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A.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와 그 태도
 개별 황제들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분포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휘하에 그리고 막센티우스와 막시무스 다야(Maximus Daia) 측에 맞서 싸웠던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측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49 (132.2)
 이같은 추측의 배후에는 밀비아교(Milvian Bridge) 승리까지 이어지는 긴 내란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과 박해가 쟁점이 되었던 사실이 있다.50 리키니우스와 막시무스 다야의 대결,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대결, 그리고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누스와 이교편으로 돌아선 리키니우스와의 일전은 그리스도교와 이교간의 이념 전쟁이란 일면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51 리키니우스가 막시무스 다야와의 대결 전야에 작성했다고 하는 일신론적인 기도문은 그 이념적 성격을 명시해주는 한 실례라 할 것이다.52 (132.3)
 4. 제 XII 전격군단(Legio XII Fulminata) 내의 그리스도인 병사
 초기 그리스도교와 로마 군대의 관계에 관한 한 기원 2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가장 흥미 있는 사건의 하나가 다뉴브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제 12전격군단내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관련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마 측 사료와 그리스도교 측 사료에 빠짐 없이 취급되고 있어서 그 역사적 진실성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른바 “폭우사건”이 발생된 지 2, 3년 후에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아폴리나리우스(Apolinariuss)의 증언에 기초하여「교회사」(Historia Ecclesiatica)에서 제 12전격군단(Legio XII Fulminata)의 “폭우사건”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다.53 (133.1)
 아래에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옮겨 본다: (133.2)
“안토니우스(Antonius)의 치하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안토니우스의 형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자르(Marcus Aurelius Caesar)가 게르만족과 더불어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그의 군대가 식수를 얻지 못하여 고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부 가파토키아의] 멜리테네(Melitene)에서 모병되어 온 병사들이 우리들의 기도하는 습관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그때까지 적군들과 싸우는 동안 그들의 안전을 지켜준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이같은 광경은 그 적군들에게 이상스럽게 보였겠지만 그 보다 더 진기한 현상이 그 당장에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즉각적이며 갑작스럽게 번개가 일어 적군들을 패주시키고 궤멸시켰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군대에게는 소나기가 쏟아내려 목말라 죽게 되었던 병사들을 모두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위의 황제들의 시대에 관해 저술을 착수했던 이교 저술가들에게도 알려졌으며 또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 이교 저술가들은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 이방인들이었으므로 기적의 발생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그 기적이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기도로 말미암은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측 저술가들은 그들이 진리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단순하고도 무해한 형태로 기술하였다. 그 저술가들 중에는 아폴리나리우스(Apolinarius)도 있다. 그는 기술하기를 기도로 기적을 이룩한 그 군단은 그 사건 이후로 황제로 부터 ‘전격군단’(Fulminatrix Legio)이라는 적절한 명칭을 하사 받았다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도 가치있는 증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원로원에 라틴어로 써 보낸 그의「변증론」(Apologeticum)에서 더 유력하고도 분명한 예증을 들어 위에서 소개한 이 사건을 확인하였다. 그는「변증론」에서 말하기를 저 가장 신중한 황제인 마르쿠스(Marcus)가 자신의 서한에서 그의 군대가 게르마니아에서 마실 물이 없어 멸망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기도로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그 서한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우리들을 고발하려하는 자들을 죽음에 처하라고 위협했다고 전했다 . . . . ”
(134.1)
