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0장—서양 중세 교회의 안식일과 주의날
 중세 초기에 이르러 서양의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일요일을 주일로 수용했으며 안식일의 안식을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적 안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서양 기독교 신학계에 영적 안식으로서의 안식일 신학을 주도한 사람은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였다. (186.1)
 안식일 안식의 영적 해석과 일요일
 아우구수티누스(Augustine)에 의하면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은 주님의 부활과 악에 대한 주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날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획득한, 영적이며 영원한 안식의 기념일이다. 즉 일요일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일을 지키고 영원한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은 안식일이나 일요일에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중지하는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에 관한 설교에서 육체적인 뜻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과 영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비교하였다. “유대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수고 끝에 쉼을 누리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생각했으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라’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 죄를 삼가하는 뜻으로 모든 노예적인 육체의 일을 삼가하고 마음의 안식 곧 영적인 평정을 누림으로써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안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애쓴다해도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저 완전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1 동방교회의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95-C.74-9)도 네째 계명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안식일의 삶으로 이해했다.2 (186.2)
 유대교와 기독교의 논쟁에서는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이 영적인 안식일론을 중요한 주제로 내세웠다. 세빌리의 이시도레(Isidore of Seville, c. 560-636)도 그의「유대인 논박론」(Contra Judaeos)에서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영적인 안식일의 개념에 호소했다. 그는「유대인의 논박론」의 제2권에서 하나님 자신도 이 우주를 돌보시느라고 날마다 수고하시므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안식일 준수는 육체로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비록 어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뜻으로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약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면 심판 날에 그에게 죄가 발견될 것이라 하였다. (186.3)
 일부 교부(敎父)들은 일요일 주일을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의 날을 뜻하는 제8일의 개념으로 옹호하였다. 본래 제8일 개념은 영지주의 사상과 신플라톤주의 우주론이 결합하여 발생하였다. 신플라톤주의 우주론에 따르면 이 세계는 악한 천사들이 감금된 일곱 세계들과 하나님이 거주하는 제8 세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8 세계를 대표하는 날이 제8일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제8일의 개념을 일요일에 적용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제8일인 일요일은 시간과 환각의 세계를 상징하는 주간의 7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세계를 상징하는 날이다. 서방 교회는 제8일 사상을 일요일 신학의 한 요소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천년주의적 시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제7일 개념과 통합하였다. 서방 교회는 제7일로 이 세상의 마지막 천년을 상징하게하고 제8일로는 하늘의 영원한 시대를 상징하게 하였다. (187.1)
 제8일 사상은 숫자 상징을 좋아했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크게 사용되었다. 그는「신국론 神國論」(Civitas Dei)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8일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위해 준비한 하늘의 안식을 상징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제칠일은 저녁으로 말미암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거룩하게 되었고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영원한 휴식을 상징하는 날인 주님의 날 곧 영원한 제8일로 말미암아 끝날 것”3 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제8요일은 제칠일보다 더 나은 안식의 날이었다. 중세 서방교회의 첫 신학자인 대 그레고리우스(Gregory the Great:540-604)도 주간의 7일들은 이 땅의 시대를 대표하며 제8일은 주님이 그의 부활을 통해 나타낸 영원한 삶을 대표한다고 말했다.4 (187.2)
