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A.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와 그 태도
 「병사의 화관론」에 따르면 기원 211년에 카라칼라(Caracalla)와 제타(Geta)가 황제의 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누미디아(Numidia)에 있는 병사들에게 황제의 하사금이 전달되고 있을 때 한 그리스도인 병사가 마땅히 머리에 쓰도록 규정되어 있는 화관을 착용치 않겠다고 고집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이교도 병사들은 물론이고 동료 그리스도인 병사들과 심지어는 일부 민간인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 병사를 말렸다. 이들은 화관을 쓰지 말라는 교훈이 신약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병사가 그같이 과격하고 무모한 고집을 꺽지 않는다면 군대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군대 밖의 그리스도인 사회에까지 박해의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고 비난하였다.26 (126.2)
 하르낙(Harnack)은 이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126.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그리스도인 병사 한 사람이 과격한 신앙 표시를 함으로써 그의 동료 병사들(또는 그 지역 전체 교회에까지)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군복무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의 병사가 폭 넓게 정죄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회가 그리스도인의 군복무에 전혀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결론의 증거로 삼으려는 것은 하나의 과장이다.”27
(126.4)
 단지 군복무 중에 있던 그리스도교 병사들이 군대의 규칙을 준수하고 군대의 의식에 참가하는 행위들이 참아줄 수 있는 일로 참작됐을 뿐이며 교회는 신약성경 누가복음 3장 14절에서 침례 요한이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한 말씀에 근거하여 한쪽 눈을 감아 주고 있는 데 불과했다는 것이다.28 (127.1)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기원 250년 데키우스(Decius) 황제 박해 때 켈레리누스(Celerinus)라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두 숙부가 군인으로서 순교했다고 전했다.29 하르낙은 이 두 병사가 순교하기 전에 군대를 떠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30 (127.2)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을 유세비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는 재판에 동원되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한 작은 분견대(συνταγμα στρατιωτικον) 대원 전원이 그리스도인들이었거나 그들의 친구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혐의로 심문을 받고있던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부인할 낌새를 보였을 때 그 병사들은 일제히 치를 떨면서 온갖 손짓과 몸짓으로 (신앙을 거부하지 말도록) 신호를 보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같은 행동에 주목하게 되자 그들은 체포되기에 앞서 피고석으로 달려나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31 (127.3)
 그리스도인을 재판하기 위해 특별히 그리스도인 병사들만을 차출했어야할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당시 이집트 북부의 군대사회에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의 하나라 하겠다. (128.1)
 그러면 이같이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증가한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A.D. 180년경에 이르면 로마제국 주민의 상당수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며 제국 주민의 그리스도교화 경향이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32 둘째로 켈수스(Celsus)의 예로 대표되는바 이교도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시민 윤리 의식이 자극받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국경 불안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자극했다.33 (128.2)
 셋째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38) 황제이래 로마 군대의 병력은 부대가 주둔해 있는 지역의 주민들 중에서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자연히 그리스도인들도 징병 대상이 되었다.34 넷째로 징집령을 받았다해도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교환규정에 의해서 입대하지 않고 대신 돈으로 대역을 사서 입대시킬 수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징집율은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로 세베루스 조(朝) 황제들의 군대 제일주의적 우대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 중에 군대 내의 여러 가지 종교적, 도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군복무를 기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겼을 것이다.35 (128.3)
 이상과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 병사가 그 이전의 기간에 비해 많아졌고 이로써 교회에 “군인” 문제가

 (1) 군대에서 개종한 군인은 군복무를 계속해도 되는가 하는 기존의 문제 외에

 (2) 그리스도인이 지원입대 또는 강제로 징병되어 군복무를 해도 괜찮은가, 또 군대에 복무할 수 밖에 없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 신앙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형태로 추가되었다. 이에 대한 대답을 두고 교부들의 태도가 강온(强穩)으로 나누어진다.36 (129.1)
 그러나 이 때까지는 이 문제의 양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로마 군단들이 관례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변경지에서 보다는 제국의 후방 지역에서 더 활발했으며 3세기의 황제들이 게르만족 출신자들로 로마의 병력을 보충하는 데에 상당히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징병의 압력이 경감되었기 때문이다.37 (129.2)
 3. 갈리에누스 황제(Gallienus: 260-68)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306-37) 시대까지의 그리스도인 병사
 그리스도인 병사와 장교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 때부터 인 것 같다.38 신앙 박해자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의 아들인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선제(先帝)의 정책을 바꾸어 교회에 일정한 자유와 안전을 허락하였다.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다시 반환해주었고 교회의 법률적 권한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이교의 부흥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쇠퇴시키려는 전략적인 유화책이었을 뿐이다.39 (129.3)
 이 때로부터 대박해 때까지 교회는 40년에 걸친 긴 평화를 누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의 부제(副帝)들의 치세에 들어와서는 교회에 대한 제국의 관용적 태도가 한 걸음 더 나아가 호의쪽으로 발전하는 기미까지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이 관직에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이교적인 제사의 의무가 면제되었다.40 (130.1)
 군대의 태도도 비록 황실이나 민간 행정부보다는 더 비타협적이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훨씬 더 유화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스도인 장교들에게 희생제사의 의무가 공식적으로 면제되지는 않았으나 암암리에 면제되거나 또는 이교 제의에 참석한 그리스도인 장교들이 양심의 가책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교의 제의에 앞서 십자가를 긋는 행위들이 묵인되었다.41 (130.2)
 A.D. 295년 3월 12일 마우레타니아(Mauretania)에서 결국 순교하게 되는 징집병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를 심문하던 총독 디온(Dion)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콘스탄티우스와 막시무스의 근위대(Comitatu)에 많은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복무하고 있다”고 말했다.42 (130.3)
 그러나 디오클레아누스의 부제(副帝)이면서 골수 이교도인 갈레리우스(Galerius)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결심했다. 유세비우스는「교회사」 제 8권의 부록에서 말하기를 갈레리우스는 대박해가 일어나기 오래 전에 강등, 학대, 처형의 위협을 통해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퇴역을 강요했다고 했다.43 갈레리우스는 302-3년 겨울을 노쇠하고 병약한 다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보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궁정과 군대로부터 숙청하도록 그를 부추겼다. (130.4)
 대박해의 배경에는 군사 점복관(占卜官)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리스도교 병사들이 이교 의식에 참석하여 십자가 성호를 그음으로 말미암아 점괘가 잘 안 나타난다고 불평했기 때문이다.44 이로써 이때까지 그리스도교 신앙과 로마 군대의 종교 규칙을 함께 만족시켜 주었던 하나의 타협 즉 그리스도인 병사는 군대의 종교의식에 참석은 하되 십자가 성호를 긋는 행위는 묵인 받는다는 관례가 깨진 것이었다. (131.1)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대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 첫 번째 공격 목표가 군대 내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한다.45 이것은 단지 군대 내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 자세가 결코 느슨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함축하고 있다. 303년에는 멜리테네(Melitene)와 시리아에서 대박해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반란이 있었다.46 막시미누스 2세(Maximinus II)는 병력의 격감을 막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병사의 퇴역을 강제로 금지했다.47 그리고 한참후의 일이지만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마지막 결전을 수행하면서 휘하 군대에서 그리스도인 병력을 숙청했다.48 이 모두는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신앙심이 만만치 않았다는 실례들이다. (131.2)
 갈레리우스는 끝내 그리스도교 박해를 포기했다. 311년 그는 원인 모를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가운데 마지못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한 것이다. 그후 수개월 안에 콘스탄티누스는 로마군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의 표지들을 부착케 했다. (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