 전격군단의 이야기가 만약 그리스도교측 사료에만 언급되었던들 이 이야기의 사료적 가치는 크게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이방인”인 로마측 저술가들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54 이교측 증인의 한 사람인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는 그의「역사」에서 이 사건을 더 깊게 기술하고 있다.55 그러나 그는 천둥 번개와 소나기의 기적을 마르쿠스(Marcus)를 수행 중이던 이집트의 마술사 아르누푸스(Arnuphus)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디오는 또 그 이례적인 폭우 사건 때문에 로마 원로원이 마르쿠스를 일곱번째의 임페라토르(Imperator)로 선포하고 그의 아내 파우스타나(Faustina)를 “병영의 어머니”(Mother of Camp)로 선언하였다고 했다.56 (135.1)
 A.D. 176년에 건립된 “마르쿠스의 원주”(Colonna di marco Aurelio)에는 마르쿠스의 일생이 부조되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 세 장면이 문제의 “폭우”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57 여기에서는 천둥번개와 폭우가 내린 까닭이 마르쿠스의 기도 때문으로 나타나 있다. 마르쿠스 자신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주피터 플루비우스(Jupiter Pluvius)는 비의 신으로서 두 팔을 활짝 펴 폭우를 쏟아 붓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와 이교 양측이 각기 비와 천둥번개를 수반한 전승의 공로를 자신들의 신에게 돌리려함으로써 이념전쟁의 일면을 느끼게 한다. (135.2)
 그런데 로마측 자료의 어느 것 하나도 제 12 전격군단이 문제의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술을 남기고 있지 않으며 그 전투에 참가한 군단들의 이름들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전격군단은 유대전쟁의 초기인 A.D. 66년에 유대 반군에 의해 괴멸 당한 후 멜리테네에 주둔하고 있었다.58 유대전쟁에서 이 군단은 독수리 군기를 상실했으나 군기의 수호자들이 전멸했기 때문에 해체를 면했다.59 (136.1)
 마르쿠스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던 군단들로부터 병력을 차출하여 제 12군단을 재건했다. 이 군단은 또 카시우스(Avidius Cassius)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공로로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자”(Certa constans)라는 영예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60 이 해는 175년으로서 “폭우” 사건이 발생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멜리테네는 터어키의 동부 카파토키아 지방에 위치했으므로 문제의 “폭우” 사건과 연결된 다뉴브(Danube)의 전투 장소와는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 군단이 그 전투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일부 차출 병력을 파견했었을 경우에 한한 것이다.61 (136.2)
 문제의 제12전격군단에 그리스도인 병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로마측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군단이 다뉴브 전투에 참가했다는 주장도 그렇거니와 오직 그리스도교측 자료만이 이 군단 병력이 그리스도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마르쿠스가 다뉴브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공을 찬양했다는「원로원에 보낸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의 서한」(Letter of Marcus Aurelius to the Senate)은 4세기 초반에 처음으로 나타난 위작으로서 기원 311년에 반포된 갈레리우스(Galerius)의 관용령(Edict of Toleration)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62 마르쿠스가 다뉴브의 승전이 있은지 겨우 4년이 지난 후 리용-비엔나(Lyons-Vienne)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피의 박해를 안기게 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도 문제의 서한을 인정하기 어렵다. 유세비우스는 이 박해의 책임을 마르쿠스의 이복 형제인 베루스(Verus)에게 전가시키려했지만 이는 호교적 의도 때문이었던 것이다. 마르쿠스의 대(對) 그리스도인 인식은 그의「명상록」(Meditations)에 그리스도인들이 “필요에 처한” 제국의 기대를 어기고 있다고 한 언급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63 (137.1)
 이미 앞에서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통해서 보았듯이 제12전격군단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대한 교회측 첫 증언은 아폴리나리우스(Apolinarius of Hierapolis)에서 나왔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내는「변증」에서 이 사건을 간단히 기술하였다. 그는 마치 제 12군단 병력 전부가 그리스도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군단은 이 사건 때문에 황제로부터 “케라우노볼론”(κεραυνοβολον, 전격, 벼락치는)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64 그러나 이 군단의 라틴어 명칭은 완전수동분사인 Fulminata(벼락맞은)이지 현재능동분사인 Fulminatrix(벼락치는, 전격)가 아니다. 르낭(Renan)에 의하면 이 군단의 캠프가 벼락을 맞았으며 벼락맞은 장소는 외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Fulminata란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65 또 이 명칭의 유래도 아우구스투스(Augustus)황제 시대이거나 최소한 네로 황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66 이것은 유세비우스가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록을 잘못 옮겼거나 아폴리나리우스 자신이 그 군단의 명칭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37.2)
