 일요일의 역사는 대단히 흥미로울 뿐 만 아니라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 일요일 주일은 모세의 율법과는 전혀 관계없이 영적인 안식의 날로 출발하였다가 후에는 구약 성경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체적인 휴식의 날로 정착되었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되었던 일요일이 나중에는 종교적인 법률과 국가의 법률에 의하여 보호받는 교회의 중심적인 제도로 강화되었다. (202.2)
 그러나 또 중세기 전체에 걸쳐 유대인들의 모범에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성경 연구를 통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사실을 발견하여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분명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들은 그들의 숫자와 이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세기의 전체에 걸쳐 이들이 존재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중세기 전체에 사람의 전통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높이 존중하려는 정신의 계승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