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회의는 토요일에 고기를 먹는 관습을 잘못으로 규정하고 대신에 토요일을 금요일과 함께 금식일로 삼았다.77 그리고 일요일이나 절기들을 저녁부터 저녁까지 지키는 습관도 잘못으로 규정하고 로마 교회의 관습을 따라 자정부터 자정까지 지키도록 하였다.78 일요일 자정부터 월요일 자정까지 일을 쉬어야하는 의무가 시작되었다.79 여러 법령들 속에서 안식일과 일요일의 긴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163.1)
 그런데 17세기말에 이르러 이들이 안식일을 준수한 일부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1673년경 프랑스 사람 C. 델론(C. Dellon)이 인도를 여행하다가 종교재판에 의해 수감되었다. 고아의 종교 재판관들과 종교재판에 그를 고소한 사람들은 그를 “유대의 안식일을 고집했다”는 죄목으로 기소하고 투옥했다.80 “유대교적 혐의의 기소에는 돼지와 토끼와 비늘없는 물고기를 먹지않는 등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장소에 참석하여 유월절 양고기를 먹었다”는 혐의가 포함되어있었다.81 (163.2)
 최소한 두 사람의 저술가는 델론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인도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결론했다.82 1599년에 디암페르 공회의가 소집되기 전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안식일 준수자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가? 포루투갈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로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새 그리스도인들”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이들 “새 그리스도인들은” “오래된 교인들”로부터 늘 그 신앙의 진성성을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준수같은 유대의 옛 신앙 관습을 남몰래 행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틀림없이 이러한 “새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가 포루투갈에서의 힘든 생활을 피할 생각으로 폴루투갈의 식민지인 인도를 건너왔을 것이다.83 (163.3)
 아르메니아와 안식일
 기독교가 아르메니아에 선교된 것은 3세기 초엽이다.84 491년의 바가르사바드(Vagharshabad) 공회의에서 아르메아 교회가 칼케톤 공회의를 정죄한 이후에 아르메니아 교회는 엄격 하게 “단성론”(Monophysite)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웃의 희랍 정교회(Greek Orthodox)와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비잔틴 황제 헤라 클리우스(610-641)가 아르메아인들과 비잔틴인들을 통합시켰을 때 단성론파 신앙(Monophysitism)은 그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625년에 황제 콘스탄스 2세(641-688)가 데윈(Dewin 또는 Tevin)을 방문했을 때 본당 교회의 일요일 예배에서 칼케톤 공회의의 결정이 엄숙히 선포되었다.85 (163.4)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4세기 부터 안식일과 일요일이 나란히 준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세기에 퀴니섹트 공회의(Quinisext Council)에 참석한 성직자들은 그들이 “아르메니아와 다른 지역들에서 어떤 사람들이 사순절의 안식일들과 주일들에 계란과 치즈를 먹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 회의는 “모든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전체 교회는 한 규칙을 따라야 하는데 그 규칙은 바로 희랍 정교회의 규칙이라”고 결정하였다.86 (163.5)
 그런데 그 때로 부터 몇 년이 지난 719년에 아르메니아인들은 데윈(Dewin)에 공회의를 소집하여 자신들과 희랍교회 사이에 좀더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순절의 기간에 안식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날에 물고기와 기름과 계란과 버터를 먹지 않기로 결정하였다.87 728년에 소집된 마나즈케르트 공회의(Council of Manazkert)에는 모든 아르메니아 교회의 모든 주교들과 일부 야곱파 교회 주교들이 참석했는데 이 공회의는 “칼케톤 회의의 결정을 다시금 부인하고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5일간을 금식하는 기간으로 삼는 관습을 회복시켰으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종교적인 모임의 날과 축제의 날로 삼았다.”88 이 행위를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이전에 안식일의 준수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잊혀졌었던 것 같다. 아마 안식일은 종교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날이 아니라 금식하지 않는 날 정도로 취급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나즈케르트 공회의가 안식일을 축제와 종교적인 모임의 날로 회복시켰던 것이다. 이 공회의의 이같은 결정은 그 때 이후로 계속해서 존중 되었다.89 (164.1)
 십자군 전쟁 기간에 아르메니아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접촉은 결국 아르메니아 통합교회(Armenian Uniates 또는 United Armenians)의 출현을 이끌어냈다. 아르메니아 통합교회는 자신들의 모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로마 교회에 소속되었다. (164.2)
 14세기초에 한 에디오피아 수도승이며 새로운 수도원을 건설한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c, 1273-1352)는 에디오피에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이로와 예루살렘과 키프러스를 전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남은 생애 14년을 그곳에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초기부터「사도들의 교훈」(Didascalia Apostolorum)과 유사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다른 교회 규칙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규칙서에는 분명히 안식일의 준수를 명 령하고 있다.90 (164.3)
 요약 및 결론
 안식일과 일요일를 함께 지키는 관습은 4세기 후반부의 아시아 기독교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거의 다음 세기까지 이러한 관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500년 부터는 아시아 교회의 주류가 안식일과 일요일은 함께 지켰다는 뚜렷한 문서적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유일한 예외로서 아르메니아 교회가 안식일을 지켰으며 인도의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동방교회도 안식일을 금식일로 삼지 않는 등 안식일을 존중하는 일부 전통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대한 이 정도의 존중마저도 다른 파 아르메니아 교인들과 통합파 아르메니아 교인들이 로마 카톨릭에 합류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164.4)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처럼 반(反)유대교 감정은 6세기 이후로도 계속되었으며 이것은 기독교회가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게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기독교회는 자주 자신이 유대교 회당으로 말미암아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때문에 기독교회의 여러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이 반(反)안식일의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식일 준수를 단념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자체가 이 지역에서 안식일의 준수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반증의 한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