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리우스 파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과 일요일
 424년에 페르시아와 로마의 적대관계가 확대되어 페르시아의 영토안에 있는 동방 시리아 교회(East Syrian Church)와 로마의 영토안에 있는 안디옥 교구의 유대 관계가 끊어졌다. 그리고 486년에는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이 페르시아 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으로 채택 되었다.54“동방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762년에 그 총주교 교구를 바그다드로 옮기기 전까지 셀류키-체시폰(Seleucia-Ctesiphon)에 총주교 교구를 두고 있었다. 1258년에 이 네스토리우스파의 총주교 교구는 모술(Mosul)로 옮겼으며 1400년 이후는 최종적으로 우르미아(Urmia) 호수 동쪽의 마라가(Maragha)로 옮겼다.”55 (159.2)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선교사로 자처하였다. 밍가나(A. Mingana)는 그들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선교적인 교회”라고 말했다.56 그들은 13세기에 페르시아에서 부터 아라비아, 인도, 투르케스탄, 시베리아, 중국에 까지 퍼졌다. 인도와 중국에 관해서는 별도의 항목에서 취급하겠으며 여기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선교된 그 밖의 지역에서 주로 안식일과 일요일의 준수와 관련된 역사을 취급하고자 한다. (159.3)
 네스토리우스파 총주교 이수- 얍(Ishu- Yab c. 585)에 의하여 기록된 주교 칙서에는 상당히 길게 일요일의 준수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주간의 거룩한 첫째 날인 주일에 관해서는—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된 이래 하나님의 아들이 신체적으로 부활하신 날이 하나님의 안식일 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공되었다: 이 날은 사람과 동물들을 이롭게 하는 안식의 날을 대신하여 전체적인 재생이 비유적으로 성취되었고 또 앞으로는 실지로 성취될 날인 것이다. 이 날은 한 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며 이 날에 일시적으로 있는 현재의 세상이 시작했으며 또 이 날에 미래의 세상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없다.∙∙∙ 주간의 첫째 날에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지옥을 부수고 교회의 기초를 세우시고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교리의 자녀들이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진 날을 저녁부터 저녁까지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 일부 신실한 교인들은 첫째 날에는 교회의 예배가 마쳐질 때까지 개인적인 일이나 여행을 삼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선한 의지보다도 더 강력한 어떤 긴급사항 때문이든지 또는 그들 자신의 경멸적이고 반역적이며 완고한 의지 때문에 마치 거역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둘째 날이나 안식일을 취급하듯이 취급하여 전혀 그 날을 영예롭게 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일과 공의를 실천함으로써 그날을 존귀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허락할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여 일하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면 죄를 짓게 된다.57 (159.4)
 이 흥미있는 본문에 의하면 6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일은 분명히 일요일이었다. 제칠일 안식일은 철저히 포기된 것 같이 보인다. 일요일을 존중하지 않은 것을 월요일이나 토요일 취급하듯이 일요일을 취급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한편 일요일 예배 후에 여행을 하거나 일하는 것이 정죄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같은 칙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총주교가 진주 잡이로 생계를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일요일에도 진주잡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특별히 고려하고 있다. 그들이 일요일에도 즐겨 교회로 온다면 허락하고 만약 진주잡이 때문에 교회에 오지 않는다면 그들을 죄로 부터 보호하는 방법과 경제적 손실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함께 강구해 보라고 성직자들에게 권고하였다.58 (160.1)
 6세기 이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자료에는 일요일이 휴식의 날이다.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은 거의 무시되었다 사람들이 그날에 금식하기를 꺼려하는 정도로만 그날의 종교적 의의가 남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었다. 16세기에 이르러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우르미아(Urmia)호수나 밴(Ban)호수나 모슬(Mosul:오늘의 서북방 이란과 동부터키와 북부 이락지역에 해당하는)사이의 삼각형 지역을 은신처를 삼게 되었다. 그 이후의 2세기에 걸친 역사는 별로 알려 지지 않았다. 1551년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분열된 후 이들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개입이 시작되었고 그리하여 결국 로마 교회의 인정을 받은 두 개의 우니아트(Uniate) 총주교구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초에 서양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을 때의 그들은 “반(反) 교황적 이었으며” “그들의 교회에는 초상이나 십자가상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고 단순하고 상징적인 십자가 상만이 장치되어 있었을 뿐이었다.”59 일요일 준수는 산악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엄격히 이행되고 있었던 반면 평원의 거주자들 사이에는 일요일이 그렇게 엄격하게 준수되고 있지 않았다.60 (160.2)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중국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초의 신뢰할만한 정보는 중국의 당(唐) 왕조(618-907)부터 나오고 있다. 638년과 745년에 포고되었던 황제의 칙령들과 1623년과 1625년에 시안푸(Hsi-an-fu. 西安村: 옛 長安)에서 발견된 그 유명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 기념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와 20세기의 전반부에 중국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파 관련 기록들이 그것들이다. (160.3)
