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1 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점검
 선지자들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사이에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감동적인 어조로 시내 언약에 호소한다. 이스라엘은 양떼였고, 여호와는 목자이셨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이고, 여호와는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였다. 이스라엘은 아들이었고, 여호와는 아버지셨다. 이스라엘은 배우자였고, 여호와는 신랑이셨다. 이러한 상상은, 피에레 그레로트(Pierre Grelot)가 이끌어 낸 것처럼, “시내산 언약이 사랑의 대면자로 나타낸다(겔 16:6-14). 그 자체가 순종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바로 그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조심스럽고도 자애로우신 사랑이시다.”14)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에는 무엇인가 심각한 잘못이 있다”라는 트카의 논리를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 (63.3)
 믿음만으로는 안됨
 시내산 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은 구원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을 마련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반응을 의미한다. 불행하게도,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보았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자체만이 그들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이 결코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 것은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수반하기 때문이다(갈 5:6). 사람이 진실로 믿음 없이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을까? 그런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도 나타나는가? 율법주의의 문제는 계명 꾸러미들을 바꾸므로 해결되는가? 그러한 곡해들은 구약 언약과 신약 언약 모두를 많은 사람들에게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들로 남게 할 것이다. (63.4)
 시내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의 계명을 순종하도록 초청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율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분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죠지 앨든 래드(George Eldon Ladd)가 자신의 훌륭한 작품인 신약신학(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확증하기를, “율법은 사람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부과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졌다”(갈 3:30; 5:13, 20; 갈 3:19).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시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들을 보여주시므로,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15)고 하였다. 래드는 계속해서 주목하기를 “갈라디아 3장로마서 4장에 흐르는 사상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의 언약을 신뢰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한 방편으로 율법을 준수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보증으로 율법을 준수했다는 것이다.”16) (63.5)
 목회자의 보고서에서 경시되고 있는 것은 시내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덕적인 행위의 원칙뿐만 아니라 희생제사 제도의 표상을 통해서 구원을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불러 올렸을 때 그는 그에게 “율법과 계명이 기록된 돌비를”(출 24:12)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은혜와 용서를 마련해 놓으셨음을 표상적으로 설명하시기 위해서 “성막의 식양”(출 25:9)을 보여주셨다. (64.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주요 다른 점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그림자 대 실체(shadow versus reality)이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더 나은” 구속의 사역(히 8:6)에 대한 상징(히 9:9)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언약은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이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히 9:26)시는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64.2)
 그레그 반센(Greg Bahnsen)도 올바르게 주목하기를 “만일 우리가 옛 언약과 새 언약(율법과 복음) 사이의 선입견 적인 신학 논리를 주입시키지 않고, 성경이 성경 그 자체를 해석하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옛 언약, 곧 모세의 법은 신약에서 발견되는 복음과 꼭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에 기초하여 구원을 주는 자비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른 점은 모세의 언약 곧 율법의 언약은 구주와 그분의 구속의 사역을 고대하도록 하는 약속들, 예언들, 의식적인 준비들, 표상들 그리고 그림자들과 같은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들을 시행하시는 구주의 오심을 미리 내다보도록 하는데 있었다. 복음 또는 새 언약은 설교, 성례전(침례나 성만찬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시행하므로 율법이 바라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성취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관계와 언약의 실체는 율법과 복음 아래서는 꼭 같다.”17) (64.3)
 구약은 신약과는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거나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가르치지 않는다. 칭의는 구약에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 안에 놓여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히브리서 11장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처럼 믿음의 백성들이었다. 유대인의 부조였던 아브라함 자신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이었다(창 15:6; 롬 4:3; 갈 3:6).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사 45:25)라고 하였다. 바울은 구약 안에 있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라는 말씀을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갈 3:11 참조)로 이해하게 되었다. (64.4)