 유대교와 기독교의 논쟁에 있어서 기독교측 대변자들은 성경에서도 제 1일이 제7일 보다 훨씬 더 거룩한 날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컨데 세빌리의 이시도레에 따르면 제칠일은 성경에서 한번만 거룩하게 되었지만 일요일은 반복적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첫째날에 천사들이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부활했고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렸고 광야에서 만나가 처음으로 내렸다는 것이다.5 이시도레의 이 주장은 후대에도 수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자주 반복되었다. 비드(Bede), 라바누스 마우루스(Rabnas Maurus), 알퀸(Alcuin) 같은 중세의 중요한 신학자들도 이시도레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이시도레 자신이 교회의 여러 축제들 가운데 일요일의 서열을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첫 번째의 축제는 부활절이고 다음은 오순절, 공현축일(the Epiphany), 종려나무 일요일(Palm Sunday), 세족식 목요일(Maundy Thursday)의 순서이고 제일 끝이 일요일이다.6 (187.3)
 휴일로서의 일요일
 중세기에 이루어진 일요일 휴일 개념의 발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일요일 교리에서 일요일은 전적으로 육체 노동을 금하는 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의 일부 교부들은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와 기독교의 일요일 준수를 차별화하기 위하여 유대의 안식일 안식을 악하고 게으른 안식이라고 비난하면서 일요일의 영적인 기쁨을 대조적으로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유대인들처럼 육체적으로 게으름을 피는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켜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부질없음과 자신들의 쾌락 때문에 일하지 않는 자유시간을 갖고자 하였다. 유대인들은 스타디움에서 소리지르면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차라리 밭에 나가 유용한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그들의 아내들은 안식일에 그들의 테라스에서 부끄러움도 모르는체 춤을 추는 것보다는 안식일에 옷감을 짜는 것이 더 났다.”7 (188.1)
 일요일 예배가 이른 아침의 예배로 이행되다가 늦은 아침의 예배로 바뀌고 교회가 신도들로 하여금 예배 시간에만 일을 중지하도록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부터의 일이다. 히에로니무스(Jerom)에 의하면 베들레헴의 수녀들은 교회에서 돌아온 후에 바느질일을 하였다고 한다.8 베네스딕트 수도회의 규칙에도 몬테카지노의 모든 수도사들은 일요일에 활동을 해야 했으며 그 중 독서가 우선적으로 권고되었으나 책을 읽을 수 없으면 육체 활동을 하게 하였다.9 (188.2)
 538년에 오를레앙 공회의(Council of Orleans)는 일요일에 게으름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깊이 우려하였다. 교회는 일요일에 일을 중지시키려는 생각을 거의 갖지 않았다.10 6세기 말경 대 고레고리우스(Gregory the Great)는 교회에 유대인 방식으로 일요일을 기념하는 폐습이 스며들어와 목욕같은 필요한 일들까지도 일요일에 금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걱정하였다. 일요일의 진정한 준수는 죄를 끝이는 것이고 그러한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11 (188.3)
 6세기의 교회는 구약성경의 안식일과 기독교의 일요일을 일치시키려 하지 않았다. 구약의 안식일은 게으름과 어리석음의 날인 반면에 기독교의 일요일은 예배와 유익한 활동의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일요일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을 위해 구별된 날이고 유대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이다.12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의 준수를 위해서 넷째 계명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교회안에 일요일과 안식일에 대한 이같은 기본적인 차별인식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와 그 밖의 일부 지역에서는 토요일을 금식일로, 일요일을 기쁨의 날로 지키게 하는 관행까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일요일에는 애곡 하는 일이 금지되었다.13 (188.4)
 기독교 황제들은 일요일 규칙의 제정에 있어서도 성경에 있는 안식일의 관례를 참고하려 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일요일에 안식일을 연계시키 보다는 서로 차별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요일의 규칙을 세울 때 오히려 이교의 축제 규칙들을 참고하거나 직접적으로 차용하였다. 즉 교회는 이교의 축제 규정들을 기초하여 일요일에 금지될 일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다음날로 연기할 수 있는 농촌 노동들, 선고 판결을 위한 민사 소송, 오락 행사 등이 일요일에 금지된 활동의 목록에 포함되었다.14 교회는 공공 예배를 장려하기 위해 꾸준히 특정의 노동들을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일요일의 유대화를 반대했던 오를레앙 공회의 조차도 사람들에게 일요일에 밭갈이, 포도순 치기, 울타리 두르기, 나무심기 등을 금지 시켰다.15 대 그레고리우스도 영적인 안식을 크게 강조했지만 사람들에게 기도의 시간을 더 마련해 주기 위해 일요일에 모든 세속활동들을 중지시키도록 요구했다.16 일부에서는 완전히 유대인의 안식일처럼 일요일에 일체의 노동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188.5)
