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B. 병사순교자 열전(兵士殉敎者列傳)에 나타난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관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초기 그리스도 순교자 열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병사 순교자들은 대부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치세 중에 발생했으며 대부분 북아프리카 교회에 소속했다. (145.1)
 3세기 말경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압력이 로마 제국과 교회의 양편으로부터 가중되었다. 우선 로마 제국 쪽에서 보면 3세기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정치, 경제, 군사상의 실패들이 누적되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가중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통치 전반에 있어서, 특히 종교 관련 문제들에 있어서 보수적인 개혁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데키우스(Decius, 249-51)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모두 제국에 대한 신의 가호를 획득하여 몰락해 가는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교의 일치화를 적극 추진하였던 것이다. (145.2)
 교회 쪽에서도 급속히 팽창된 교인 인구와 팽배된 교회 조직에 기인한 긴장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대박해가 발생하기까지의 40년 기간은 교회에게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였는데 이 기간에 교회는 제국의 경계를 받을 만큼 그 세력을 크게 신장했던 것이다. 즉 260년에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는 피비릿내 나는 박해 정책을 종식하고 그 대신에 교회를 조소거리로 만들어 순복시키려는 정책을 사용했던 것인데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된 이 정책은 계속해서 실패한 반면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던 것이다. 이제 로마 제국과 교회의 대결은 불가피해졌고 이 대결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145.3)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로 말미암아 군대의 종교적 기강이 최초로 강화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시대 이전에도 그리스도인 병사의 순교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종교 문제가 점점 더 핵심 사항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절(節)에서는 병사 순교자들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살펴보려 한다. (146.1)
 초기 그리스도인의 군복무관과 관련하여 병사 순교 열전 자료가 주목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자료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그리스도인 군복무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 증거가 될 뿐 아니라 로마 군대와 그리스도인 병사 사이의 주요 갈등 요인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였다는 주장의 역사적 증거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본 절에서는 과연 종교문제가 그리스도인 병사의 유일한 갈등 요인이었는지 아니면 여타 다른 요인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146.2)
 그리스도 순교자 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병사 순교자들의 상당수는 전설이거나 그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것들로 판명이 났다.1 여기에서는 원칙적으로 무수릴로(Herbert Musurillo)에 의해 신빙성이 입증된 것으로 분류된 병사 순교자들만을 조사 대상으로 하고 다만 요즘에 와서 새로이 주목을 끌고 있는 테베 군단의 집단 순교 기사만을 예외적으로 추가키로 하였다. (146.3)
 1. 대박해 이전의 그리스도인 병사 순교자
 a. 백인대장 후보 마리누스(Marinus)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갈리에누스(Gallienus)의 칙령에 의해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시대가 끝나고 교회에 평화가 회복되어 있던 기원 260년경 (교황 Xystus 때) 가이사리아에서 군복무 중이던 그리스도인 장교 마리누스는 자신의 군복무 경력 순위에 의해 공석 중인 백인대장의 직위로 승진하게 되어 있었다. 이 때 승진 순위가 그 다음 번인 다른 후보 장교가 나타나서 법정 소송을 제기했다. “마리누스는 그리스도인 이어서 황제들에게 제사를 바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고대의 법에 의해 그 영예의 직위에 오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자기가 그 직책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리누스는 재판관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했고 재판관은 그에게 3시간의 재고할 기회를 주었다. 그가 재판정을 막 나서고 있을 때 가이사리아의 감독 데오테크누스(Theotecnus)가 다가와 그를 교회안으로 데려가서 교회의 제단 앞에서 칼과 복음서를 제시하고 그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주저없이 복음서를 선택하고 지정된 시간에 법정에 다시 출정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처형당했다.2 (147.1)
 위의 이야기를 보면 로마 군대의 장교들에게는 원칙상 그리스도교 신앙이 용인되지 않았으며 이런 문제에 관련된 뚜렷한 규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실지에 있어서는 일반 병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교들의 그리스도교 신앙도 묵인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리누스가 백인대장 후보에까지 이르는 긴 군복무를 계속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마리누스의 상관들도 그의 밀고자 만큼이나 마리누스의 그리스도인 신분과 그가 이교의 종교의식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를 묵인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를 백인대장에 승진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공식적인 고소가 행해졌을 때는 아무도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 법이 그에게 불리했기 때문이다. 평화의 시대에도 그리스도인 병사의 경쟁자가 증오심을 품을 때는 언제나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던 것이다. (147.2)
 끝으로 이 기록에서는 마리누스가 군복무에서 퇴역하는 선택도 부여받지 못하고 곧바로 처형된 점이 주목된다. 또 그의 문제는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발생했는데 가이사리아의 감독이 그에게 성경과 검의 양자택일을 요구한 사실도 주목하게 된다. 군복무 문제에 우상숭배와 유혈행위가 함께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48.1)
 b. 테베 군단(The Theban Legion)
