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0-71을 적어도 두 번 읽은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182.1)
 1. 22-59절을 복습하라. 이 부분에서 백성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는가? 요한복음의 이 부분에서 어떤 증거들이 많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서 돌아선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가(60-66절)? (182.2)
 2. 열두 제자가 예수와 함께 머문 이유(67-69절)와, 다른 제자들이 그를 떠난 이유를 비교해 보라. 열두 제자들이 22-59절에서 예수의 다른 추종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을 이해했는가? (182.3)
 3. 성구 사전으로 사복음서에 나오는 유다에 관한 모든 구절을 연구해 보라.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렸고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그를 떠나라고 하신 것과 다름없을 때(67절), 유다가 계속 남아 있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182.4)
 ■ 말씀을 탐구함
 문단의 구조
 이 문단은 앞에 나온 강론과 대화에 대한 예수의 제자들의 반응을 제공해준다. 그 과정에 예수께서는 새로운 “출애굽,” 즉 추종자들과 제자들의 출애굽을 직면하셨다. 그는 열두 제자 외에는 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 장은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결국은 그를 배신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마쳐진다. (183.1)
 문단의 세부 사항
 이 문단은 “이 말씀(영어 성경에는 ‘teaching’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고 말하는 제자들의 불평으로 시작된다. “가르침”은 헬라어로 “말씀”(로고스; 35-59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이다)을 번역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그분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가 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들이 메시야를 찾으러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성취하실 의도가 전혀 없는 수많은 정치적, 물질적 기대감을 가지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메시야적 기대를 확증해 주는 것을 거부하셨다. 그의 관심은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백성들은 실망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에게 안주(安住)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될지 망설이게 되었다. (183.2)
 63절은 전체 장에 나타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요약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시다. 영이 없이는 우리가 예수를 필요로 하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요한이 이런 진술을 본문 속에 포함시킨 것은 특별히 주의 만찬이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예수의 의도하신 “믿는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반박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과의 관계에 전념하는 것만이 생명을 갖다주시는 성령이 오시게 한다. (183.3)
 그의 제자들 중의 몇 사람이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심으로써(64절), 예수께서는 또한 다른 제자들은 믿는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그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내적 헌신이나 그들의 결핍을 알고 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께 온전히 헌신할 때마다, 이는 그들의 삶 속에 아버지가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이다(65절). (184.1)
 많은 사람들이 예수로부터 돌아섰으나, 열두 제자는 그와 함께 남아서 오직 그만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제공하신다고 고백하였다(66-69절). 실제로 모든 신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인지 의혹이 들 때가 있지만, 예수 외에는 합리적인 방안이 부족하다는 것이 어두운 순간 내내 그와 함께 남아있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되는데, 이는 우리가 계속 그에게 나아가려고 하면 빛에 대한 인식이 곧 되돌아 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184.2)
 열두 제자들 사이에서도 진정으로 믿지 않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가룟”(Iscariot)이란 칭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그럴 듯한 것은 헬라어 형태의 히브리어 이쉬 크리요트(ish Qeryyoth), 즉 “크리요트[가룟] 출신의 사람”인 것 같다. 크리요트[가룟]는 유다의 마을이었다.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면, 유다는 유일한 유다 지역 출신의 제자였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제4 복음의 저자는 마태, 마가, 누가가 그러했던 것보다는 그에게 더 냉정하다. 그리고 유다가 언급될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문맥 가운데 언급된다(이번 경우는 살과 피[51-58절], 그리고 배신[71절]이 언급되고 있다). (184.3)
 예수의 가르침에 반응하여 어떤 이는 떠났고, 어떤 이는 옳은 이유로 머물렀는데, 유다는 잘못된 이유로 남아 있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척만 하고 있다. 그들이 교회 안에 머무는 진정한 이유는 지위, 가족과 친구의 인정, 혹은 사업상 거래를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표를 얻는 방편으로 종교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은 전부냐, 혹은 전무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든지 거절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 (184.4)
 ■ 말씀을 적용함
 1. 하나님이 6:1-15의 소년의 점심 도시락에 손을 내미신 것처럼 그대의 생애 속에서 그대의 변변찮은 재원에 손을 내미신 적이 몇 번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날 그대에게 유사한 이적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여기는가? (185.1)
 2. 인생의 태풍 속에서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한 체험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라. 이 같은 시련이 이르러 왔을 때 본능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가? 이 이야기가 미래에는 다르게 반응하도록 어떻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는가? (185.2)
 3. 현재 그대의 영적 식단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인가? 패스트 푸드(fast food)인가? 정크 푸드(junk food)인가? 고단백 식사인가? 후식인가? 음식 찌꺼기인가? 그대의 영적 식단에 어떤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185.3)
 4. 신앙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첫 번째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대의 동기에 어떤 변화가 이르러 오는가? 예수께서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시는 동기를 그대가 계속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