 중세 초기의 토요일 안식일
 교회가 일요일 교리를 강화하였지만 일부 지역들에서는 일요일과 제칠일을 함께 지켰다. 대 그리고리우스는 그의 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시했다: “내게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완미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우리의 거룩한 신앙과 완전히 배치되는 일부 비열한 교리 즉 제칠일 안식일에 모든 일을 금지시키는 교리를 퍼뜨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그들을 적그리스도의 전도자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이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과 일요일을 지키게 하려는 적그리스도들이 아닌가.”17 이 서한으로 미루어 볼 때 7세기초의 로마에는 제칠일에 전적으로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1)
 그러나 로마에서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과 일요일 두날을 모두 지키고 있는 이 현상은 사실상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그러한 관행들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4세기 후반에 편찬된「사도적 헌장」(Apostolic Constitutions)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과 주일의 축제들을 지키라.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요 주일은 부활의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나 베드로와 나 바울이 지정하였다. 노예들에게는 5일동안 일하도록 하라. 그러나 안식일과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경건의 교훈을 들을 수 있도록 여가를 주어라. 안식일에는 창조에 대하여, 주일에는 부활에 대하여 교훈을 듣게 하라.”18 니사의 그리고리우스(Gregrory of Nyssa. c330-c.395)는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안식일을 모독한다면 무슨 눈으로 너희가 일요일을 볼 수 있겠는가? 너희는 이 두 날이 서로 형제들인 것을 모르느냐?”라고 하였다.19 (189.2)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c.360-435)는 이집트의 수도사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주간의 다른 5일 동안에는 공식 집회를 개최하지 않고 오직 안식일과 주일에만 제3시에 모여 성찬식을 개최했다고 하였다.20 카시아누스는 같은 글에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공평히 나눠줄지라”(전 11:2)는 성경의 말씀에 기초하여 제7일과 제8일을 공평히 존중하라고 하였다. (189.3)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의 교회가 예배 규정에 대하여 대단히 신축적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지방에선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며 어떤 곳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에만 성찬식을 베풀고 어떤 지역에서는 주일에만 성찬식을 거행한다”21고 하였다. 그러나 안식일과 일요일을 같이 준수함으로써 생기는 긴장도 안식일 집회에서 행한 그의 설교에 나타나고 있다. 같은 설교에서 그는 안식일의 게으름을 반대했으며 제칠일에 대한 일요일의 우월성을 주장했다.22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구스(Socrates Scholasticus. 44년 사망)도 그의「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서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다양한 태도들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매주 안식일에 거룩한 은혜들을 기념했는데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고대의 일부 전통 때문에 교회의 이러한 관행을 중단하였다”고 하였다.23 소조멘(Sozomen)도 그의「교회사」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과 여러 다른 도시들에서는 안식일과 그 다음 날에 함께 모였으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러한 관습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24 (190.1)
 켈트 교회와 안식일
 아일랜드의 교인들은 일요일을 지켰지만 일요일을 지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안식일도 지켰다. 7세기 말엽에 콜룸바의 전기를 쓴 아돔난(Adomnan)에 의하면 콜룸바는 임종의 자리에서 말하기를 “진실로 이날은 나에게 안식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은 나의 수고로운 현세의 삶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나의 수고로운 생활을 마치고 그날에 안식일을 지켰다. 그리고 안식일에 이어지는 밤의 자정에 주일을 받들어 모셨다”25고 하였다. 그리고 동일한 작품에서 말하기를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일요일에 교회로 가서 미사를 보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콜룸바가 그의 수도승들을 위해 7세기초에 마련한 “규칙서”에는 공적인 예배일로서 주일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콜룸바가 찬양대에게 내린 규정에는 안식일 밤과 주일 밤에 다른 날 밤보다 시편 찬양을 더 많이 노래하라는 지시가 있다.26 또 안식일과 일요일에는 수도승들에게 더 나은 식사가 제공되었다. 물에 끓인 치즈 조각이 더 추가되었다.27 일요일이 중시되었지만 안식일도 무시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