 테베 군단의 집단 순교 기사를 전하고 있는「아카우누스 순교자들의 수난」(Passio Acaunenium Matyrum)3에 의하면 이집트의 테베(Thebes)에서 징집된 테베 군단 전체 병력이 A.D. 286년 3월에 바가우다(Bagaudae) 전투에 동원되었다가 스위스의 제네바 근처의 아카우누스(Acaunus)에서 이교 신에 대한 희생제사와 분향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바가우다 주민(Bagaudae)들에 대한 살륙 명령을 거부한 죄목으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황제에 의해 3차에 걸쳐 집단 순교를 당했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두 차례에 걸친 10인 중 1일을 처형하는 학살(Decimatio)에서 살아남은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바꾸기는 커녕 다음과 같은 서한을 황제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는 이중 충성의 입장을 밝혔다.4 (148.2)
“오 황제여, 우리는 당신의 병사입니다. 그러나 주저 없이 고백하는 바, 우리들은 또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을 위한 군복무의 의무가 있지만 . . . .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면서까지 황제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할 악행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지금까지의 관례대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못한다면 우리는 당신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들이 누구든 우리들의 손을 사용하여 그들과 싸울 것이지만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려야하는 싸움은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 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과 원수들에 대해 싸울 때만 사용될 것입니다. 신도들과 동포들을 멸하는 싸움에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사용해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항상 정의와 신앙과 무죄한 자들의 보호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이것들이 우리가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위험들의 대가로 우리들이 얻은 보상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약속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5 만약 우리가 우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약속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당신에 대한 약속들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병사로서 먼저 하나님의 깃발 아래 있으며 그 다음으로 제국의 깃발 아래 있습니다.6 우리가 첫 번째의 의무들을 파괴한다면 두 번째의 의무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생명을 보호해야할 필요성이 우리로 하여금 반역을 일으키게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 황제여 보소서! 가장 위태롭고 절망적인 시기라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당신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서게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항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이기보다는 죽는 쪽을 택하기 때문입니다.”7
(149.1)
 이같은 서한을 황제에게 보낸 다음 그들은 무장을 풀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막시미아누스는 그들 모두에게 처형령을 내렸으나 “그들은 칼로 정의를 수호하려 하지 않고” 모두 처형되는 것을 택했다.8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불복한 결과로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수효는 로마의 한 군단 병력의 수효와 동일한 6,600명에 달했다. (150.1)
 이 기사는 이 사건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박해 시대와 일치시키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으나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원문은 5세기의 리옹의 감독 유케르(St. Eucher)가 4세기 말 데오도레(Theodore) 감독이 발견한 유물을 근거로 하여 기록한 것이다. (150.2)
 근래에 이루어진 여러 연구들9에서는 상당한 이유에 근거하여 이 기사의 상당부분이 전설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나 동시에 이 전설을 가능케 한 어떤 역사적 기초가 있다고 보고 그 역사적 기초를 찾아내는 데 주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기사의 전설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사항으로서는 첫째, 테베 군단의 순교 기사가 전격 군단의 경우와는 달리 그리스도교 측 문서에만 나타나 있고, 둘째, 이 사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사건 당시로부터 1세기 반이 지난 5세기에 나타나고 있으며, 셋째, 그리스도교 측 자료에도 유세비우스나 락틴티우스 같은 당대의 역사가들에게 주목되지 않았고 넷째, 6, 600명이라는 병사 순교자들의 숫자도 군단의 실지 병력을 나타내고 있다기 보다는 로마의 군사학 교본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 등이다.10 (150.3)
 그런가하면 이 기사의 두가지 특징적 사실에 의하여 이 사건의 연대가 A.D. 286의 바가우다 전투보다 상당히 늦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첫째로 이 기사에 등장하는 세 명의 군인 순교자의 직책 이름으로 나타난 “위병장”(Primicerius), “군사 교련병”(Campidoctor), “병사 평의원”(Senator militum) 중 고대 문헌에 가장 일찍 등장하고 있는 병사 평의원의 경우가 겨우 기원 359년이라는 점이다.11 둘째는 이 세 직책이 모두 기병대의 직책인데도 이야기 자체는 보병의 이야기라는 점이다.12 콘스탄티누스 이후까지는 기병대가 광범위하게 이용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이 사건의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하는 문제들은 많다. 즉 테베 군단 자체의 연대문제13와 군율로써 열 명에 한 명 꼴로 죽이는 형벌이(Decimatio)이 A.D. 286년 이후에 철폐된 사실,14 그리고 집단 순교가 발생한 장소 등에 대한 시비가 아직도 남아있다. (151.1)
 반 베흐셍(Van Verchem)은 이같은 모든 문제를 고려하여 이 사건이 갈레리우스 황제나 막시미누스 다야 황제 시대에 동방 지역에서 발생되었으며 순교자의 숫자도 기사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적을 것으로 추정하였다.15 그러나 루이 뒤프라즈(L. Dupraz)는 반 베흐셍의 연구결과가 초판된 후에 방대한 연구서를 내어 베흐셍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는 상세한 연대적 선후관계를 제시하면서 이 집단순교가 기원 285년이나 286년 초에 우상숭배적 선서 거부로 말미암아 실지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16 (151.2)
 필자로서는 위의 주장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한다해도 최소한 이 집단 순교 기사가 5세기 로마 그리스도인 군복무관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고 5세기 그리스도교회의 그같은 군복무관의 역사적 토대를 3세기의 그리스도교회사에서 찾고자 하였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