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A.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와 그 태도
 본 항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까지의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1)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에 대한 언급이 사료에 최초로 등장하는 A.D. 170년까지, (2)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수효가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하는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 시대 (260년)까지, (3) 그리스도교와 로마제국의 일치화가 이루어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까지로 3분하여 그리스도인 군복무의 사례들과 그 경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 군복무의 중요한 사례의 하나인 제 XII 전격군단내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활동 사례와 그리스도인 병사 묘비 증거들에 관해 다룰 것이다. (119.1)
 1. A.D. 170년 이전의 그리스도인 병사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로마 군대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 하나있다. 기원 170-180년까지는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 군복무 문제로 인한 논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침묵은 그리스도인의 군복무 참여와 군복무 기피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인가? (119.2)
 일찌기 하르낙(A. V. Harnack)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이 침묵이 그리스도교회의 군복무 기피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 그리스도교는 원칙적으로 전쟁과 유혈행위를 금지하였다.

 (2) 군대의 무조건적인 충성의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무조건적인 의무가 서로 충돌했다.

 (3) 황제숭배가 군대에 특별히 심했다.

 (4) 이교의 “성물”(Sacra)로 간주되는 군기의 숭배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상숭배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5) 화관 등을 위시한 군인들의 특수 복식이나 장비 및 휴대품들이 우상숭배적 연관이 깊었으며,

