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유대교의 영향은 실로 막대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지 못하게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였다.21 396년에는 유대인들이 주교를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고22 408년에는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조롱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23 (155.3)
 47년에 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을 노예로 소유하는 것이 최초로 법률적인 규제를 받게 되었으며24 6세기에는 금지되었다.25 그리고 레오 이사우리우스(Leo The Isaurian. 680-741) 황제는 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을 노예로 소유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시켰다.26 423년과 438년에는 새로운 회당 건축을 금지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졌고27 403년에는 유대인이 비유대인에게 할례를 베풀면 추방시켰으며 438년에는 그리스도인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유대인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28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1. 483-565)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안식일과 축제일들을 자유롭게 지키게한 호노리우스의 법(409또는 412)을 개정하여 그들의 축제에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하지 못하게 하였다.29 2, 3세기가 더 지난 후에 레오 이사우리우스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선교와 그리스도인이 유대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을 모두 처벌하였다.30 (155.4)
 퀴니섹트 공회의(Qunisext Council. 692)의 교회법 제11조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했다.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누구든지, 평신도라도 유대인들의 누룩없는 떠을 먹거나 그들과 어떤 친밀한 교제를 하거나 그리스도인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부르거나 그들로부터 치료약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목욕하거나 하지 못하게하라. 만약 누구든지 이런 일을 하다가 발각되면 파면시키고 평신도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쫓아내라.”31 (155.5)
 4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반(反) 유대주의적인 기독교 저술들
 4세기 부터 9세기 사이에 20명이 넘는 동방교회 저술가들이 각각 한편 이상의 반(反)유대교적인 저술을 남겼다.32 이러한 저술들의 일부는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반 유대교적 저술들은 어떤 추상적인 신학 논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 의해 기독교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33 (155.6)
 7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반(反) 유대교적 문헌들을 저술한 근동(Near Eastern)의 수사들 중에는 상당수가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그들로 부터 직접적으로 위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칠 그들의 위협적인 영향력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러나 그들 자신이 직접 유대인들과 어떤 지적인 접촉을 경험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술이 앞으로 유대인들과 논쟁하게 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 논리와 답변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했다.34 (156.1)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 쓴 여덟편의「유대인 반박 설교」(Homilies agaimst die Jews. 387-389)의 밑에 깔린 근본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축제에 참석하고 또 일부는 할례를 받고 있는 문제였으며, 특히 그 당시의 문제는 주로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된 문제였다.”35 안디옥의 이사악(Isaac of Antioch. 5세기)은 그의「유대인 반박 설교」에서 “그의 시대에도 요한 크리소스톰의 시대에 있었던 일들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증언하였다.” 그의 설교도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축제에 참가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었다.36 (156.2)
 세루그의 야곱(Jacob of Serug. c. 450-521)은 유대인들을 반박하는 세편의 설교를 남겼는데 그의 교인들이 주변에 살고있는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써 제기될 문제들을 다루었다.37 똑같은 일들이 가명의 에브라임(Psuedo- Ephraim)의「목적과 훈계에 대하여」(De Fine et Admonitione)에도 나타나고 있고38 또 예루살렘의 히에로니무스(Jerome of Jerusalem. 7세기)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8세기의 교회도 여전히 유대인들의 위험스러운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래서 지식으로 이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39 비잔틴 제국의 초기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과 그들의 그리스도인 이웃들 사이에 적대 관계가 점진적으로 증대되고 있다.”40 유대교의 끈질긴 생명력은 기독교회에 항구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156.3)
 그러면 이와같은 중세 기독교의 반(反) 유대교 사상은 중세 교회의 안식일 준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 대답의 하나를 아프라하트(Aphrahat)의 설교들(336-34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설교는 “유대인들과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논리를 제공하고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아 신앙이 약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었다.41 그의 13개의 설교들은 특별히 안식일 문제를 다루고 있다.42 (156.4)
 아프라하트는 안식일로 말미암아 산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기 위해서나 또는 의와 죄를 분간하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가 아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육체적인 휴식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 유용한 것이지만 구원을 위해 유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안식일은 태초에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가축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지킨다. 이것만 보아도 안식일은 종교적인 의무라기 보다는 신체적 필요을 위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점에 근거하여 여호호수아와 마카비우스의 경우와 같은 전쟁 때에는 안식일이 지켜지지 않았듯이 과거나 현재나 언제든지 안식일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결론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켰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공적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제도 자체는 선한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소망되었던 것이며 만약 하나님까지도 안식일에 안식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더 안식일에 안식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안식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준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156.5)