 그리스도의 강림의 결과는 옛 언약과 관련된 모든 레위인들의 봉사, 곧 “전에 계명이 무익하므로 폐하고”(히 7:18; 8:13; 10:9 참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오심으로 일반적으로 안식일을 포함한 모세의 법이 폐하여졌다고 해석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런 해석은 오늘날 법에 대한 잘못된 사고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옛 언약의 레위인들의 제사장 직과 봉사를 언급하는 히브리서에서 발견되는 종결 진술이 안식일 계명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도덕률의 원칙들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다. 우리가 아래에서도 볼 것이지만, 안식일에 관해서 히브리서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라고 분명하게 진술한다. (64.5)
 (2) 두 언약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데일 라쯔라프의 견해
 여러 면에 있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있는 차이점에 대한 라쯔라프의 견해는 요셉 트카의 견해와 흡사하다. 결론적으로, 라쯔라프의 목적은 새 언약이 더 이상 율법에 기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옛 언약보다 더 나은 언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트카와 마찬가지로 라쯔라프는 그리스도께서는 십계명과 안식일을 단순하고 더 나은 법으로 대치시키셨다는 자신의 논리를 유지하기 위해 옛 언약은 십계명으로, 그리고 새 언약은 사랑의 원칙으로 축소시킨다. 이러한 분석의 목적을 위해, 본인은 라쯔라프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를 율법 대 사랑이라는 말로 다루고 있는 주요 대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64.6)
 율법 대 사랑
 라쯔라프의 기본적인 논재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는 현격히 다른 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전자는 율법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비록 옛 언약의 중요한 국면은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적인 구출”18)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옛 언약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는다: “우리는 십계명이 언약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증거판’(출 31:18),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출 34:28), ‘증거’(출 40:20), ‘여호와의 언약’(왕상 8:8, 9, 21)으로 불려진다.”19) (65.1)
 “우리는 또한 신명기를 통해서 출애굽기에 있는 다른 율법들이 ‘언약서’(출 24:7), 또는 ‘율법책’(신 31:26)으로 불려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런 법들이 십계명을 해설하거나 또는 확장하는데 기여했다”20)는 것도 보았다. 다시 라쯔라프는 말하기를 “십계명은 언약의 말씀들이다. 또한 거기에는 그 언약의 확장된 해설들이 들어 있었니, 곧 신명기를 통해 확인된 출애굽기의 법이었다”21)고 하였다. (65.2)
 대조적으로, 라쯔라프에게는 새 언약의 본질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는 기록하기를, “이 새 언약의 부분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옛 언약이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었다. 새롭게 된 부분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였다. . . 옛 언약에서 무엇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이라는 것을 알도록 했는가? 그들이 사랑했던 그 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먹었던 것, 그들이 먹지 않았던 것; 그들이 예배드린 장소, 그들이 예배드린 때, 그들이 입은 옷, 등등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에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그 방식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22)고 하였다. (65.3)
 라쯔라프는 옛 언약을 “율법서 안에 있는 십계명을 확장시키고, 또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 이 상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나타내 보이는 복음서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 . 그 후, 편지서 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하심에 대한 해석들을 가지고 있다. . . 따라서 새 언약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서 확장되고 또 해석되고 있으며, 새 언약의 일 부분이 되었다”23)라며 두 언약 사이의 대조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65.4)
 라쯔라프에 따르면, “율법”“사랑” 사이에 있는 구별은 언약의 표징들 가운데서 반사된다. “옛 언약에 들어가는 표징은 할례였으며,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표징은 안식일이었다. . . 신약에 들어가는 표징은 침례이며, 또 기억해야 할 표징은 주의 만찬 예식이다.”24) 표징들의 두 배경 사이의 차이점은 아래의 단순한 챠트를 통해서 명확해진다. (65.5)
옛 언약: 새 언약:
들어가는 표징
할례 침례
기억해야 할 표징
안식일 주의 만찬25)
 위의 대조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각기 다른 표징들을 가진 율법의 두 다른 배경, 즉 후자가 전자보다 더 단순하고 더 나은 것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그 대조는 옛 언약은 끝없이 세분화된 법들에 순종해야 할 책임 위에 놓여있으며, 반면에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단순한 사랑의 계명에 의존되어 있다고 제시한다. 단순하게 제시한다면, 십계명의 옛 언약의 도덕적 원칙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더 낫고 더 단순한 사랑의 원칙에 의해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66.1)
 라쯔라프는 이러한 견해를 분명하게 확증한다. “옛 언약의 생애에는, 도덕성이 빈번히 수없이 많은 특별한 법들에 대한 책임성으로 보여졌다. 새 언약의 생애에서는 도덕성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반응에서부터 나온다.”26)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새 법은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옛 법보다 더 낫다.”27) “새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에서 십계명이 여러 번 반복된 것과 꼭 같이, 신약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28) (66.2)