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1 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점검
 그리스도께서 십계명을 더욱 단순하고 더 훌륭한 사랑의 계명으로 대치하셨다는 주장은 마태복음 5:17-19에서 발견되는 주님 자신의 결정적인 증거에 의해서 분명하게 거절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7-19). (69.1)
 이 선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1) 두 번이나 그는 자신의 오심이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신다.

 (2)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 모든 것은 현세의 끝이 올 때까지 변치 않고 유효할 것이다.

 (3) 하나님의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파기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정죄 아래 서게 된다.

 이러한 선언이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해야 한다. (69.2)
 여기에 주석적인 진술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도덕적 율법이 그분의 강림으로 인해 더욱 단순하고 더욱 훌륭한 율법으로 대치되었다는 언급을 결코 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사명이 우상 숭배, 참람됨, 안식일 파기, 부모에 대한 불경, 살인, 도적질, 간음, 잡담, 또는 질투 등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함이라는 주장은 성서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한 행동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위해서 나타내 보이신 도덕적인 원칙들을 범하는 것이다. (69.3)
 불행하게도 라쯔라프, 하나님의 세계교회,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들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몇 개의 문제 구절들(고후 3:6-11; 히 8-9; 갈 3-4)을 뽑아서 구약을 더욱 단순하고 더욱 훌륭한 신약의 율법으로 대치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사례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구주의 증언은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분명히 모순되는 본문들을 설명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69.4)
 본인은 제5장 “바울과 율법”에서 율법에 대한 분명한 바울의 상반된 진술을 점검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분명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이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하는 다른 문맥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가 구원의 배경(칭의--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는 것)에서 율법을 말할 때 특히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분명하게 확증한다(롬 3:20). 다시 말해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에 대한 배경에서 율법을 말할 때, 특별히 율법폐기론자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유효성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롬 7:12; 13:8-10; 고전 7:19). (69.5)
 마태복음 5:17-19에 대한 라쯔라프의 해석
 라쯔라프는 예수: 율법의 성취’(Jesus: The Low's Fulfillment)라는 자신의 책, 제14장에서 마태복음 5:17-19을 다소 길게 다루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의 해석을 두 용어, 즉 “율법”“성취하다”라는 두 핵심 단어 위에 놓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조사 연구는 그로 하여금 예수께서 언급하신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전부(entire) 옛 언약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32) 그 결론 자체는 예수께서 일반적으로는, 구약의 도덕적인 원칙들을 높이셨기 때문에 합당하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12에 있는 “황금률”은 본질적으로 “율법과 선지자들”로 제시되고 있다. 마태복음 22:40에서, 두 큰 계명들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의지하고 있는 기초로 보여진다. (70.1)
 라쯔라프의 이론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는 모세의 율법을, 특별하게는 십계명을 폐하셨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가 율법의 넓은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성취하다”라는 동사를 협소하게 해석하므로 그렇게 말한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성취하다’라는 단어가 매 번 사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되어 사용되거나, 아니면 그것과 관련된 사건에 사용되고 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예언을 성취한 단일 사건이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진행중인 성취에 참여하지 못한다”33)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라쯔라프는 마태복음 5:17-19에 있는 “성취하다”라는 단어가 율법과 선지자들의 계속적인 본질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야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예언들”34)의 성취를 언급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70.2)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라쯔라프는 마태복음에서 여섯 번이나 언급한 “너희가 들었으나. .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43)라는 구절에 호소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그 구절은 주님께서 “구약에 묶여져 있는 특성을 완전히 버리기 위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계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그가 행할 것이나, 그러나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세상의 메시야와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생애를 가리키는 예언들, 표상들 그리고 그림자들을 그가 완전히 성취하시기 전에는 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그가 모든 것을 성취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바로 이 일은, 요한에 따르면, 예수의 죽으심에서 일어났다.”35) 결론은 명확하다. 라쯔라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율법의 종결을 나타낸다. (70.3)
 율법의 연속성
 라쯔라프의 결론은 직접적인 문맥 안에서 본문을 면밀히 연구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서 주로 파생된 여러 가지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5:17-19의 직접적인 문맥은 분명히 율법과 선지자들의 성취는 궁극적으로 라쯔라프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세가 끝날 때에 일어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에 천지가 없어지지 아니했으므로, 예수에 의하면, 율법의 기능은 현세가 끝날 때까지 연속될 것이 분명하다. (70.4)
 “너희가 들었으나 . .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옛 언약의 묶는 특성을 완전히 없이하려는 예수의 의도를 가리킨다는 라쯔라프의 여섯 개의 반박 문은 그리스도께서 매 번 언급하신 여섯 계명들의 준수 의무에서 그의 제자들을 벗어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 그 대신, 그분께서는 그 계명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준수하도록 요청하셨다. 죤 겔스트너(John Gerstner)가 지적한 것처럼, “도덕률에 대한 그리스도의 확증은 완전하였다. 율법으로부터 제자들을 해방시키기보다는 그는 오히려 그들을 그 율법에 더욱 단단히 묶으셨다. 그는 율법의 하나도 폐하지 아니하셨으며 오히려 모든 율법들을 더욱 강하게 하셨다.”36) (70.5)
 그리스도는 율법을 수정하시거나 교체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그는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그 율법의 신적 의도를 드러내셨다. 율법은 살인 자을 정죄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노하는 것도 죄로 정죄 하셨다(마 5:21-26). 율법은 간음을 정죄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도 정죄 하셨다(마 5:27, 28). 이것은 율법의 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의 신적 의도를 명확하게 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다. 분노와 음욕은 율법에 통제를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법은 통제 받을 수 없는 외적인 행위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정신은 외적인 행동과 함께 내적인 동기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71.1)
 율법의 계속성
 라쯔라프가 마태복음에 있는 “성취하다”(to fulfill)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한 예언적인 실현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에서 일어난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어떤 국면들, 즉 레위인들의 봉사와 메시야의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서 종결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예수에 의해서 언급된 하나님의 율법의 도덕적인 국면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율법이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유효할 것으로 18절이 분명하게 확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21-48절의 대조 논리의 빛 가운데서는, “성취하다”라는 말은 특별히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더욱 완전한 뜻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외형적인 순종과 다소 랍비적인 전통을 공격하시는 예수는 율법의 탁월한 해설자로 행동하신다(마 15:3-6; 9:13; 12:7; 23:1-39). (71.2)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하나님의 도덕률을 교체하시는 것으로가 아니라 구약의 계속과 확증으로 제시되어 있다. 마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종결을 보지 않고 그것들의 실현과 계속성을 보고 있다. 마태복음 7:12에 있는 “황금률”“율법과 선지자들”의 본질이 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마태복음 19:16-19에서,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후 그는 계명들 중 다섯 개를 열거하셨다. (71.3)
 마태복음 22:40에 있는, 두 위대한 계명들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놓여있는” 기초로 보여진다. 라쯔라프는 그 율법의 요약이 그것이 요약하고 있는 율법들을 폐지하거나 아니면 도외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데 수반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을 무시하거나 범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 19:19; 마 22:39)는 요약 계명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백성들을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마 23:23)을 이해하도록 부르실 때, 작은 것들도 경시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그분께서 즉각적으로 부과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71.4)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이 그 가르침(마 5:21, 22, 27, 28)을 실현하고, 확증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을 강화시키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애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구약 율법의 기독론적인 실현과 지속적인 유지는 예수의 구속 사역의 빛에서 안식일의 신약적인 이해를 위해 의미심장한 뜻을 가진다. 이 중요한 주제는 본 연구의 4장, “구주와 안식일”에서 조사하고자 한다. (71.5)
 (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