 아프라하트의 신앙 공동체는「사도들의 헌장」이 명령한 대로 일요일과 나란히 안식일을 지켰던 것 같다. 그리고 일부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켰다. 아프라하트 자신도 안식일 준수를 완전히 없애려 하지는 않았고 단지 안식일 준수의 종교적 의의를 제거하고자 하였다.43 (157.1)
 조금 더 후대에 속하는 닛사의 가명의 그레고리(Psuedo- Gregory of Nyssa)는 그의 「유대인들을 반박하기 위해 구약 성경에서 발췌한 증언들」(Selected Testimonies From the Old Testament against the Jews, c. 400)에서 주장하기를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돈에 대한 탐욕을 중지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출애굽 할 때 애굽사람들이 그들에게 준 물건들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쉬지 않고 일하여 돈을 모으려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노동을 여섯날로 한정하였다44는것이다. (157.2)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준수의 관습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요구한 문서적 증거들도 있다. 출처가 확실치 않으나 동방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긴 신앙 고백문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히브리인들의 모든 예배, 할례, 모든 율법주의들, 누룩 없는 빵, 유월절, 양을 잡아 제사 하는 일, 절기들, 희년들, 나팔절, 대속죄일, 장막절, 그 밖의 모든 히브리인들의 축제, 그들의 희생제사, 기도들, 성수 예식, 성결예식, 속죄예식, 금식, 안식일, 월삭, 먹고 마시는 것, 등을 단념한다. 그리고 유대 율법의 모든 관습과 제도를 포기한다”(PG 1:1456). 이와 유사하지만 좀더 짧은 고백문이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도 작성되었는데 이 고백문도 안식일의 포기를 명시하고 있다.45 (157.3)
 비잔틴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 610-641)는 모슬렘의 침략자들과 그밖의 다른 세력들에 의해 제국의 통일과 안녕이 위협을 받게되자 제국의 통일을 강화하는 노력의 하나로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강요하였다.46 또 교회는 교회대로 신앙 신참자들이 신앙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을 고려하여 신참자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저작들을 준비했다. 그러한 논문의 하나가 634년에 나온「야곱의 교훈」(The Teaching of Jacob)이다. 이 “교훈”에 의하면 모세 이전의 유대인들에게는 십계명도 없었고 안식일의 준수도 없었다. 모세가 율법을 준 이후로 그들이 안식일과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는 아무도 그를 버리고 안식일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P0 3:612). 교훈의 이 부분에는 “안식일의 소용없음”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만약「야곱의 교훈」이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Orthodox Church)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면 634년에 이르러 비잔틴의 정교회에서는 안식일이 더 이상 육체적 휴식의 날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전통적인 힘에 의하여 안식일은 여전히 작은 범위에서나마 예전적인 중요성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57.4)
 한 세기 후에 동방 교회 즉 비잔틴 정교회 최후의 대교부인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은 모슬렘이 다스리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안식일 문제로 유대인을 반박하는 글을 썼다.47 「유대인을 반박하는 주상(柱上) 고행자 세르기우스의 주장」(The Disputation of Sergius the Stylite against a Jew)도 같은 세기에 속하는 문서 같이 보인다(c. 730-c. 770). 이 문서의 목적도 “유대교로 개종하는 배교의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48 안식일에 대하여 이 저자는 몇가지 잘 알려진 논지를 편 다음에 “하나님도 안식일에 일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말로 자기의 주장을 마쳤다.49 (158.1)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는 그의「유대인들을 반박하는 논문」(Dissertation against the Jew. c. 1050)에서 간략하게 그때까지 잘 알려진 반(反) 안식일 논지를 재론하였다. 안식일은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을 위해 제공되었지만 예수님이 오시어서 율법을 폐하시고 안식일을 폐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짐승은 구출하려 했으면서 사람은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시편 95편 8-11 절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안식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그러므로 다른(헤테로스) 안식과 또 다른(헤테라) 안식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이다. 주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그가 새 언약이라고 말했을 그는 처음 것을 옛것으로 만드시는 것이다.”50 (158.2)
 에뎃사(Edessa)에서 북쪽으로 100마일의 거리에 위치하는 티그리스의 상부 골짜기에 아미드(Amid:Diabekr)가 위치한다. 이 지역의 야곱파 총감독인 디오니시우스 바르 살리비(Dionysius Bar Salibi. 11기년 사망)는 여러권의 성경 주석을 썼는데「유대인 반박론」(Against the Jews)이라는 저서도 남겼다. 13세기의 야곱파 교회는 “감독들과 성직자들이 유대교의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는 것을 금하고 신자들에게 안식일에 일하도록 하여 안식일을 유대인의 방식으로 지키지 않도록 명령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들로부터 누룩 없는 떡을 받지 못하도록 금하는” 교회 법을 공표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51 (158.3)
 반(反) 유대교 저술들은 14세기와 15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앞에서 인용한 야고파 교회의 교회법들은 안식일이 중요하게 취급된 자료로서는 가장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158.4)
 유대교에 의해 영향받은 것 같은 두 개의 주변적 기독교 단체들
 여러 저자들에 의해 중세 아시아지역에서 안식일을 준수한 그룹으로 언급된 두 개의 군소 단체가 있다. 그 하나는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1:379-395)의 통치기간에 삽바티우스(Sabbatius)가 노바티우스파(Novatianism)에서 분리하여 나오면서 발생한 단체 같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 에의 하면 사바티우스는 “개종했지만 계속해서 유대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유대인”이다.52 마이페르카트(Maipherkat)의 감독 마루다스(Maruthas)가 작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이단들의 목록집에는 삽바티우스파(Sabbatians)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그들은 일요일이 아닌 안식일에 희생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또 복음서 말고 토라를 백성들에게 읽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할례는 폐지되지 않았으며 율법의 계명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새 언약은 옛언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의 유월절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율법에 집착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체 한다.”53 그러나 이 그룹이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았다. (1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