 (6) 군인들의 일상 생활에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았다.1 (119.3)
 우리는 이 밖에도 목록에 여러 가지 이유들을 더 추가할 수가 있다. 로마의 군인들에게는 결혼이나 결혼 생활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금욕과 성적 탈선의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는 네로 황제(Nero 54-68) 시대 이후 로마제국에서 최소한 법률상으로는 사형으로 처벌되는 비행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며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은폐하기가 가장 곤란한 사회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 군대 내에서 그리스도인 병사가 우발적으로 적발된다면 그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 전체에 뜻밖의 재난을 초래할 위험이 상존했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인이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면 그 병사가 군대의 명령으로 민간인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와 처형에 가담해야 하는 위험이 뒤따랐다.2 (120.1)
 그리스도인의 군복무 불참은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 여건상으로도 납득되는 일이었다. 즉 당시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시대로서 로마제국의 상비 병력은 군직을 혐오하는 그리스도교 소수집단의 인력에까지 의존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3 더욱이 우리는 로마 군단 내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증인들이 나타나는 기원 170-80년의 동일 기간에 그 증언과는 반대로 군직을 기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이교도 철학자 켈수스(Celsus)의 증언을 갖고 있는 것이다.4 (120.2)
 그러나 비록 A.D. 170-180년 이후까지는 “군인” 문제가 그리스도교 사회에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로마 군인 개종자가 소수이나마 꾸준히 발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5 우리는 이미 신약성경으로부터 백인 대장 등의 군인 개종자들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눅 7:9). (121.1)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핵심 속에는 군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와 함께 유인적 요소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세계주의와 절대주의 및 유일신 사상, 그리고 구약성경의 여러 무용담과 군사적인 용어들, 군사조직에 방불케 하는 교구조직, 장소에 상관없이 신앙할 수 있는 신앙 생활의 편이성, 교리의 단순성, 신도들의 단결력 등은 모두 흡인력 있는 병사 유인의 요소들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6 (121.2)
 군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병사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가능한 한 군대를 서둘러 떠나려 했을 것이고7 또 그렇게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8 한편 군복무 기간이 25년에 달했고 탈영은 사형으로 처벌되던 그 당시 군대 생활의 형편상9 상당수가 군복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0 (122.1)
 그동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로마군단에 징집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많았다. 그러나 로마 군대에는 징집 자격이 신분적으로 제한된 정규 군단 외에 그같은 신분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보조군단(Auxilia)이 존재했다는 사실이11 확인됨으로써 이 주장은 근거를 잃었다. 그러나 비록 법률상으로는 로마 군대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입대하거나 징집될 여지가 있었다 할지라도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교 신자가 실제로 군대에 입대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로마 군대에 징집되거나 입대한 병사들이 아니라 군복무 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병사들이었다.12 (122.2)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이 병사들이 교회에 심각한 “군인” 문제를 제기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군인들은 오늘날보다도 훨씬 더 일반 시민생활과 유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병영 안에서 타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도 없었다.13 반면 거칠고 난폭한 군인 사회에 신앙이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은 교회에 기쁨을 주었고 따라서 교회는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보다는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대해서 신앙의 계율 문제에 훨씬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14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직업)에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는 바울의 권면은 최소한 이차적으로나마, 군대를 떠나지 못한 그리스도인 병사들에게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신앙상의 위험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직업에도 존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었으며 항차 종말의 날이 신속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그 어려운 병영 생활을 참고 기다리면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이 고통의 삶을 벗어날 수가 있으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의지했을 것이다. (122.3)
 이제 이 시기로부터 조금만 더 내려오는 기원 197년에 이르면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로부터 “우리들(그리스도인들)은 당신들과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 . . 우리는 모든 병영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증언15을 듣게 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사회에도 이른바 “군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23.1)
 2. A.D. 173-260년간의 그리스도인 병사
 신약성경에서 군인 개종자를 목격한 이후 우리가 최초로 사료에서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A.D. 173년에 이르러서 이다. 이것은 이른바 XII 전격군단(Legio XII Fulminata) 내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이다. 이에 대해서는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묘비 및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순교열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는 A.D. 173년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증가 현상을 알려주고 있는 그리스도교측 문헌상의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살피게 될 것이다. (123.2)
 A.D. 195년에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가 오스르호에네(Osrhoene) 부족을 토벌하는 세베루스(Severus) 황제의 원정군에 장교로 동참한 기사가 나타나 있다.16 뿐만 아니라 그는 군사적인 전문 저술까지 남긴 것으로 전한다.17 (124.1)
 또 앞장에서 보았듯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mt)는 거의 같은 시기에「희랍인에게 주는 권고」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이 농사를 짓든, 배를 타고 항해를 하든, 그리고 군복무에 종사하든 문제될 것이 없으며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하느냐의 여부라 하였다.18 몇 년 후 그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해 쓴 글에서 “군복무에 종사할 때가 아니면 남자가 맨발로 다니는 것도 가하다”고 하였다.19 그는 또 같은 논문의 “인내”라는 제목에서는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에게 교훈하면서 일찌기 침례요한이 로마병사들을 향하여 “받는 급료로 만족하라”고 했던 가르침을 인용하였다.20 (124.2)
 기원 202년경의 세베루스(Severus)황제 박해 때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바실레이데스(Basileides)라는 병사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처녀 포타미아이나(Potamiaena)양을 처형장으로 호송하고 그 처형을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녀의 순교정신에 깊이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처음에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했으나 동료 병사들이 강요하는 군인의 서약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신앙이 공개되었으며 결국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다.21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군대를 떠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유세비우스(Eusebius)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다. (125.1)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우리가 앞서 자주 언급했듯이 기원 197년에 저술한 그의「변증론」(Apologeticum)에서 “우리들[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곳 즉 도시들, 섬들, 요새들, 시장들, 모든 병영들 . . . 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호언하였다.22“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항해하며 전쟁을 치른다”고 했다.23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 휘하의 제 12전격군단(Legio XII Fulminata)에 속해 있던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소나기가 내려 군단 병사들이 기갈을 면하고 적군을 격퇴시킨 사건도 소개했다.24 (125.2)
 그는 또 그리스도인은 군복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글에서 군복무를 계속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세, 아론, 여호수아, 심지어는 침례요한의 실례까지 쳐들면서 자신들의 군복무를 정당화 하려한다고 비난하였다.25 (125.3)
 그는 기원 211년경에 그리스도인의 군복무를 반대한 그의 유명한「병사의 화관론」(De Corona Militis)을 집필했다. 우리는 그의 집필 동기를 밝히는 부분을 통해서도 당시 북아프리카에 수많은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존재했으며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군복문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