 교회측의 두 번째 증인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이다. 그는 이 사건을「변증론」(Apologeticum, 197 A.D.) 5.167과「스카플라에게」(Ad Scapulam, 212 A.D.) 4.1에서 언급하였다.68 그는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수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어디서 “폭우”사건의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며 그 기사를 상세히 전하지도 않았다. 하르낙은 아폴리나리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각각 다른 정보에 의존했다고 주장한다.69 (138.1)
 위에서 보았듯이 제 12전격군단의, 특히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대한 교회측과 로마측 증언이 일치하고 있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제 12전격군단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이 다뉴브의 콰디족(Quadians) 토벌전에 참여했다는 것이 사실로 보인다. 우선 첫째로 제 12군단의 “폭우” 사건을 최초로 증언한 사람이 아폴리나리우스인데 그는 당시 프리기아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으로서 이 군단이 주둔하고 있던 멜리테네로부터 비교적 가까운 곳에 거주했으며 콰디족 토벌 전투의 동시대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증언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멜리테네에 주둔한 제12군단은 현지에서 많은 병력을 차출했는데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대량으로 시민권이 부여된 이 주역주민들과 그 인근지역 주민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70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39.1)
 그런데 아폴리나리우스, 테르툴라아누스, 유세비우스가 각기 전격군단의 사건을 전하면서도 군복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당한 행위라는 인상을 전혀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위의 세 언급이 모두 호교론적 주장에서 나온 증언이라는 것을 참작할 때 위의 세 증인이 당시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같은 시기의 이교 철학자 켈수스(Celsus)가 군복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있음71도 함께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139.2)
 5. 그리스도인 병사 묘비
 로마군단 내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 자료로서 그리스도인 병사 묘비(墓碑)를 들 수 있다. 이미 블랑(Edmond Le Blant)은「세기에 목록」(Seguier Index)72에 나타난 4,734개의 그리스도인 묘비 중에서 겨우 27개를 그리스도인 병사의 묘비로 확인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인 묘비의 이같은 작은 비율이야말로 군직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극단적인 혐오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73 (140.1)
 레끄레르(Henri Leclercq)는 1932년에 주로 라틴 계통의 자료에 의존하여 총 176개의 그리스도인 병사 묘비들의 목록을 제시했다.74 그는 이 수치가 최소한의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직은 관련 자료가 모두 철저히 조사되지도 못했고 또 초기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나 가족의 묘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기하는 것을 기피했을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140.2)
 그러나 정작 우리의 연구 노력에 제기되는 심각한 어려움은 대부분의 묘비들이 망인의 이름과 계급, 그리고 간혹 망인이 복무했던 군단의 이름 등을 기록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어서 묘비의 건립 연대를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묘비들 중에는 간혹 당시의 황제들이나 집정관들(Consuls)의 이름이 기록된 묘비들이 눈에 띈다. 이런 경우는 묘비 주인공의 사망 연대나 복무 연대를 알 수 있다. 레끄레르는 176개의 묘비 중 150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묘비 이름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과거 50여 년간 수많은 학자들은 레끄레르의 보고에 근거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군복무를 수용했다는 주장을 펴온 것이다. (140.3)
 그러나 레끄레르의 묘비 목록 중에서 분명하게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 이전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된 것은 7개에 불과하다. 그 중 하나(nos. 29)는 기원 2세기에 속하며 여섯(nos. 12, 21, 22, 24, 46, 47)은 3세기에 속한다. 이들 7명의 묘비 주인공들 중 백인대장(Centurion)이 한사람(no. 12)이며 둘이 재소집병(Evocati)이며 (nos. 21, 22), 특혜병(Beneficarius)이 하나(no. 24), 고참병(Verteranus)이 둘(nos. 29, 46), 병졸 복무자(Milavit)가 하나로 되어있다.75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