 781년에 건립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 기념비는 알로펜(Alopen,何羅本.635) 주교가 장안에 도착하여 중국에 “광명의 종교”(Luminous Religion. 光明敎 또는,景敎)를 설법한 사건을 기록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몇가지 신앙관습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예컨데 “그들은 하루에 일곱 번 모여 예배하고 찬양했으며 죽은 자들과 산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7일 중 하루에는 피없는 제사를 바쳐 심령을 깨끗이 하여 순결을 다시 찾았다.”61 (161.1)
 장 뷔유미르(Jean Vuilleuymier. 1864-1959)는 이 기록을 가지고 7, 8세기의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증거로 삼았다.62 그러나 일본인 학자 피. 와이. 사이키(P.Y.Saeki)는 이 기록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한 후에 그 기록을 일요일 준수의 기록이라고 주장했다.63 (161.2)
 중국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파 관련의 다른 문서들에서도 사이키의 주장을 지지할만 한 몇 가지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첫째로 알로펜 주교가 장안에 도착한 직후인 635년이나 638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예수 메시아 수트라”(Jesus-messiah Sutra)에 나타나고 있는 십계명의 다소 긴 설명에 주간의 휴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수수께끼 같다. 다른 계명들은 다 언급되었다. 앞의 세 계명은 막연하게 언급되었고 뒤의 여섯 계명은 매우 분명하게 언급되었다.64 (161.3)
 1905년 6월에 에이 폰 르 코크(A. von Le Coq)가 중국쪽 투르게스탄의 가오-창(Kao-Chang)에서 여러개의 시리아 사본들을 발견하였다. 그 사본의 하나는 일년 전체에 걸쳐 일요일과 교회의 축일들에 사용하기에 적합한 성가들의 이름들을 기록한 책의 일부분이다. 이 사본은 9세기나 10세기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여섯번째 줄에는 “일요일에 교회가 성별 되어야한다”는 지시가 들어있고 23번째 줄에는 “일요일의 저녁 예배”가 언급되고 있다.65 (161.4)
 1925년과 1926년에 북경의 황궁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시리아 사본들의 묶음 중에는 “한해를 통하여 일요일의 예배를 위해 사용하도록 준비된 ∙∙∙ 네스토리우스파 예배서에 포함되어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찬미가들의 한 부분”이 들어있다.66 이것들은 12세기나 13세기에 기록된 것들이었다. 여기에는 두명의 “복 받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일요일 찬미가 하나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67 이 문건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예배일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들이 이행했던 신앙습관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61.5)
 몽고족이 지배하던 13세기의 원(元) 왕조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승 라반 사우마(Rabban Sawma)가 북경을 떠나 유럽까지 여행한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서도 일요일이 정상적인 예배일로 언급되고 있다. 그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접촉하면서 안식일과 일요일 예배문제로 갈등을 겪었다는 흔적은 그의 여행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로마에서 일요일 성찬식에 참가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의 초청까지 받았다.68 (161.6)
 이처럼 이 기간의 중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멀리 7세기부터 일요일이 유일한 휴식일로 지켜진 자료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162.1)
 인도교회와 안식일
 기독교가 언제 인도에 선교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최초의 흔적은 3세기부터 나오며, 뚜렷한 증거는 5세기부터 나온다.69 인도의 기독교는 셀류키아-체시폰(Seleucia—Ctesiphon)의 네스토리우스파 총주교구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이곳의 교회가 예배 예식에 사용한 언어는 시리아의 예전 언어였다. 기독교가 인도의 넓은 지역에 선포되었었지만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잔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을 서남 인도의 말라바르(Malabar) 해안 일대에서 발견하였다. 그 당시의 네스토리우스파 인도 교회의 자료에 의하면 약 3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그곳에 살았다.70 (162.2)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에 도착하기 이 전까지 인도의 교회가 안식일을 지켰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1599년에 소집되었던 디암페르(Diamper) 공회의의 기간에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알레이조 데 메네제스(Aleixo de Menezes)는 시리아어로 기록된 모든 책들을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로즈(Francisco Roz)에게 양도하여 이 자료들을 “수록하고 교정하고 폐기하도록”하는 법령을 승인받았다.71 율리우스 리히터(Julius Richter)는 이 법령 에 대하여 논평하여 말하기를 “인도에도 도마 교회의 초기 역사에 대한 자료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예수회의 이와같은 만행의 탓이었다”고 하였다.72 스티븐 니일(Stephen Neill)이나 존 스튜아트(J사m Stewart)같은 선교 사학자들은 포루투갈 사람들이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말라바르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다.73 (162.3)
 인도의 도마 교인들이 처음으로 포르투갈 사람들과 접촉했을 때 포르투갈 사람들의 눈에 비쳐진 이들의 종교관습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들이 남아있지만 이들이 일요일 이외의 어떤 다른 날을 준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들은 일요일을 지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일요일에 철저히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일요일에 일을 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74 그들에게 수요일과 금요일은 금식일이었다.75 안식일에나 일요일에 금식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일요일이나 다른 금식 일들은 일몰부터 일몰까지 준수되었다.76 (162.4)
 도마 교인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들어와 도마 교회의 지방교회들에 침투하여 그들에게 라틴 교회예식을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긴장관계가 시작되었다. 로마 교회는 도마 교인들의 생활에 대한 개입의 폭을 계속적으로 넓히기 시작하여 드디어 1598년의 디암페르 공회의에서 인도의 도마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 예속시켰다.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